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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유교 문화의 중심지 봉황이 내려앉아 천년 세월 지켜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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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1 년 10 월 [통권 제102호]  /     /  작성일21-10-05 11:36  /   조회3,71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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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12 / 안동 천등산 봉정사

 

 

봉정사鳳停寺는 경북 안동군 서후면 태장리에 있는 천등산天燈山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 경북 북부지역은 순흥의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1243-1306), 선산의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영주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 예안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퇴계退溪 이황李滉(1505-1570) 등을 중심으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유학의 꽃이 만개한 곳이자 유학자들의 지식 공동체인 사림士林의 중심적인 지역이어서 태백산의 줄기가 흘러내린 산수 풍광이 수려한 가운데 서원書院과 학당學堂, 누정樓亭과 종택宗宅, 고택古宅 등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의 유산이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사진 1. 봉정사 전경.

 

 

이러한 지역에 천년 세월이 지난 봉정사가 인근에 있는 구미의 도리사桃李寺, 영주의 부석사浮石寺, 문경의 봉암사鳳巖寺 등과 함께 불교의 상징적 사찰로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새 왕조의 창건 이념과 정치 철학으로 삼아 고려시대 때 많은 폐단을 초래하였던 불교를 억제하였기 때문에 도시에 있는 사찰은 대부분 폐사되거나 그 자리에 서원이나 서당 등이 대신 들어서게 되었고, 그 와중에 산중에 있는 사찰이 그나마 멸실되는 것을 피하여 불교의 도량으로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봉정사는 종래 682년 신라 신문왕神文王(681-692) 2년에 의상義湘(625-702)대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 왔으나, 1972년 극락전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인 문무왕文武王(661-681) 12년 즉 672년에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능인能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산은 원래 대망산大望山이었는데, 능인대사가 어릴 때 깜깜한 바위굴 속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한 선녀가 나타나 옥황상제가 내려준 등불을 가지고 불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고 하여 ‘천등天燈’이라는 뜻을 산 이름에 붙여 천등산이라고 불렀다고 하고, 바위굴에서 수행하던 대사가 어느 날 도력으로 만들어 날린 봉황새가 내려앉은 곳에 절을 짓게 되어 ‘봉황새가 머문 절’이라는 의미로 봉정사라고 명명했다는 설화가 전해 온다. 하늘에서 등불이 내려올 리도 없고 봉황이라는 새는 존재하지도 않는 새이므로 이는 신비로운 이야기로 잘 만들어진 설화일 뿐이리라. 설화라는 것은 전달되면서 필요에 따라 계속 각색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로 남는다. 봉정사를 창건한 후 능인대사는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사진 1)

 

 

사진 2. 봉정사 일주문.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후대에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 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때는 북한 공산군이 이 절을 탈취하여 패악질을 하다가 급기야 절에 있던 경전들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버려 이제는 봉정사의 역사조차 알기 어렵게 되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 선생의 제자인 용만龍巒 권기權紀(1546-1624) 선생이 저술하여 1608년에 간행한 안동의 읍지 「영가지永嘉志」에는 “안동부의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는 천등산 아래에 신라시대에 이름난 봉정사가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1566년에 퇴계 선생이 절의 동쪽에 있는 낙수대落水臺를 읊은 시가 남아 있어 조선시대에서도 고찰로 존속되어온 사실을 알 수 있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조선시대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였고, 500여 결結의 논밭도 지녔으며, 당우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임이 확인되었다.

 

 

사진 3. 만세루.

 

 

봉정사 인근 산에서는 질 좋은 잣이 많이 나 매년 진상進上하거나 나라의 제사를 담당한 관청인 봉상시奉常寺에 올려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관에서는 많이 채취하려 했고 절에서는 널리 푯말을 세워 자기 구역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여 급기야 승려들이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며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명종 임금에게 보고가 되었다. 그 결과 절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는 들어가지 말되 잣은 전과 같이 채취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1559년에 있었던 일이다.

 

 

사진 4. 김가진 선생이 쓴 천등산 봉정사 현액.

 

 

그런데 유생들과 절과의 관계는 그렇게 원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 향교 유생의 강습회인 도회都會의 유생들이 절에 오면 식사를 제공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봉정사는 ‘내원당內願堂은 잡역에서 면제되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유생들은 ‘왜 하지 않느냐?’ 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어 급기야 봉정사와 광흥사廣興寺의 두 승려가 유생 장흡蔣洽 등을 폭행하여 상해를 입힌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에서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되 유생들이 절에 갔을 때 음식을 준비하게 하는 것은 잡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를 하지 말도록 했다. 1565년 명종 20년 때 일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일이 있은 그 다음해인 1566년에 퇴계 선생은 당시 사촌동생이 독서를 하며 묵고 있는 봉정사에 들렀는데, 봉정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층층의 기암으로 된 낙수대落水臺에 들러 아래의 시 두 수를 지었다. 낙수대는 명옥대鳴玉臺로 이름을 바꾸었다.

 

此地經遊五十年  이곳에서 놀던 때가 어언 오십년

韶顔春醉百花前  젊은 시절은 흐드러진 꽃 맞으며 봄에 취했지

只今攜手人何處  손잡고 놀던 사람들 지금은 어디 갔느뇨

依舊蒼巖白水懸  변함없는 푸른 바위에 흰 폭포수만 걸렸네

 

萬古雲門第一奇  오랜 세월 봉정사에 최고로 빼어나니

飛泉嗚咽似含悲  떨어지는 물소리는 오열하며 슬픔 안은 듯 

退翁去後空鳴玉  퇴계가 떠난 뒤엔 명옥대만 남았으니 

再遇知音問幾時  어느 때에 지음을 다시 만날 수 있나  

 

문집이나 각종 문헌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유생들이 절에 와서 묵으며 독서하고 공부한 경우도 많았고, 시를 지은 적도 있었지만, 유가의 사람들이 때로는 절에서 문중 모임도 하고 술도 마시며 즐긴 일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절정을 구가하던 시절 김문의 대표 주자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선생의 문집 「농암집 農巖集」의 중간본을 간행한 목판을 봉정사에 보관케 했고, 사도세자의 스승이자 남인의 영수였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문집을 찍은 책판도 여기에 보관케 하였다. 

 


 사진 5-1. 만세루에 걸려 있는 만세루 현판. 

 

 

봉정사가 있는 방향으로 들어가면 2018년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절로 들어가는 길 주변에는 멋있는 갤러리, 레스토랑, 커피숍들이 있고, 넓은 주차장이 있는 곳에서 내려 절 입구에 들어서면 숲속으로 오르막길이 나 있다. 소나무들이 뿜어내는 향을 즐기며 상쾌한 길을 오르다 보면 다소 평평한 곳에 이르러 일주문一柱門을 만난다.(사진 2) 양쪽으로 기둥이 하나씩 받치고 있는 문에는 ‘천등산봉정사天燈山鳳停寺’라고를 쓴 현액이 걸려 있다. 현액은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1909-2001) 선생이 썼다. 은초 선생은 추사체를 구사한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1869-1943) 선생의 문하에서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1908-1991) 선생과 같이 서예를 배워 경남지역에서 서예가로 활동하였다. 여기서 다시 수목이 우거진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면, 오른쪽으로는 대웅전大雄殿과 극락전極樂殿, 영산암靈山庵으로 가는 길과 왼쪽으로는 지조암知照菴과 근래 지은 설법전說法殿 등 건물이 있는 방향으로 나뉜다. 원래의 봉정사가 있는 구역으로 방향을 잡아 오른쪽 길로 걸어 올라가면 왼쪽 높은 곳에 훤칠한 만세루萬歲樓가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같이 날아 갈듯이 서 있다(사진 3). 

 

 

사진 5-2. 감가진 선생이 쓴 덕휘루 현판.

 

 

여러 개의 돌계단을 밟아 올라가면 만세루와 마주하게 되는데, 이 누각을 지나면 바로 붓다가 있는 극락정토인 대웅전의 공간으로 들어서게 되므로, 이는 부석사의 안양루와 같이 극락정토로 들어가는 문의 역할도 한다. 어쩌면 그 옛날에 돌계단이 시작되는 저 아래쪽 어디쯤에 천왕문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 숙종 때인 1680년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만세루는 법회를 하거나 스님이 강론을 하던 곳이다. 만세루에는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1846-1922) 선생이 쓴 ‘천등산봉정사天燈山鳳停寺’라고 쓴 현판이 높이 걸려 있다(사진 4). 조선시대 안동 김씨들이 60년간 권력을 쥐고 흔든 이른바 안동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시절(1804-1862)에 동농 선생 역시 서울에서 태어나 개항기에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고 1891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의 부사府使로 내려와 지방관으로 지냈다. 동농 선생은 집안 세력을 바탕으로 일본 동경에서 외교관 생활도 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쳤지만, 외세에 밀려 점점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보면서 독립협회의 창설을 주도하기도 하고, 일진회一進會 등 친일세력들을 규탄하기도 하는 등 우국충정에 몸부림을 치다가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이후에는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사진 6. 봉정사 대웅전.

 

 

만세루 안에는 ‘만세루萬歲樓’와 ‘덕휘루德輝樓’라고 쓴 2개의 현액이 결려 있다. 만세루의 현액은 석능石能 김두한金斗漢이 쓴 것인데, ‘화엄강당華嚴講堂’과 ‘무량해회無量海會’의 편액도 그가 썼다. 덕휘루는 계축년(1913) 여름에 김가진 선생이 썼다.(사진 5-1, 5-2) 만세루는 다른 사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불교적인 이름이지만, 덕휘루는 불교적인 이름이 아니다. 불교 사찰에서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이름의 현액이 붙은 것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이 덕휘루도 그러한 경우이다. 여기서의  ‘덕휘’라는 말은 덕이 빛난다는 의미인데, 중국 전한前漢 시대 가의賈誼(B.C. 200-168)는 굴원屈原( B.C. 340-278)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조굴원부弔屈原賦」 가운데 “봉황새가 천 길 높이 날개를 치니 덕이 빛나는 곳을 보면 내리고, 덕이 없고 험한 징조를 보면 날개를 치며 멀리 날아가 버리는구나[鳳凰翔于千兮 覽德輝而下之 見細德之險微兮 遙增擊而去之].”라고 읊은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천하가 태평하면 봉황새가 날아온다는 전설이 전해오기에 봉황새가 날아오기를 염원하는 것은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비극적인 상황에서 다시 봉황이 내려와 나라를 되찾고 태평해지기를 염원하면서 이렇게 이름 지어 걸었는지도 모른다.

 

 

사진 7. 대웅전의 마루와 난간.

 

 

 

동농 선생도 망한 왕조의 권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지만, 젊은 시절부터 망해 가는 왕조의 개혁을 요구하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상소했다가 감옥살이를 하고, 국체보상운동을 주도하며 동분서주하다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북만주, 서간도 등지에서 해외 독립운동을 전개한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 선생은 박학독행博學篤行하는 지사의 삶을 이국에서 마쳤다. 나라가 망하자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1842-1910) 선생을 위시한 17인의 영남 지사들은 자진 순국하였고,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1845-1914) 선생,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李象羲, 1858-1932)과 이봉희李鳳羲(1868-1937) 선생 형제들,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1878-1937) 선생 등과 같은 대유학자를 위시하여 수만 명의 경북 사람들은 가산을 처분하고 허허벌판 황무지 만주로 망명하여 구국투쟁에 들어갔다. 이 당시에 있었던 일이다. 대계 선생의 제자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 선생은 스승의 뜻을 이어 평생 독립운동의 전선에 나섰다. 해방 후 인재의 결핍을 겪었을 만큼 우리는 이렇게 조선의 뛰어난 인재들을 독립전선에서 많이 잃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 살다간 위대한 선조들의 삶은 이렇게 비장하고 고결했다! 동농 선생의 현판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있는 중에 처절했던 역사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사진 8. 극락전과 삼층석탑.

 

 

사진 9. 극락전 바닥의 와전.

 

 

해묵은 기둥이 누각을 받치고 있는 만세루 아래를 지나 작은 돌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대웅전의 앞마당에 발을 내딛게 된다. 좌측에는 화엄강당이 있고, 우측에는 무량해회라는 현액이 걸린 건물과 이 건물에 연이어 세워진 공덕당功德堂이 늠름하게 서 있다. 대웅전은 1435년 세종 17년에 중창한 기록으로 볼 때, 조선 초기에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인 단층으로 지은 건물이다.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하고 좌우에 어려서 아라한과를 얻었다는 두타제일頭陀第一 가섭迦葉존자와 싯다르타의 사촌동생인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阿難(Ananda)존자의 상을 모시고 있다. 소박하고 고졸하다(사진 6). 이 대웅전에는 다른 법당에서는 보기 어려운 마루와 난간이 바깥에 설치되어 있다.(사진 7) 이런 마루는 영산암의 응진전(應眞殿)에서도 볼 수 있다. 마루와 난간이 설치된 것은 사대부 집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에 불교가 유교적 생활 양식과 타협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산암의 당우들에도 조선시대 민간의 목조 기와집에서 볼 수 있는 마루들이 모두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거주하는 집들이 좁고 복잡하여 선비들이 절에서 독서도 하고 공부도 하였으므로 일상의 집처럼 편리하게 바꾸는 과정에서 이런 마루와 난간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고 보인다. 지금은 모두 새로 들어선 건물들이 있지만, 안동 용두산龍頭山에 있는 용수사龍壽寺도 농암 이현보 선생이나 퇴계 선생의 형제들과 그 집안 자제들, 그리고 인근 선비들이 와서 공부하며 지내던 곳이다. 

 

 

사진 10. 극락전 중정의 삼층석탑.

 

 

조선 중기에 세운 화엄강당은 그 구조가 아름답기 그지없는데, 장대석長臺石 댓돌 위에 두꺼운 널판을 쪽마루처럼 깔았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을 설치했다. 공간의 구분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공간은 능인대사가 봉정사를 창건할 때 지은 당우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승려들은 경을 논하고 고승 대덕들이 설법을 하기도 했다.

 

화엄강당을 사이에 두고 한쪽 공간에 대웅전이 있다면 다른 쪽 공간에는 그 유명한 극락전이 있다. 원래는 대장전大藏殿이었는데, 극락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봉정사에 그 많았던 대장경이 여기에 보관되었던 것 같다. 극락전은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120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인 문화유산이다. 고려시대 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이어받아 지은 건물이다. 배흘림기둥으로 된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시옷자(ㅅ) 모양의 맞배지붕과 처마를 앞으로 나오도록  받침 역할을 하는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만 놓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을 갖춘 단층으로 지어졌다. 중앙에는 판문板門을 달고 양쪽에는 살창을 내었다. 그 전에는 사분합의 나무판문들이 달려 있었는데, 1972년 고증에 따라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어떤 치장이나 화려한 장식도 전혀 없는 고졸하고 담백한 모습이다(사진 8). 이 모습이 실로 아름답다. 붓다가 인간에게 제시한 진리도 이렇게 간단하고 담백하며 명징한 것이리라. 극락전의 내부에는 중앙에서 뒤쪽으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벽을 만든 다음 그 안에 불단을 만들고 불상을 안치하였다. 바닥에는 흙으로 구운 검은 와전들이 깔려 있다.(사진 9). 

 

 

사진 11. 대웅전의 후불벽화.

 

 

높은 돌 기단 위에 세워진 극락전에서 계단을 밟고 내려오면 앞마당의 가운데에 높이 3.18m인 삼층석탑이 서 있다. 고려 중기의 석탑 양식을 지닌 것으로 극락전을 조성할 때 같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10). 우리나라 탑의 양식 변화를 보면, 삼국시대 목조탑으로 시작되어 7세기경부터 석탑으로 바뀌는데, 삼층석탑은 원래 통일신라시대 감은사지感恩寺址의 삼층석탑에서 시작되어 불국사佛國寺의 삼층석탑, 즉 석가탑釋迦塔에서 양식상 미적인 완성 단계에 이른다. 그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찰의 탑은 이를 기본 양식으로 하여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면서 3층, 5층, 9층 석탑으로 세워졌다.

 

사진 12. 서랍 속에 보관된 대웅전 벽화 일부.

 

 

사진 12-1. 흙벽 벽화 조각 보관 상태.

 

 

극락전의 중정을 사이에 두고 화엄강당과 마주보고 서 있는 맞배지붕의 고금당古金堂은 스님들이 참선 수행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액의 글씨가 고졸하고 소박하다. 화엄강당과 고금당은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같은 시기에 같은 목수가 지은 것이 아닌가 할 만큼 양식에서나 격조에서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극락전에서 앞으로 내다보면 전망이 확 트여 있어 저 멀리 있는 산들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숨었다 한다. 인간의 마음이 늘 변하고 욕심이 하루에도 몇 번씩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는데, 붓다의 가르침도 그에 따라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리라. 아무튼 극락전에서 앞으로 바라보면 산하가 호호탕탕浩浩蕩蕩하게 펼쳐져 있다. 그런데 원래는 앞마당을 가운데 두고 우화루雨花樓가 고금당과 지붕을 연하여 극락전 맞은편에 서 있었다고 한다. 우화루는 현재 영산암으로 옮겨져 응진전으로 들어가는 문루 역할을 하고 있는데, 원래는 극락전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루로 세워졌던 것이다.

 

 

사진 13. 봉정사 경판 보관 상태.

 

 

봉정사에는 주요한 유물들이 있다. 계곡을 메워 습기로 둘러싸인 성보박물관에는 대웅전의 흙벽에서 떼어낸 여러 점의 벽화조각들과 후불벽화가 있다. 후불벽화는 높이 307센티 너비 351센티의 크기에 그려진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벽화이다.(사진 11). 이런 소중한 유물을 급조한 유리방 안에 놔 두거나 임시로 만든 서랍이나 거치대 위에 그냥 방치하고 있고(사진 12, 12-1), 경판고(經板庫)에 있었던 대장경 경판도 철제 책장에 모아 놓고 있는 형편이다.(사진 13)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사찰에서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형편이 이러하다. 도대체 20여 년 동안 이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데,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여기에 다녀갔다고 떠벌리고 관광버스나 많이 오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은 아직 수준 이하이다. 창피스럽다.

 

 

사진 14. 영산암 오르는 돌계단.

 

 

봉정사에는 부속 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이 있다. 영산암은 대웅전과 극락전이 있는 본당에서 계곡을 지나 올라가는 자리에 있다. 지금은 그 계곡을 메워 본당에서 바로 걸어갈 수 있게 만들어 놓았으나 그 대신 풍광과 사찰의 격조를 망쳐 버렸다. 그나마 영산암으로 오르는 계단과 좌우로 높이 서 있는 수목들이 진리의 공간으로 인도하는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사진 14)

 

 

사진 15. 최고의 품격을 지닌 영산암 중정.

 

 

19세기 말 건물로 보이는 영산암에는 석가모니불과 나한羅漢들을 모신 응진전應眞殿과 함께 부속 건물들이 있는데, 이 영산암으로 들어가는 문루는 옛 극락전 앞에 있었던 우화루를 이건한 것이다. 우화루의 문을 지나 작은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격조에서는 이와 비교할 바가 없는 천하제일의 중정中庭이 나온다. 마당을 가운데 놓고 맞은편에 응진전이 있고 왼쪽으로 송암당松岩堂이 우화루와 연결되어 있고, 송암당 앞 바위 사이로 솟아난 늘 푸른 소나무는 홀로 지조를 지키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관심당觀心堂이 우화루와 붙어 있다.

 

사진 16. 우화루의 마루. 

 

 

사진 17. 우화루 현액.

 

 

응진전 마루에서 내려와 계단으로 내려오면 조그만 석등 하나가 서 있다. 영산암의 안뜰은 작지도 크지도 않으면서 전체 건물들의 크기와도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화루를 이곳으로 이건한 바람에 중정이 우화루, 관심당, 응진전, 송암당의 건물로 미음자(ㅁ) 모양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되어 아늑하고 고요하다. 흙과 나무와 돌과 건축물과 풀들이 작은 공간에서 화엄세계를 이루고 있다.(사진 15). 이 겸허하고 경건한 뜰에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사방의 어느 마루에 앉아 보아도 내 마음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고, 소나무와 백일홍의 그림자가 흙마당에 엷게 깔리는 밤에 우화루 마루에 앉으면 그야말로 정좌靜坐의 고요 속에서 자신을 보게 된다.(사진 16) 우화루의 우화라는 말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를 말하는 데, 붓다의 가피가 꽃비 내리듯이 내린다는 의미이다.(사진 17) 최고의 격조를 갖춘 아름다움 그 자체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하고 붓다의 제자 가운데 바른 앎을 증득하여 번뇌를 완전히 벗어난 소승小乘의 최고 상태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16인의 아라한阿羅漢(arhat, arahant), 즉 나한들을 봉안한 공간이다. 뛰어난 성인(saint)을 모신 집이다. 나한전 중에는 16아라한을 모시는 응진전이 있고, 500인의 아라한을 모시는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이 있는데, 영산암의 응진전에는 16아라한을 모시고 있다.(사진 18) 지금은 사라진 안동의 오백사五百寺는 바로 500나한들을 모신 절이었다.

 

 

사진 18. 영산암 응진전.

 

 

아라한이란 용어는 불교 이전에는 브라만교에서 훌륭한 출가 수행자를 지칭하였고, 존경받는 고위 관리에 대한 존칭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불교에서 깨달은 성인도 이처럼 존경을 받는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라고 하여 그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보리살타菩提薩埵( Bodhisattva), 즉 보살菩薩이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깨달은 성인을 말한다면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는 이를 아라한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대웅大雄(mahāvīra)인 붓다에 대해서도 보리살타라고 부르거나 아라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중에 붓다의 많은 제자들도 이러한 경지에 오르면서 붓다에 대해서는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그 제자들에 대해 사용하는 것으로 되었다. 나한전은  붓다의 제자들을 봉안하기 때문에 주불을 모시는 법당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내부도 장엄하거나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고 건물도 조촐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에서는 이 오백나한은 중생에게 복덕을 주고 소원을 성취하게 해주는 특별한 공력이 있다고 하여 오백나한에 대한 숭배가 성행하여 사찰에 따로 나한전을 짓는 일이 생겼다. 유럽의 카톨릭 성당 건물에서 볼 수 있듯이, 지붕이나 벽에 성자들의 상을 세우는 것과 유사하고, 수호성인을 정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성인들이 복덕을 비는 대상으로 되면 그 본래의 의미는 변질되기 마련이다. 응진전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여기서 기도하고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아라한과 같이 무명無明에서 깨어나 밝은 진리를 체득하는 상태에 도달하도록 분발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데 있으리라.   

 

 

사진 19. 지조암.


 

지조암은 오늘날 스님들이 참선 수행하는 선원이다. 이곳은 대웅전이 있는 공간과는 따로 떨어져 있어 산 속으로 더 들어가야 한다. 지조암에는 천등선원, 관음전, 칠성전, 승방과 부속 건물이 있다.(사진 19) 결재가 끝난 기간이라 봉정사에서 수행하고 싶은 스님들의 발걸음이 잦은 계절이다. 이 시대 불교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는 수행승들에 달려 있는 만큼 이런 수행 공간이야말로 불교의 생명이 아닌가 한다. 

한때 찬란했던 대가람에 조그만 부도 세 개만이 남아 있다. 전란 중에 없어졌거나 유가들이 없애 버렸거나 아니면 다른 용처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부도들은 내 마음에 있기에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보일 것이다. 영산암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붓다가 걸어간 길만큼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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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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