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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아첨과 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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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21 년 6 월 [통권 제98호]  /     /  작성일21-06-04 14:37  /   조회4,46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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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동물의 비애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특별히 탁월한 신체적 능력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맹수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고, 온갖 자연적 제약을 극복해 왔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지능을 지닌 영장류라는 점도 있겠지만 인간 상호간의 유대와 협력이 가장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와 연대를 통해 힘을 키우고, 고난을 극복해 왔다. 이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현대사회는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자연적 제약을 거의 극복했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사람들이 느끼는 대부분의 스트레스와 고통은 바로 인간관계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도 ‘마음 다스리기’, 더 세밀하게 말하면 감정으로부터 초래되는 번뇌를 다스리는 것이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를 유식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심소心所의 작용에 의해 움직이는 동물이라는 뜻도 된다. 감정의 동물로서 인간은 상대의 감정에 의해 내가 상처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기 자신의 감정에 자신이 휘둘려 고통 받기도 한다. 상대의 지위가 높거나 힘이 강할 경우 상대에게 굽신거려야 하는데 이것은 감정을 속이는 일이고, 감정에 상처를 남기는 일이다.

 

반대로 내가 상대보다 지위가 높거나 강할 경우 거드름을 피우며 상대로부터 우월한 대우를 받고자 하면서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사회성이 다른 동물들보다 인간을 강하게 만들었지만 또 그것 때문에 인간은 고통 받고 있는 셈이다. 감정으로 인해 인간은 상호간에 유대감을 형성하고 위로받고 용기를 얻기도 하지만 그 감정 때문에 고통에 시달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감정으로 인해 삶이 고달픈 것이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비애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살펴볼 번뇌심소는 성격이 서로 반대인 아첨과 교만인데 모두 감정과 관련된 심소들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20가지 수번뇌심소는 10가지 소수, 2가지 중소, 8가지 대수로 나눠진다. 아첨과 교만은 10가지 소수 중에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번뇌심소들이다.

 

 

아첨과 겸손의 차이 

 

‘첨(諂, māya)’ 심소는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거짓으로 남에게 친절하고 순종하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아부를 떨어서 이기적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여기서 아첨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므로 첨심소는 넓은 의미에서 탐貪심소의 일부분이며, 부질없는 것에 매달리는 것이므로 치癡 심소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첨諂 심소에 대해 “남을 끌어들이기 위해서[為網他故] 교묘히 본심과 다른 행동을 보이며[矯設異儀] 거짓으로 굽신거리는 것을 성질로 한다[險曲為性].”고 했다.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뜻을 관철할 목적으로 진심을 숨기고 거짓으로 순종하는 체 하고, 상대의 기분을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 아첨의 성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본심을 어기고 아첨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상처를 남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아첨은 타인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아첨해서 굽히는 사람[諂曲者]은 남을 끌어들이기 위해[為網帽他] 적절한 때에 따라 숙이고 따르며[曲順時宜]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矯設方便] 남의 마음을 사로잡거나[為取他意], 혹은 자기의 허물을 숨기기 위함[或藏己失].”이다. 여기서 아첨하는 이유는 첫째는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함이고, 둘째는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상대의 호감을 사거나 또는 자신의 약점 때문에 마음에 없는 말과 행동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첨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동물인데, 상대가 있는 삶에서는 항상 당당할 수만은 없다. 거래를 따내기 위해 바이어에게 없는 칭찬을 해야 하고, 집안의 평화를 위해 마음에 없는 말도 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은 법인데 자신의 마음과 반대로 행동해야 하니 여기서 갈등과 번뇌가 초래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겸손도 아첨으로 보아야 할까? 겸손과 아첨의 차이는 진실성과 이해득실로 가려질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과 행동이라면 아첨이 아니라 겸손일 것이며, 이해득실과 무관하게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라면 아첨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이나 약점을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굽신거린다면 아첨이다. 하지만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라면 그것은 아첨이 아니라 겸손이고 인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교만에 담긴 두 가지 번뇌

 

‘교(憍, mada)’ 심소는 ‘교만’ 또는 ‘방자함’을 뜻한다. 타고난 인종, 혈통, 외모, 지위, 학벌, 가문 등 남들보다 우월한 조건을 근거로 타인에게 우쭐대며 특별하게 대접받으려는 것이 교만이다. 따라서 교만 역시 탐貪 심소의 일부분으로 분류하고 있다.

 

『성유식론』에서는 교만에 대해 “자신의 우월한 일에 대해[於自盛事] 깊이 탐착하는 마음을 일으켜[深生染著] 그것에 취한 방자함이 본성이다[醉傲為性].”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자신의 ‘우월한 일[盛事]’은 여러 가지 범주가 있을 수 있다. 인종적으로 백인이 유색인종에 대해 갖는 우월감도 교만이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우쭐대거나 갑질하는 것도 교만이고, 부자가 자신의 경제적 힘을 믿고 거드름 피우는 것도 교만이고, 학벌 좋은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을 멸시하는 것도 교만이고, 외모가 준수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우쭐대는 것도 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경미 작

 

사람이 아무리 탁월하게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육신은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부질없는 것이다. 내 삶의 근간이 되는 육신조차 부질없는데 하물며 자신이 소유한 조건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의 삶에서 현상적 문제들은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들이며 본질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체로 받아들이고 집착하게 되면 그런 것들을 믿게 되고, 여기서 교만이라는 왜곡된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이치를 망각하고 교만하게 구는 것에 대해 『성유식론』에서는 ‘취방醉傲’이라고 표현했다.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지혜의 안목이 아니라 부질없이 ‘헛것에 취하여 방자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방자함에서 갖가지 번뇌와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번뇌가 된다. “방자함에 취한 사람[憍醉者]은 모든 잡염법을 일으키고 증장한다[生長一切雜染法].”고 했다. 남들보다 좀 낫다고 생각되는 조건들을 자신의 실체적 특성으로 착각하여 나르시스처럼 그런 것에 도취되어 방자하게 행동하면 그로부터 온갖 번뇌 망상에 물들게 되고, 자신의 허물이 자라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만은 주로 타인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타인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갑질과 같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군림하며 특별한 대우를 받고자 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만은 종국에는 자신에게도 번뇌가 되고 스트레스가 된다. 첫째는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 자신의 교만심 때문에 스스로 멸시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런 생각 때문에 화가 치밀고 스스로 괴로워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조건을 기준으로 잘났다고 뻐기는 사람은 자신보다 잘난 사람 앞에 서면 자신이 세운 그 기준 때문에 스스로 주눅이 들고 초라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교만은 다른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커다란 번뇌가 된다.

 

아첨과 교만은 서로 반대되는 심소 같지만 그 속성을 보면 모두 겸손과 관련 있다. 겸손은 어느 종교에서나 강조하는 덕목이다. 자성을 바로 보아 ‘스스로 구원하라[自度]’고 가르치는 혜능대사도 ‘항상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라’는 뜻에서 ‘상행하심常行下心’을 강조했다. 물론 교만하지 말라고 해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염세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게 여유 있고, 겸손하려면 스스로 내적 자긍심이 깊어야 비로소 당당하고 겸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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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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