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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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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1 년 6 월 [통권 제98호]  /     /  작성일21-06-04 16:14  /   조회5,43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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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6) /두 가지 열반[二涅槃]

 

 ‘두 가지 법[二法]’을 논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열반[二涅槃]’이다. 두 가지 열반에 대한 논의는 불멸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또 두 가지 열반에 대한 해석도 문헌과 학자에 따라 각기 다르다. 『삼장법수』에서는 『금광명경현의金光明經玄義』와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언급된 두 가지 열반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삼장법수』의 설명만으로는 두 가지 열반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두 가지 열반이란 궁극의 목적인 열반(涅槃, nirvāṇa, nibbāna)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다. 두 가지 열반이란 유여열반(有餘涅槃, saupādisesa nibbāna)과 무여열반(無餘涅槃, anupādisesa nibbāna)을 말한다. 유여열반은 ‘남음이 있는 열반’이라는 뜻이고, 무여열반은 ‘남음이 없는 열반’이라는 뜻이다. 이때 ‘남음’이 무엇인가에 따라 열반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두 가지 열반의 맹아萌芽가 초기경전에 나타난다. 『잡아함경』 제27권 제738경에서 “이 칠각지七覺支를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마땅히 두 가지 과보를 얻게 되나니, 현세에서 지혜의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이나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는다.”[T2, p.197a]고 했다. 또 『잡아함경』 제27권 제740경에서 “만일 비구가 이 칠각지를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반드시 일곱 가지 과보를 얻을 것”[T2, p.797a]이라고 했다. 일곱 가지 과보란 유여열반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열반을 일컫는다.

 

   위에 인용한 『잡아함경』의 제738경과 제740경에서는 아직 유여열반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무여열반에 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다. 또 이에 대응하는 니까야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이 두 경은 부파불교 시대에 설일체유부에서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잡아함경』은 설일체유부에서 전승한 것이기 때문이다. 『잡아함경』 제45권 제1221경에 “그때 존자 바기사婆耆舍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우리 화상(和上=和尙)께서는 유여열반에 들었을까, 혹은 무여열반에 들었을까?”[T2, p.333a, “時尊者婆耆舍作是念: 我和上爲有餘涅槃, 無餘涅槃”]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경에서 비로소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이라는 술어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 경에 대응하는 『숫따니빠따Suttanipāta』의 「왕기사-숫따Vaṅgīsa-sutta」(Sn.Ⅱ.12)의 내용은 약간 다르다. 「왕기사-숫따」에서는 왕기사Vaṅgīsa 존자의 스승 니그로다깝빠Nigrodhakappa 장로가 완전한 열반에 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왕기사 존자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 ‘나의 스승은 완전한 열반(parinibbāna, 般涅槃)에 드신 것일까? 완전한 열반에 드시지 않은 것일까?’ 그래서 왕기사 존자는 세존이 계신 곳으로 가서 그것을 여쭈었다. 그러나 붓다의 답변은 이 경에 실려 있지 않다. 아무튼 이 경에서 말하는 ‘완전한 열반’이 후일 무여열반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한 것은 아닐까?

   초기경전에서 완전한 형태의 두 가지 열반은 한역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과 이에 대응하는 『이띠붓따까(Itivuttaka, 如是語經)』에 나타난다. 『증일아함경』 제16 화멸품火滅品 제2경에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그때 세존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두 가지 열반의 경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유여열반의 경지와 무여열반의 경지이다. 어떤 것이 유여열반의 경지인가? 비구가 다섯 가지의 번뇌[五下分結]를 끊고 반열반般涅槃에 들어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유여열반의 경지라고 한다. 어떤 것이 무여열반의 경지인가? 비구가 번뇌를 다 끊고 번뇌가 없어져서 마음이 해탈하고 지혜로 해탈하며 몸으로 증득하여 스스로 즐겁게 노닐며, ‘나고 죽음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해야 할 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사실 그대로 안다. 이것을 무여열반의 경지라고 한다[T2, p.579a].”

 

 이 경에서 말하는 무여열반은 현법열반(現法涅槃, diṭṭhadhamma-nibbāna)을 증득한 아라한의 경지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경에 대응하는 『이띠붓따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열반의 경지에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유여열반의 경지와 무여열반의 경지이다. 유여열반의 경지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서 존경을 받을 만한 비구는 마음의 더러움을 모두 없애고 이미 완성되었고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쳐 마음의 짐을 덜었다. 그는 자기의 목적에 도달하여 미혹한 생의 속박을 끊고 올바른 완전지完全智로써 해탈을 얻고 있다. 그러나 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눈・귀・코・혀・몸)은 아직 계속 남아 있으므로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경험하고 즐거움과 괴로움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욕심을 멸하고 성냄도 멸하고 어리석음도 멸한 사람으로 이것이 바로 유여열반의 경지이다[Itiv.44].”

 

   “비구들이여, 또한 무여열반의 경지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현세에서 존경받는 비구는 마음의 더러움을 모두 없애고 이미 완성되었고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쳐 마음의 짐을 덜었다. 그는 자기의 목적에 도달하여 미혹한 생의 속박을 끊고 올바른 완전지로써 해탈을 얻고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는 자신의 생활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에 대하여 기쁨이 없으며 냉전하고 침착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무여열반이다. 이것이 두 가지 열반의 경지이다[Itiv.44].”

 

   위에서 인용한 『증일아함경』에서는 ‘번뇌’의 유무에 따라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으로 구분하고 있다. 반면 『이띠붓따까』에서는 ‘육체’의 유무에 따라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를테면 육체가 남아 있는 것을 유여열반이라 하고, 육체마저 소멸해 버린 것을 무여열반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부파불교 시대에 성립된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열반을 둘로 구분한 것은 붓다의 죽음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불교에는 무여열반이라는 관념이 없었다. 붓다의 제자들도 열반은 당연히 현세(現世)에서 증득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후에 열반을 증득한다는 개념은 후대에 성립된 것이 분명하다. 붓다는 초기경전에서 한결같이 현법열반을 강조했다. 두 가지 열반으로 구분한 것은 부파불교 시대에 상캬Sāṁkhya 철학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샹캬송(Sāṁkhyakārikā, 數論頌)』 제67송과 제68송은 불교에서 말하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샹캬송』 제67송에 의하면 신체를 지니고 살아가면서도 지혜의 증득에 의해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후대의 불교가 말하는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는 열반’, 즉 유여의열반에 해당된다. 나중에 불교도들은 붓다의 죽음을 무여의열반이라고 이해하고, 그 이전의 붓다가 도달한 경지를 유여의열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구분은 해탈을 추구하는 일반 수행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와 같이 『잡아함경』과 『숫따니빠따』에 나타난 열반의 개념이 『증일아함경』과 『이띠붓따까』에서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중에는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sopadhiśeṣanirvāṇa)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nirupadhiśeṣanirvāṇa)이라는 술어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본사경本事經』에 “열반의 경지는 요약하면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하나는 유여의열반의 경지이고, 다른 하나는 무여의열반의 경지이다[T17, p.677b, 其涅槃界略二種. 云何爲二? 一者有餘依涅槃界, 二者無餘依涅槃界].” 현장玄奘은 이 『본사경』에서 두 가지 열반을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으로 번역했다. 

 

   필자는 한역의 ‘열반계涅槃界’와 빨리어 ‘닙바나다뚜nibbānadhātu’를 ‘열반의 경지’로 번역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열반의 세계’라고 번역하면, ‘열반의 세계’라는 것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삼장법수』에서는 ‘이열반二涅槃’이라는 표제어로 두 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하나는 『금광명경현의』에 근거한 두 가지 열반이고, 다른 하나는 『대지도론』에 근거한 두 가지 열반이다. 『금광명경현의』에서는 성정열반性淨涅槃과 방편정열반方便淨涅槃으로 구분하고 있다. 『대지도론』에서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으로 구분한다. 첫째, 유여열반이란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의 번뇌를 끊고, 현재 색신色身을 받은 것이 아직 남아 있고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여열반이라 한다. 둘째, 무여열반이란 견혹과 사혹은 물론 오온五蘊의 몸을 받은 것이 모두 소멸해 다하여 남은 것이 없는 것을 무여열반이라 한다.(『삼장법수』, pp.133-134) 『대지도론』에서는 육체의 유무로 열반을 구분하고 있다.

 

   한편 초기불교에서는 ‘네 가지 왜곡된 견해[四顚倒見]’로 단정하는 상常・낙樂・아我・정淨을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의 사덕四德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사덕을 갖추지 않은 열반을 유위열반有爲涅槃이라고 낮추어 보고, 반대로 사덕을 갖춘 열반을 무위열반無爲涅槃이라고 치켜세운다. 또한 대승불교는 종파에 따라 열반에 대한 해석도 완전히 다르다. 이를테면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 등을 토대로 성립된 중국의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열반을 자성청정열반自性淸淨涅槃,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의 사종열반四種涅槃으로 구분한다. 그 중에서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은 앞에서 살펴본 것과 동일하지만, 자성청정열반과 무주처열반을 추가한 것은 순전히 대승불교적 시각이다.

 

 



이경미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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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에서 학사와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샤카무니 붓다』, 『잡아함경 강의』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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