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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 봉암사 결사結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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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0 년 5 월 [통권 제85호]  /     /  작성일20-06-01 16:34  /   조회99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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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대한불교조계종 제6.7대 종정

 

지나간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예전 봉암사에 살던 얘기입니다. 요새 와서 봉암사 살던 것을 묻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지금 봉암사에서 잘해 보겠다고 사람이 일부러 와서 묻기도 하고, 딴 사람들도 이야기 좀 해 주었으면 하는데, 사실 보면 봉암사에 여럿이 함께 살았지만은 내가 주동이 되어 한 만큼, 내가 그 이야기를 하기는 곤란합니다만 여러 형편으로 봐서 조금 이야기 하겠습니다.  

 

봉암사에 들어 간 것은 정해년丁亥年[1947년 - 편집자주], 내 나이 그때 36세 때입니다. 지금[1982년 - 편집자주]부터 35년 전입니다. 봉암사에 들어가게 된 근본 동기는, 죽은 청담 스님하고 자운 스님하고 또 죽은 우봉 스님 하고, 그리고 나하고 넷인데, 우리가 어떻게 근본 방침을 세웠느냐 하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이 원願이었습니다. 즉 근본 목표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처소는 어디로 정하나? 물색한 결과 봉암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우봉 스님이 살림 맡고, 보문 스님하고 자운 스님하고, 나하고 이렇게 넷이 들어갔습니다. 청담 스님은 서로 약속은 했었지만 해인사에서 가야총림伽倻叢林 한다고 처음 시작할 때는 못 들어오고. 그 뒤로 향곡香谷, 월산月山, 종수宗秀, 젊은 사람으로는 도우道雨, 보경寶境, 법전法傳, 성수性壽, 혜암慧菴, 종회의장 하던 의현義玄이는 그때 나이 열서너 댓 살 되었을까? 이렇게 해서 그 멤버가 한 20명 되었습니다. 살기는 약 3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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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중반의 어느 날 문경 봉암사. 왼쪽부터 서경수 교수, 성철스님, 숭산스님, 이한상 거사, 박성배 교수 

 

 

처음에 들어가서 첫 대중공사大衆公事를 뭘 했느냐 하면, 혹 이런 이야기하면 ‘지금이라도 실천하자고 하는가?’ 이렇게 의심할는지 모르겠지만, 살았던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지 지금 당장 꼭 이대로 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우선 법당 정리부터 먼저 하자, 이렇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법당 정리를 하다니 무슨 소리인가?

 

우리 한국불교는 가만히 보면 간판은 불교 간판을 붙여 놓고 있지만, 순수한 불교가 아닙니다. 칠성단도 있고, 산신각도 있고, 온갖 잡신들이 소복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법당에 잡신들이 들어앉을 수는 없는 것이니 법당 정리부터 먼저 하자, 그리하여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이외에는 전부 다 정리했습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 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습니다.

 

자세히 이야기를 하려면 여러 날 해야 되니 자세히 다는 이야기 못하겠고, 그 다음이 이제 불공佛供인데, 불공이란 것은 자기가 무엇이든 성심껏 하는 것이지 중간에서 스님이 축원해 주고 목탁 치고 하는 것은 본시는 없는 것입니다. 꼭 부처님께 정성 드리고 싶은 신심 있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물자를 갖다 놓고 자기 절하라 말입니다. 우리가 중간에서 삯군 노릇은 안 한다 이것입니다.  

 

그래 놓으니 불공은 그만 싹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대개 절에 칠성 신도가 많은데, 칠성 안 해줄 뿐만 아니라 부처님 앞에서라도 목탁 치고 축원은 안 해 주니 누가 불공하러 오겠습니까. 그만 신도 싹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영혼 천도薦度가 문제되는데, 부처님 말씀에 누구 죽어 7·7재를 지낼 때에 부처님 경을 읽어 주라고 했지 뭐 두드리고 하라는 말씀 없거든요. 마침 들어가니 49재하는 사람이 있는데, 3재쯤 되었어요. 쭈욱 이야기하고는, “당신네가 꼭 해달라고 하면 경은 읽어 주겠지만 그 이외에는 해 줄 수 없소.” 했습니다.

“그러면 재 안 하렵니다. 그런데 스님들은 어떻게 사십니까?”

“우리 사는 것은 걱정 마시오. 산에 가면 소나무 솔잎 꽉 찼고, 개울에 물 철철 흘러내리고 있고, 우리 사는 것 걱정하지 말고 당신들이나 잘 하시오.”

 

이래서 불공 막아 버렸지, 천도해 주는 것 막아 버렸지,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 무기는 따로 없습니다. 동냥하는 것뿐입니다. 동냥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법당은 어느 정도 정리되는데 가사니, 장삼이니, 바리때니 이런 것이 또 틀렸다 말입니다.

 

부처님 법에 바리때는 와철瓦鐵입니다. 쇠로 하든지 질그릇으로 하지 목木바루는 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쓰고 있습니다. 가사袈裟장삼長衫을 보면, 가사니 장삼을 비단으로 못하게 했는데, 그 당시에 보면 전부 다 비단입니다. 색깔도 벌겋게 해서, 순수한 색이 아니고 괴색壞色을 해야 되는 것이니 그것도 비법非法입니다. 그래서 비단 가사, 장삼, 그리고 목바리때, 이것을 싹 다 모아 가지고 탕탕 부수고 칼로 싹싹 자르고 해서 마당에 갖다 놓고 내 손으로 불 싹 다 질렀습니다.  

 

그리고서 시작했습니다. 가사는 그 전 해에 대승사大乘寺에서 조금 만든 것이 있었으나 완전히 된 것이 아니고, 봉암사에서 근본적으로 출발했습니다. 비단으로 안하고, 또 괴색으로 우리가 물을 들였습니다. 바리때가 없어서 처음에는 양재기를 펴다가 나중에 옹기점에 가서 옹기를 맞추어서 썼습니다. 

장삼은 법대로 된 예전 장삼이 송광사松廣寺에 한 벌 있었습니다. 예전 보조普照 스님께서 입던 장삼인데, 자운 스님이 양공양복장이이거든, 보고 와서는 이전 장삼을 버리고 새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장삼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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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924년 건립 국보 제315호 

 

 

육환장六環杖도 새로 만들고, 요새는 안 하지만 스님은 언제든지 육환장 짚게 되어 있으니까. 삿갓도 만들었습니다. 삿갓을 만들어 놓으니 이것은 조선 5백년 동안 스님들 압박하려고 만든 것인데 왜 내놓느냐고 사방에서 공격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건 모르는 소리야. 일본도 지금 선승禪僧들은 삿갓 쓰고 있고, 예전 중국에도 보면 법문에 삿갓이야기 많이 나오고, 청규淸規에 삿갓 쓰도록 다 있어. 그리고 아침에는 꼭 죽을 먹었습니다.

 

공양은 사시巳時밖에 없으니까, 오후에는 약석藥石이라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율律에 보아서는 저녁 공양은 없는데, 청규에는 약석이라고, 약藥이라 해서 참선하는 데에 너무 기운이 없어도 안 되므로 바리때 펴지 말고 조끔씩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포살布薩도 처음으로 거기서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제도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일종의 혁명인 셈이지요. 이런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무엇이든지 우리 손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밥해 먹는 것도 우리 손으로 한다, 나무하는 것도 우리 손으로 한다, 밭 매는 것도 우리 손으로 한다. 일체 삯군, 일꾼은 안된다 말입니다. 이것이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청규 근본정신이니까 그래서 부목負木도 나가라, 공양주도 나가라, 전부 다 내보내고 우리가 전부 다 했습니다. 쉬운 것 같지만 실제는 이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곡식도 전부 다 우리 손으로 찧고, 나무도 우리 손으로 하고, 밭도 전부 우리가 매고, 이것이 실제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신도들과의 관계는 어찌되어 있느냐 하면, 스님 보고 “야야”, “자자” 하지 “스님” 소리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소리, 나이 많은 사람은 다 알 것입니다. 스님이 다 뭐야, 자기 종 취급인데. 나도 처음 승려 되어 그런 소리 들어봤습니다.

 

우리도 보살계菩薩戒를 하자. 법을 세우려면 보살계를 해야 되니까. 자운 스님이 『범망경梵網經』을 익혀 가지고 처음으로 보살계를 했습니다. 보살계 한다는 소문이 이리저리 나가지고, 서울로, 부산으로, 대구로, 진주, 마산, 저 먼 데서부터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그 심심산골에 수백 명이 왔어요, 방에 꽉 앉혀 놓고 말했습니다.

 

“당신네가 여태까지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께는 절했지만, 스님들 보고 절 한 일 있나? 생각해봐, 스님은 부처님 법을 전하는 당신네 스승이고 신도는 스님한테서 법을 배우는 사람이야. 당신네는 제자고, 스님은 스승인데, 법이 거꾸로 되어도 분수가 있지 스승이 제자 보고 절하는 법이 어디 있어. 조선 5백 년에 불교가 망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그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야. 부처님 법에는 신도는 언제나 스님들한테 세 번 절하게 되어 있어. 그러나 부처님 법대로 하려면 여기 다니고, 부처님 법대로 하기 싫으면 오지 말아. 그렇다고 꼭 우리말대로 하라 이 말도 아니야. 하기 싫은 사람은 나가 나가란 말이야.”

한 사람도 안 나가요

.

“그럼 부처님 법대로 하겠다는 말인데, 꼭 부처님 법대로 하려면 일어서서 절 세 번씩 하란 말이야. 그것이 부처님 법이니까. 억지로 하라는 것 아니야. 하기 싫은 사람은 나가.”

그랬더니 전부 일어나서는 절을 세 번씩 했습니다. 절을 다 하고 난 후에 말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법이니 어디서든지 스님들을 만나면 꼭 세 번씩 절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도가 아니야.”

신도가 스님들 보고 절한 것, 근세에는 이것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다시 보살계를 합니다. 당시에 들으니 보살계첩 한 장에 천 원 받는다 하는데, 40년 전 천 원이면 큰돈입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불사佛事는 많은데 흔히 불사, 불사하지만 불사하는 것 나는 하나도 못 봤어. 전부 장사하지, 장삿속이란 말이야. 우리는 불사 좀 해보자. 장사는 하지 말고.” 

그때 계첩을 모두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래놓고는 이제 시작입니다. 보살계를 받으려면, 천화불千化佛이라 해서 천 번은 절을 해야 되는데, 밤새도록 절을 시킵니다. 그 중에 한 70살 되는 늙은이가 뻗정다리입니다.

“스님, 저는 다리가 이래서.”

“다리가 그러면 계 안 받으면 될 것 아니오. 절을 안 하면 계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 한 80살 되는 늙은이가 말했습니다.

“스님, 저는 아파서 일주일 동안 미음만 먹다가 왔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미음단지.”

“절 못하면 보살계 안 받으면 될 것 아니오. 나가시오, 나가!”

 

나중에 보니 그 늙은이들이 더 절을 잘합디다. 그렇게 절을 시켰습니다. 천 배 절을 시킨 후에 보살계를 하는데 미리 큰 죽비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두들겨 패려고. 그 전에 계살림 하는 것 보니까. 한쪽으로는 법상에서 뭐라고 뭐하고 하는데 한쪽으로는 이야기하는 사람, 자는 사람 등등 별별 사람이 꽉 찼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간섭은 안 한다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계첩만 팔아먹으면 그만이니까. 우리가 다 봐두었거든.

 

그래서 “앉을 때는 꼭 꿇어 앉아라” “합장해라” 그래놓고, “잘못 꿇어앉아도 때려주라” “합장 잘못해도 때려주라” “졸아도 때려주라” “이야기해도 때려주라” 이 네 가지를 범하는 사람은 무조건 큰 죽비로 죽도록 때려준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젊은 사람이 군데군데 서 가지고 턱턱 때려준다, 그건 때려주어야 자비지, 안 때려주면 자비가 아니니까. 여기서 철썩, 저기서 철썩, 몇 번을 깜짝깜짝 놀라더니 그만 아무도 조는 사람이 없습니다. 걸어 다닐 때도 어디 기를 펴고 다녀, 숨도 크게 못 쉬는 판인데. 그리하여 계살림을 사흘간 원만히 잘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후에 원주를 불렀습니다. 

 

“그래도 쌀 좀 남았지? 남은 쌀 전부 밥 다해라.”

“허! 그걸 어쩔려구요.”

“어쩌든지 내가 알아 할 터이니 밥 다해라.”

남은 쌀로 전부 밥을 해서는 주먹밥을 만들어서 한 덩이씩 안겨 주었습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8, 90살 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때, 그것 사흘 동안 한 것보다도 몇 줌 남은 쌀 그것까지 싹싹 긁어 가지고 밥해서 한 주먹씩 안기는데 그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놓고 보니 7천 원이나 빚졌다고 해요. 40년 전 7천 원이면 큰돈입니다. 

 

우리는 또 동냥 나다닙니다. 총무원장 하다가 수도암에 가 있는 법전 스님, 자운 스님, 따라 다니면서 동냥한다고 어떻게나 욕을 봐놨던지. 지금도 이야기한다고 해요. 참 동냥한다고 욕봤어요. 석 달 안에는 어디고 기침소리도 한군데 나는 데가 없었습니다.(석 달 안에는 대중공양 안 받기로 한 때문) 

석 달이 지나고 나니 대중공양이 들어오는데 딱 벼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방에서 대중공양이 들어오는데 감내를 할 수 있어야지. 여기서도 공양이 들어오고, 저기서도 공양이 들어오고, 돈도 들어오고, 장삼 하자, 가사 하자, 뭣도 하자, 막 불사가 벌어지는데 그만 장사를 여러 수십 배 해버렸습니다.

 

“우리가 장사를 하나, 농사를 짓나, 뭣하나. 결국은 신도 것 먹고 사는데, 신도 것 얻어먹어도 법답게 얻어먹고, 신도가 절에 다녀도 신심으로 갖다 줘야 되지. 이것 뭐냐. 신도가 오면 돈 몇 푼 그것 먹으려고 발밑을 슬슬 기고, 그것은 보통 사람도 할 짓이 못되는데, 우리가 부처님 제자라 하면서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앞으로 법답게 들어오는 것은 법답게 받으면 안되느냐고.”

 

신도가 바늘 하나를 가져와도 대중으로 들여와야지, 어느 스님 개인으로는 안 됩니다. 한번은 마산에서 어느 신도가 걸망을 하나 지어 보냈습니다. 청담 스님 드리라고. 그때는 법명이 순호 스님이지.

“우리는 개인적으로 지정하는 것은 안 받기로 했어. 가져가시오.”

“그러면 대중으로 들여놓으면 안 됩니까?”(심부름하는 이의 말)

“이것이 당신 걸망이야?”

쫓아 버렸습니다. 그 걸망이 마산으로 돌아가 가지고 대중에 들여 놓는다고 다시 돌아왔어요. 그래 이제 걸망을 모두 다 조사를 했습니다. 옷 하나라도 제일 떨어진 사람에게 맨 처음 주기니까. 돌아 보니 순호 스님 걸망이 가장 떨어졌어요.

“이 걸망은 순호 스님이 주인인가 보다.”

 

바늘 한 개, 양말 한 짝, 무엇이든지 대중으로 들여 놓아야지 개인을 지정해서는 쫓겨 가는 판입니다. 그래 가지고, 약도 들어오고, 인삼도 들어오고, 삼은 전부 다 삼차를 해서 한 컵씩 쭈욱 둘러 먹고 하였습니다. 잘 살든가 못 살든가 똑같이 평등하게 살자 이것입니다. 이렇게 하며 살다 보니 스님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절하는 것을 예로 들면, 향곡 스님은 좀 늦게 참여했습니다. 자운 스님이 잘 알지만, 거기 들어가 살면서 내가 편지를 냈습니다. 엽서로 우리가 여기 사는데 공부하러 오라, 안 오면 내가 가서 토굴에 불을 질러 버린다고. 그 편지 받고 당장 쫓아 왔어요. 이렇게 도반道伴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집 지키는 사람을 구해놓고 후년 봄에 오겠다 하더니. 

그래 향곡 스님이 왔는데, 마침 점촌에서 신도들이, 특히 나이 많은 노인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왔어요. 그 전날 비가 왔는데. 한 신도가 내가 마당에 서 있는 걸 보더니 그 자리에서 절을 넙죽 세 번하거든. 그걸 보고 깜짝 놀라버렸다고 해요. 

 

아무리 절을 하지만, 비 온 뒤 진 구렁에서 넙죽넙죽 절을 세 번이나 하니, 향곡 스님이 어떻게 보겠어. 그런데 알고 보니 그이가 전진한錢鎭漢 씨 어머니라. 그때 사회부 장관했지요. 장관 어머니라는 사람이 스님보고 진구렁에서 절을 세 번이나 해놨으니 참 이상했던 모양입니다. 두고두고 향곡 스님이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도하는 것도, 처음에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재가 하나 들었다가 가 버렸는데, 가만히 보니 사는 사람들이 스님 같고 귀신을 맡기면 천도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하나씩 둘씩 재 해달라고 들어와요. 우리 법대로 『금강경金剛經』이나 『심경心經』을 읽어 주는데, 그만 재가 어떻게나 많이 드는지, 왜 그런가 들어보니, 무슨 탈이 나가지고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한다, 별짓을 다해도 천도가 안 되는데, 봉암사에만 잡아넣으면 그만이다, 이것입니다. 자꾸 온다 말입니다. 자, 『금강경』은 너무 시간이 걸려서 안 된다. 『심경』을 하자. 『심경』 칠 편, 그것도 안 되어서 나중에는 삼 편씩 해주었습니다. 그래도 ‘스님 네들 법대로’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봉암사에 가 있으니 동국대학교에서 사람이 내려와 각 사찰의 산판을 2할씩 떼어 가기로 종단에서 정식 결의했으니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동국대학교 이사장이 김법린金法麟 씨인데 우리 잘 아는 사람이라. 동국대학교가 봉암사보다 뭘 더 잘하고 산다고 우리 봉암사 것 달라고 해. 못 주겠다. 꼭 받아 가고 싶으면 이사장이 직접 오라고 해. 그리고는 그만 안 주었어요. 온들 주나. 김법린이 내 성질 잘 아는 사람인데. 산판, 봉암사 산판이 얼마나 좋으냐 말입니다. 산림계, 군, 도 경찰서, 본산, 종무원, 총무원으로 해서 짜고는 봉암사 산판 베껴 먹으려고 자꾸 산판을 하자 합니다. 한번은 한 40-50명이 트럭으로 막 왔어요. 협박을 할 참이라, 산판 하자고, 큰방에 모두 앉혀 놓고 쭈욱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봉암사에 그냥 이렇게 사는 것 같아도 앞으로 큰 수도원修道院을 세울 것인데 집을 지으려면 이 나무들이 다 쓰일 터이니 산판을 할 수 없다고. 그랬더니 도의 산림국장이라는 사람이 “스님들이 그런 좋은 이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든지 봉암사 산판은 책임지고 못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했어요. 도 산림국장이 책임지고 산판 막겠다고 하니 딴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하지!

 

또 한 번은 군인들이 빨갱이 토벌대라 하면서 70-80명 와서 절에서 잤는데, 나는 그때 생식할 때라 그 옆 극락전에 있으니 순호 스님이 왔어요. 군인들이 싸움하러 가면서 밥해 달라고 하는데 밥 안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거든요. 싸움하러 가면서 밥해 달라는데 어떻게 하느냐 이것이라. 안 된다고 했지요. 그리고는 그 대장을 불렀습니다.

“당신들은 군율軍律이 안 서면 싸움할 수 없는 것이고, 우리 절에도 법이 있어. 우리가 여기 들어온 뒤로 여태 한 번도 아침에 밥해 먹은 적이 없어. 당신네들이 들어서 우리가 여태까지 죽 끓여 먹던 법을 깨야 되겠어?”

“그래서는 안 되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

“글쎄, 군인들을 죽 먹여서는 싸움하기 곤란하고.”

“여기서 동네가 십 리가 되나 백 리가 되나, 조금만 돌아가면 동네 아니야. 거기 가서 밥해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해줄 것 아니야.” 

“하! 참 그렇네요.” 

하면서 동네에 가서 밥해 먹고 싸들고 싸움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며칠 간 어디를 좀 갔다 오니 밭이 환해서 밭고랑 밑에 개미가 보일만하고 떡이 떨어지면 주워 먹어도 괜찮을 만큼 밭이 훤합니다. 내가 없을 때 원주가 삯군을 대서 밭을 매어버린 겁니다.

“원주 스님 오라 해봐라.”

“우리 원주 스님이 보살이야. 대중 데리고 밭 매느라고 참 욕봤어. 그동안에 어떻게 저 많은 밭을 다 맸어.” 

가만히 보니 일이 틀린 모양이거든. 뭐 어쩌고 변명을 해요.

“이 도둑놈아! 누가 삯군 대라고 했나? 삯군 안 대기로 안 했나! 왜 봉암사 규율을 깨버렸어?”

그만 당장 가라고 소리 질러 버렸지요. 그 이튿날 아침에 보니까 새벽에 달아나 버리고 없어요. 그렇게 좀 지독하게 했습니다. 나무를 하는데 식구 수대로 지게를 스무 개 정도 만들었습니다. 그래 놓고 나무를 하는데 하루 석 짐씩 했습니다. 석 짐씩 하니 좀 고된 모양입니다. 나무하다 고되니까 몇이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보다 못한 자운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러다간 대중이 다 없어져. 나뭇짐을 내려야 돼. 두 짐씩만 해.”

“뭐 어째?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살 거야? 사람하나 가면 한 짐씩 올릴 참이야. 하루 석 짐 하는데 사람하나 도망가면 넉 짐하고 둘 도망가면 다섯 짐하고 살 거야.”

“그러면 안 돼. 다 도망가 버려.”

“그러면 자운 스님하고 내하고 둘이 남을 것 아닌가.”

“에잇, 나도 갈 참이야.”

참, 자운 스님, 처음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참으로 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봉암사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왜 여태까지 살지 않았나?

 

가만히 보니 시절이 좀 잘못 돌아간다 말입니다. 나무를 베어다가 켜서는 책이 좀 있었는데 나무로 궤짝을 짜 가지고 책을 모두 궤 속에 넣었습니다. 그래 놓고 향곡 스님을 시켜서 트럭을 하나 가져오라 해서는 책을 밤중에 실어다가 향곡 스님 토굴인 월래月來에 갖다 놓았습니다. 6·25사변이 일어나기 바로 일 년 전입니다. 그래놓고 청담 스님에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여기 못살 것 같은데, 후년에는 결국 이사를 해야 되니 통영 근방에 사찰 하나 얻을 데 없나?”

“고성 문수암이 참 좋아. 가면 당장 줄 거야.”

“절대 비밀이야. 대중이 알면 안돼.”

절대 비밀로 하여 고성 문수암을 딱 얻어 놓았습니다. 대중은 모르게. 그래 놓고 가을이 되고 보니, 뭣인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거기 있으면 안되겠다 말입니다. 딴 사람은 있어도 괜찮지만 나는 거기 있으면 안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추석 지나고 난 뒤에 대중공사를 했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관계상 여기서 떠나야 되니까 그리 알고, 오늘부터는 순호 스님, 순호 스님이 입승봤거든 입승 스님한데 전부 맡기니 입승 스님 시키는 대로 하시오.”

이렇게 하고 봉암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월래에 와서 겨울은 거기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제結制해 놓고 얼마 안 있어서 그만 공산당들이 달려들어 버렸다 말입니다. 오던 길로 나를 찾더라 해요. 한 20명이 총을 메고 달려들었는데 굉장했다고 합디다. 보경 스님이 그때 죽을 뻔하고, 내 대신으로 보경 스님 죽인다고 탑거리로 끌고 나가고, 탕탕 다 털리고 월래로 쫓아왔어. 어떻게 할까 묻더군요. 그렇지만 산림중이니 멀리 옮길 수 있습니까. 점촌 포교당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있다가 해제解制하고서 고성 문수암으로 싹 다 옮겼습니다. 그때 법전 스님 같은 사람들이 스무 살쯤 먹었는데, 지금은 60객이 다 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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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삼사 삼층석탑과 금색전 

 

 

그러자 뭐 여름이 되니 그만 툭 터지는데, 6·25사변이 났어요. 비행기가 진주 폭격하고 하는 것, 고성 문수에서 다 보았습니다. 그 뒤에 내내 봉암사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더랍니다. 그 스님이 뭣 좀 아는가 하고. 미리 싹싹 다 피해 버려놨으니. 그것이야 소발에 쥐잡기로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지 내가 알고 한 것은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미리 그렇게 했는데 만약 1년 전에 책을 안 옮겼으면 책은 모두 다 불타버리고, 우리 대중도 그때 큰 욕을 봤을 겁니다.

 

봉암사 지내온 것은 대충 이런 식이었습니다. 지금 남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사가 남았고, 장삼도 남았고 바리때도 남았는데, 바리때는 요새 들어볼라치면 흔히 목바루가 더러 나온다고 하는데, 그것은 부처님이 금한 것이니 안 써야 됩니다. 지금 보면 여러 가지 남은 것이 좀 있는데, 남고 안 남고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법을 세워서 전국적으로 펴고자 한 것도 아니었고, 그 당시 우리가 살면서 부처님 법대로 한다고 하면 너무 외람된 소리지만, 부처님  법에 가깝게는 살아야 안되겠나 그것이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대충 이야기 한 셈인데, 우리가 신심으로 부처님 법을 바로 지키고 부처님 법을 바로 펴서 신도들을 교화하면 이들이 모두 신심을 내고 하여 우리 스님들이 잘 안 살려야 잘 안 살 수 없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가장 잘 사는 것이 스님들이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좋으나 궂으나 할 것 없이 이해를 완전히 떠나 신심으로 부처님만 바로 믿고 살자 이것입니다. 우선은 좀 손해 본다 싶어도 결국에는 큰 돈벌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봉암사에 살 때 이런 이야기 많이 했습니다. 먹고 살 길이 없으면 살인강도를 해서 먹고 살지언정 천추만고에 거룩한 부처님을 팔아서야 되겠느냐고. 우리가 어떻게든 노력해서 바른 길로 걸어가 봅시다.

 

 │1982년 음 5월 15일, 방장 대중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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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6,7대 종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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