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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청암사와 인현왕후에 얽힌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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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3 년 5 월 [통권 제121호]  /     /  작성일23-05-05 12:52  /   조회1,344회  /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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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31 |청암사·수도암③

 

대웅전이 있는 공간에서 나와 계곡을 건너 조금 떨어진 언덕 위로 가면 극락전極樂殿과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현재 있는 극락전의 건물은 1905년 대운화상이 최송설당의 시주로 지은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 불교 사찰의 건물이라기보다 유가의 건물과 같다. ㄱ자 모양을 한 것으로 난간을 설치한 사랑방은 누樓의 형식을 하고 앞으로 내어 지었다. 모든 방실이 바깥에는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다(사진 1). 

 

세도가문 출신의 인현왕후

 

요즘 청암사는 비구니 스님의 수행도량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에게 숙종肅宗(1674~1720)의 두 번째 부인인 인현왕후仁顯王后(1667~1701)와의 연관을 내세우는 것 같다. 인현왕후는 조선시대 세도가문인 여흥 민씨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가 노론의 권세가인 민유중閔維重(1630~1687)이고, 그의 어머니는 노론의 대표주자로 천하의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던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 선생의 딸이다. 서인과 남인 간의 권력투쟁에서 맹활약을 한 민정중閔鼎重(1628~1692)은 인현황후의 작은아버지이다.

 

사진 1. 청암사 극락전.

 

인현왕후는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여 숙종이 궁녀 출신인 장소의張昭儀(1659~1701)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윤李昀, 후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당시 집권세력이던 송시열宋時烈(1607~1689) 등 노론세력들이 자신들의 권력 상실을 우려하여 반대 상소를 하며 임금과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이에 숙종은 이들 세력을 내쫓거나 독약을 내려 죽이고 대신 권대운, 김덕원金德遠(1634~1704) 등 남인들을 등용하였다. 장소의를 희빈禧嬪으로 지위를 격상시키고 인현왕후를 왕비에서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왕실에서 쫓아내 버렸다.

 

오랫동안 천하의 권신으로 무대의 주인공과 흑막을 드나들며 국가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송시열 선생도 이때 제주도로 유배되어 이듬해 서울로 붙잡혀오던 중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오랜 세월 동안 송시열과 그의 막강한 붕당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던 수많은 원혼冤魂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법가사상을 완성한 한비韓非(B.C. 280~B.C. 233)는 일찍이 그의 법치국가론 『한비자韓非子』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지금 주위에서 칭송을 받는 자라고 하여 좋은 자리에 승진시키게 되면 신하들은 군주를 떠나 이익이 맞는 자들끼리 붕당을 만들 것이고, 만약 당파에 따라 관직을 주게 되면 백성은 그런 자들에게 줄을 대려고 하지 국법에 따라 관직에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今若以譽進能, 則臣離上而下比周; 若以黨擧官, 則民務交而不求用於法]. 군주를 무시하고 외부세력과 협잡하여 자신들의 패거리를 승진시키게 되면 이는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무시하는 화근이 된다. 

 

사진 2. 청암사 보광전.

 

외부세력과의 결탁과 패거리들이 많아져 안팎으로 붕당을 지으면 비록 그들의 잘못이 많아도 모두 은폐되고 만다. 그러면 충신은 죄가 없음에도 위태롭거나 죽임을 당하고, 간사하고 사악한 신하는 공이 없음에도 편안히 온갖 이익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좋은 신하들은 숨어버릴 것이고 간신들이 득세할 것이니, 이것이 나라가 망하는 근본 이유이다[忘主外交, 以進其與, 則其下所以爲上者薄矣. 交衆與多, 外內朋黨, 雖有大過, 其蔽多矣. 故忠臣危死於非罪, 姦邪之臣安利於無功. 忠臣危死而不以其罪, 則良臣伏矣; 姦邪之臣安利不以功, 則姦臣進矣, 此亡之本也].”

 

고금을 막론하고 배운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권력을 쥐고 휘두를 때는 인생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국가와 국민들의 불행이자 자신의 비극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한비자韓非子』에는 이런 명쾌한 논리들이 많은데, 왜 이런 국가론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고 주자의 형이상학적 논변들만 앞세우며 뒤로는 국가를 농단하는 권력놀음을 했는지 되짚어볼 일이다. 아무튼 잠시 살다가 가는 것이 인생인데, 인간들은 그런 짓을 지금도 멈추지 않는 것 같다. 붓다의 가르침은 차치하고서도 아득한 우주공간에서 찍은 사진 한 장만 보아도 지구는 먼지보다 하찮고 그 속에 있는 인간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청암사에서 3년 기거한 인현왕후

 

아무튼 이런 서인과 남인들의 권력투쟁 속에서 인현왕후는 궁에서 쫓겨났을 때 이곳 청암사로 내려와 3년 동안 기거하였다. 숙종이 드디어 장희빈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박세당 선생의 아들인 박태보朴泰輔(1654~1689) 선생 등 서인들이 대거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변을 겪기도 했다. 시간이 흐른 후 숙종이 폐비의 일에 대해 후회하는 기미를 보이자, 이때를 놓치지 않고 1694년에 노론의 핵심인 김춘택金春澤(1670~1717) 등이 드디어 폐비의 복위운동을 추진하고 이에 저항하는 남인세력을 모조리 잡아 없애는 갑술옥사甲戌獄事를 일으켰다. 김춘택은 종조부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1692) 선생이고, 할아버지가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金萬基(1633~1687)이고, 아버지는 호조판서를 지낸 김진구金鎭龜(1651~1704)이다.

 

사진 3. 아름다운 수도암의 도량.

 

갑술옥사 이후 서인인 남구만南九萬(1629~1711) 선생, 박세채朴世采(1631~1695) 선생 등 소론세력이 등용되면서 인현왕후는 왕후로 복귀하게 되었다. 궁으로 돌아간 이듬해인 1695년에 인현왕후는 그 동안 자기에게 덕을 베풀어 준 청암사의 스님들에게 감사의 글과 함께 비녀, 잔, 가죽신 등을 신표信標로 전하고 자신이 지내던 곳을 ‘함원전含元殿’으로 현판을 달아 오래도록 복을 비는 곳으로 해줄 것을 소원하였는데, 이때부터 청암사는 왕실과 밀접한 인연을 맺게 되어 번창하게 되었다. 인현왕후는 1701년 35세에 병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사진 4. 수도암 관음전.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도 왕실에서는 불교를 믿었고, 특히 왕실의 여성들은 유학보다는 불교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왕실불교王室佛敎’라는 말도 생겼다. 물론 이 왕실불교가 불경을 연구하며 불법의 진정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진심으로 중생을 널리 구제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시주를 하고 왕실의 안녕과 복을 비는 것이었다. 아무튼 인현왕후와의 인연으로 불령산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었고, 조선시대 말기까지 상궁들이 내려와 불공을 드리고 시주하기도 했다.

 

이처럼 피를 뿌리며 서로 죽이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현왕후가 청암사에 내려와 있다가 궁으로 올라갔는데, 불교를 공부하는 승가대학이 있는 청암사에서 인현황후를 부각시키고 있는 모습이 다소 의아스럽다. 더구나 인현왕후의 외할아버지 송준길 선생은 권력을 쥐고 있을 때 불교의 뿌리를 뽑으려고 왕실 원찰인 서울 봉은사에 봉안되어 있던 선왕들의 위패를 철거해 버렸다. 현종顯宗(1659~1674)이 즉위하자 전국의 원찰을 모두 없애 버렸다. 한양 도성 내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완전히 해체해 버리고 그 해체한 목재들을 봉은사로 보내는 것조차 못하게 막았던 인물이 바로 그이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한다고 치고,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인현왕후가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 5. 관음전 앞마당에서 보이는 대적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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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청암사는 정조正祖(1776~1800) 3년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대부분의 당우들이 소실되었고, 인현왕후가 원당으로 지은 원래의 보광전도 이때 화마 속으로 사라졌다. 왕후의 청으로 ‘함원전’이라는 현판을 건 건물도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지금의 보광전 건물은 1905년에 새로 지은 것이고, 1908년 융희 2년 10월에 쓴 현판이 걸려 있다(사진 2).

 

요즘은 보광전 옆에 있는 백화당白華堂 건물의 끝 방에 ‘함원전’이라는 목판을 걸어놓고 그 안에는 인현왕후가 지은 감사의 글을 전시해 놓고 있다. 인현왕후를 착하고 가련한 인물로 묘사하고 장희빈을 천하의 악녀로 낙인을 찍은 것은 서인세력의 붓끝에서 나온 것이리라. 하기야 조선시대 왕조실록조차도 사화와 당쟁 속에서 어느 세력이 집권했을 때 쓴 것이냐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다르게 되어 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도선국사의 창건설화가 전해지는 수도암

 

청암사에서 나와 ‘평촌2길’을 따라 성주 쪽으로 가다가 ‘수도길’로 접어들어 산 속으로 올라가면 수도산 정상을 지척에 두고 수도암이 있다. 청암사에 속한 암자인 수도암은 멀리 가야산을 바라보고 있는 수도산에 이렇게 들어앉아 있다.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깊은 산골에 자리 잡고 있고 수도승들이 수도하는 곳이라 그런지 고즈넉하면서 구법 정진하는 사찰의 기운을 잘 간직하고 있다.

 

사진 6. 대적광전으로 오르는 석계.

 

859년(헌안왕 3)에 도선국사는 청암사를 창건한 뒤에 수도처로 이 터를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7일 동안 춤을 추었다는 전설과 함께 그가 이곳에 수도암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이 절은 수도승들의 참선도량으로 그 이름을 떨쳤으나 6·25전쟁 때 전소되었고, 최근에 크게 중창하였다. 가을 단풍이 온 산을 붉게 태우고 있는 시간에 펼쳐지는 수도암의 풍광은 말로 표현하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란다. 와서 보는 수밖에 없다. 온 산 가득한 단풍 속에 일순간 깨쳐 끝내 버리는 곳이다. 만산홍엽각료처滿山紅葉覺了處!(사진 3).

 

사진 7. 대적광전의 비로자나 좌불.

 

옛날에는 지금보다 더 자그마한 수도처였지만 지금은 사역을 넓히고 찾아오는 신도들이 묵을 공간도 만드는 바람에 커져 버렸다. 높은 계단을 올라 사역으로 들어간다. 앞에 「수도암修道庵」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봉황루鳳凰樓를 지나면 관음전觀音殿의 앞마당으로 들어선다(사진 4). 인적이 없는 텅 빈 마당이 사람으로 하여금 한참이나 서 있게 만든다. 주위에 당우들이 있는데도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인다. 마당을 싹 쓸어놓아서 그런지 아니면 높은 계단으로 올라가야 비로소 시선을 끄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약광전藥光殿과 같은 전각들이 보이지 않아 그런지 모르겠다. 어쩌면 마음에 때가 낀 중생이 수도도량이라는 것에 아예 주눅이 들어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사진 5).

 

높이 쌓아 놓은 축대로 난 돌계단을 밟아 올라가면 대적광전을 마주하게 된다(사진 6). 대적광전에는 석조로 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좌가 1미터가 넘고 불상이 2미터가 넘는 큰 불상이다. 얼굴은 네모난 모습이고, 몸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는 않다. 경주 불국사 석굴암의 석가모니불보다 80㎝ 정도 작은데, 9세기 통일신라시대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 머리에는 육계가 있고 원래 금속으로 만든 보관寶冠을 쓰고 있은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보관을 쓴 비로자나불상으로는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일 수 있다(사진 7). 원래 싯다르타가 살던 시절에는 출가자는 모두 삭발을 하였는데 나중에 불상을 조성하는 시기에 와서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아 불상에 이런 육계 등도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와서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고려시대에 와서도 화엄종과 선종에서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였다.

 

사진 8. 약광전 앞의 석등과 석탑.

 

원래 중국의 초기 선종사찰에는 조사祖師가 곧 깨달음을 얻은 붓다이기 때문에 불상을 모시는 불전佛殿(=대웅전大雄殿)을 두지 않고 조사들이 법을 설하는 강당講堂 즉 법당法堂만 두었다. 참선은 승당僧堂 즉 선당禪堂에서 하였는데, 이곳은 용맹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탄생하는 공간이기에 선불장選佛場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던 것이 남송시대에 와서 선종사찰이 ‘칠당가람七堂伽藍’의 구조로 정착하면서 산문山門, 화장실인 동사東司, 욕실, 불전, 승당, 주방인 고원庫院을 배치하고 가장 중요한 법당을 불전 뒤 높은 곳에 두었다. 당시 교종이나 선종이나 모두 불전과 법당을 두었지만 선종에서는 법당을 가장 중요시했고, 교종에서는 불전이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

 

대적광전에서 배례하고 나와 보니 같은 공간에 약광전이 나란히 서 있다. 약광전은 약사여래상을 봉안해 놓는 약사전藥師殿을 말한다(사진 8).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석조상이 봉안되어 있다. 손의 모습을 놓고 약사여래상이 아니라 보살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논란도 있다.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이라는 말도 있으나 믿기 어렵다. 원래의 약사여래상이 사라지고 지금의 석조상을 가져다 놓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연구자들 간에는 신라시대의 것인지 고려시대의 것인지를 놓고도 논의가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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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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