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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및 특별기고]
“우리 불교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합시다”해인총림 해인사 방장 원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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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7 년 1 월 [통권 제4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6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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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丁酉年) 새해가 밝았다. 그 어느 해보다 다사다난했던 2016년을 뒤로 하고 ‘붉은 닭의 해’가 떠올랐다.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은 허전하다. 가슴속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가야산으로 향했다.

 

세상은 흔들렸지만 가야산은 그대로였다. 일주문에서부터 대적광전, 팔만대장경 판전과 대장경 모두 그대로다. 눈보라가 들이치고 삭풍이 불어와도 가야산 대중들의 정진은 변함이 없었다.

 

 

해인총림 방장 원각 스님 

 

 

발길을 퇴설당으로 돌렸다. 가야산 대중들을 이끌고 있는 해인총림 해인사 방장 원각 큰스님에게 한 말씀을 청했다. 스님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인자한 미소로 세상을 향해 애정 어린 조언을 던졌다. 대담은 본지 발행인이자 해인사 백련암 감원인 원택 스님이 진행했다.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되신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갑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습니다. 3월이면 2년이 됩니다. 2003년부터 총림 유나를 맡다가 소임을 맡아서인지 가야산 대중들이 마음을 보태주시고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 철에도 큰절대중 200여명, 가야산 전체로 하면 약 500여명의 대중이 정진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하고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해인사는 도량이 너무 좋은 사찰입니다. 선원도 사실은 제방 선원에 비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24시간 열려 있으니 언제든 정진하면 됩니다.

 


원각 스님이 원택 스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선방은 정진하는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대중들이 정진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소임자들에게도 이 점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 이번 동안거에는 대중들에게 어떤 당부의 말씀을 내리셨습니까?

 

=하안거 해제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동안거의 중반이 지나고 있습니다. 세월이 너무 빠릅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아무 가치 없는 일에 시간을 다 보내고 허송세월 할 수가 있습니다. 실속 있게 공부를 해야 됩니다. 이번 동안거 결제 기간에는 애써 정진해서 공부를 성취하여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였으면 합니다.


子午慇懃修白業(자오은근수백업)하야
不須虛負好光陰(불수허부호광음)하라.
爭似無爲實相門(쟁사무위실상문)에
一超直入如來地(일초직입여래지)리오.


밤낮으로 간절히 도를 닦아서
좋은 세월 헛되이 보내지 말라.
어찌 함이 없는 실상문에
한 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감과 같으리오.

 

-2017년이면 방장스님의 출가 50주년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해인총림과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해인사 약수암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당시 약수암에는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적지 않았어요. 그때 해인사 중봉암에 계시던 도림 스님(훗날 봉철 스님)이 자주 약수암에 다녀가셨습니다. 봉철 스님은 젊은 학생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고 또 고민상담도 해주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착하게 사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을 따라 중봉암에 갔습니다. 밤새도록 스님 말씀을 들었어요. 그런데 봉철 스님의 ‘착한 것도 내려놓고 악한 것도 내려놓고 본심에서 살아라’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발심(發心)이 됐어요. 다음날 중봉암에서 내려오는데 봉철 스님이 저에게 『육조단경』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날부터 불교 관련 책들만 열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출가를 해 가야산과 인연이 됐습니다.

 

-혜암 큰스님은 어떤 스승이셨나요?

 

=중봉암에서 봉철 스님 모시고 행자 생활하고 있는데 혜암 큰스님께서 통도사 극락암에서 1966년 동안거를 해제하고 오셨습니다. 시기적으로는 1967년 초입니다. 그간에 큰스님께서는 상좌를 잘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처음 큰스님 뵙고 인사를 드리고 그때의 심경과 여러 가지를 말씀드렸더니 큰스님께서 모든 것은 때가 있으니 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할 것과 상좌가 잘못하면 스승도 동타지옥할 일이 생기니 중노릇 잘 할 것을 당부하시고 출가를 승낙하셨습니다.

 


해인사 원당암에 세워진 혜암 스님의 가르침 '공부하다 죽어라'

 

큰스님은 엄격하시면서도 자상하셨습니다. 또 직접 행(行)으로 보여주시며 제자들이 애써 정진하기를 경책하셨습니다. 중봉암에서 큰스님과 한 방에서 같이 지내며 생활했습니다. 저는 저녁 9시쯤 자 새벽 2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예불 올리고 한방에서 같이 정진하고 가끔 큰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특히 참선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공부하다 죽어라, 이 공부를 해야 수지가 맞는다’고 하셨죠. 이와 함께 인과(因果)를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하시며 스스로 올바르게 살고 철저하게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출가 후 해인사에서 세 철을 연달아 살고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니 큰스님께서는 남해 용문사에 살고 계셨어요. 용문사와 상무주암, 문수암, 각화사 동암, 칠불암 등에서 큰스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혜암 큰스님과 방장스님께서 일구신 원당암에는 불자들의 정진 열기가 식지 않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1979년 경에 원당암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는 전각이 몇 채 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큰스님은 대중들과 함께 정진하며 원당암 불사를 하셨습니다. 특히나 재가자들이 정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1996년에 ‘달마선원(達磨禪院)’을 세우셨습니다. 과거에도 계시는 곳마다 큰스님께서는 혼자 지내지 않으시고 항상 대중과 같이 공부를 하셨습니다.

 


원당암 달마선원 전경

 

달마선원은 108평 규모의 선방인데, 전국 재가선방의 효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도 많은 대중들이 방부를 들이고 정진하고 있습니다. 큰절 용맹정진 때 달마선원 대중들도 같이 용맹정진 합니다. 매월 첫째, 셋째 주말에 철야정진을 합니다. 또 산철에도 정진을 합니다. 모두가 혜암 큰스님의 원력으로 진행되고 있는 수행입니다. 달마선원 대중들의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선방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한다고 합니다. 대중들이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할 생각입니다.

 

-방장스님께서 출가하신 그해 성철 큰스님의 ‘백일법문’이 있었습니다. 당시 ‘백일법문’에 동참하셨다고 하던데요.

 

=제가 출가해 하안거를 끝내고 자운 큰스님께 사미계(沙彌戒)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난 뒤 동안거를 앞두고 비구계(比丘戒)까지 받았어요. 3개월 만에 일사천리였습니다. 당시 비구계를 받아야 하는 스님들이 많아서 율장에 따라 20세가 넘으면 비구계를 받아도 된다고 어른스님들이 결정을 하셔서 저도 비구계를 받았습니다. 수계 도반 중에는 백련암 원조 스님(박성배 교수)도 있었습니다. 원조 스님과 중봉암에서 같이 『천수경』도 읽으며 가깝게 지냈던 기억도 나네요.

 

그때 저는 선열당에서 지내면서 ‘백일법문’을 들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불교가 무엇인지, 불교와 과학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을 설명하셨고 특히 불교의 핵심을 중도(中道)로 회통해 법문하셨습니다. 가야산의 선원, 강원, 율원 대중은 물론 인근 지역 사찰 대중들까지 와 법문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그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초심자였던 저 역시 공부를 많이 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주실 수 있을까요?

 

=백일법문은 현당(지금의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진행됐습니다. 방에 스님들이 꽉 들어찼고 밖에는 신도들이 있었습니다. 원공 스님이 성철 큰스님 시자를 하셨고 원조 스님과 원기 스님이 같이 도왔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법문 하실 내용을 태정 스님 등을 시켜 프린트 해 오셔서 대중들에게 나누어 준 뒤 법문을 하셨어요.

 

얘기한대로 불교의 정의는 물론이고 과학에 대한 말씀도 많이 하셨어요. 등가원리(E=mc2)를 그렇게 쉽게 설명하시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큰스님께서는 설명을 하실 때 항상 근거를 들어 말씀하셨어요. 학자들이 논문을 쓸 때처럼 무슨 책 몇 페이지에 보면 나와 있다고 근거를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 ‘명등(明燈)’ 소임을 했습니다. 전기가 없을 때라 선원 전각마다 불을 켜고 끄는 일을 했습니다. 고생스러웠지만 대중들과 함께 신심이 나서 법문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부처님법이나 조사스님법이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안목이 부족한 것일 뿐입니다. 부처님과 조사스님들께서 주신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열심히 정진해야겠습니다.

 

-성철 큰스님의 ‘백일법문’도 그렇지만, 당시 가야산의 정진열기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해인사의 선방이 3개였습니다. 조사전은 용맹정진, 퇴설당은 가행정진, 선열당은 일반정진실이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경책을 하실 때면 조사전에서부터 큰 소리가 들립니다. 죽비로 사정없이 경책을 하실 때였으니까요. 성철 큰스님께서는 대중들이 제대로 정진 안하면 ‘밥도둑놈들이 잠만 잔다’고 호되게 경책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퇴설당과 선열당의 대중들은 더 긴장해서 자세를 다잡곤 했습니다.

 


한국불교를 이끌었던 성철 스님과 혜암 스님

 

당시는 대중이 많아 방이 부족했습니다. 노장님들도 큰방에서 같이 생활했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자야했습니다. 자다가 눈을 뜨면 대중의 3분의 1은 앉아서 정진을 하고 있어요. 깜작 놀라 같이 정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또 점심공양을 마치고는 큰방에 다 모여서 같이 차담을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어서 우유를 한 잔씩 타서 대중들이 돌려서 먹기도 했습니다. 방장스님이하 수좌, 유나, 율주 스님까지 같이 오셔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힘들었어도 그때는 정진 분위기도 좋고 대중들이 한 방에서 같이 잘 지냈습니다. 지금은 예전의 그 맛이 좀 적은 것 같아요.

 

-당시 정진 열기와 현재 가야산의 분위기가 조금 차이가 있을까요?

 

=말씀드린 대로 예전에는, 부족하지만 뭔가 열심히 정진하자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어른들도 많이 계셨고요. 그런데 지금은 세대가 달라서인지 문화 자체가 많이 다릅니다. 차담도 끼리끼리 하고 갑니다. ‘큰방’ 세대와 ‘각방’ 세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정진하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른들께 바로 바로 여쭙고 그랬는데, 요새는 각자 공부를 하는 분위기 같아요. 대중 속에 있다 보면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철 큰스님은 어떤 어른이셨습니까?

 

=성철 큰스님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어른입니다. 조계종의 법맥(法脈)을 제대로 정립하셨습니다. 또 중도(中道)를 중심으로 불교를 정리해 주셨습니다. 선교(禪敎)를 막론하고 불교의 핵심은 중도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불교 공부의 방향을 제대로 제시해 주신 어른입니다.

 

깊은 선지도 가끔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움에 처한 종단과 해인사의 위상을 나라 전체에 드높여주신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성철 큰스님이 더 생각납니다.

 

-해인총림에 계셨던 여러 어른들도 많이 생각이 나실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고암, 자운, 지월, 영암, 석암, 일타, 법전, 지관 큰스님 등이 다 생각이 납니다. 한 번은 선방에서 차담을 하는데 방장이신 성철 큰스님께서 주지를 뽑아야 한다며 석암 큰스님과 지월 큰스님에게 ‘두 분 중에서 주지를 하라’고 하셨어요. 두 분은 서로 사양을 하셨습니다. 양보를 하신 것이죠. 한참 실랑이가 이어지다 석암 큰스님이 대중들에게 합장을 올리고 자리에서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월 큰스님께서 주지를 하셨습니다. 서로 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요즘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2016년 동안거 결제를 맞아 자리를 함께 한 해인총림 대중들의 모습

 

지월 큰스님께서는 주지소임을 하시면서도 시간이 될 때마다 선방에 같이 앉으셨습니다. 또 대중들이 시비가 있으면 당신이 가셔서 ‘아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고 했어요. 그러니 대중들이 다툴 수도 없었습니다. 지월 큰스님은 법당에서 축원도 그렇게 잘하셨습니다. 너무 간절하게, 또 듣는 사람은 신심(信心)이 나게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일타 큰스님께서도 율원에 계셨지만 차담 시간에 대중들에게 소참법문도 많이 하셨습니다. 또 습의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다른 어른들도 정말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후학들은 어른들 따라 열심히 정진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요즈음은 옛날처럼 어른들이 많지가 않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공부하는 수행자들이 꼭 봤으면 하는 책을 꼽아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공부할 때 읽으면 도움이 되는 책이 많이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수행과 맞는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돈오입도요문론』, 『신심명』, 『증도가』, 『임제록』, 『백일법문』 등을 추천합니다.

 


낙성을 앞두고 있는 해인사 조사선에서 원각 스님과 원택 스님이 경내를 살펴보고 있다.

 

어떤 책이든지, 책을 읽다 보면 어떤 대목에서 계합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물을 쳐 놓으면 물고기가 한 그물코에 끼어 잡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좋은 경전이나 어록 읽는 일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새해를 맞아 불자와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먼저 승가에 당부하고 싶습니다. 승가는 화합이 최우선이고 원융살림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도량을 우리 모두가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불자와 국민들께는 중도(中道)의 정신에서 생활하고 소통하기를 바랍니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마음의 본바탕에서 일이 잘되도록 하면 풀리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것이 있습니다. 불보살님들은 중생들을 당신과 똑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시고 항상 큰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보듬어 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런 마음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본래의 마음에서 서로를 위하고 나라와 국가를 생각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정유년 새해에도 부처님의 가피가 항상 함께 하기를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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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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