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거사선]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밝힌 화엄의 대가 이통현 장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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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 2013 년 12 월 [통권 제8호] / / 작성일20-05-29 14:11 / 조회7,978회 / 댓글0건본문
한때, 이통현(李通玄, 635~730) 장자가 중국 오대산에서 스님 모습으로 화현한 문수보살을 우연히 친견했으나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모시던 동자에게 물었다.
“그대의 스승은 누구이신가?”
동자가 대답했다.
“우리 스님은 묘덕 화상(妙德은 문수보살의 漢譯)이십니다. 당신께서『화엄경』을 널리 펼칠 원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잊으셨습니까?”
이에 장자는‘『화엄경』을 널리 펴라는 문수보살의 계시로구나. 화엄론을 지어 경을 해석하리라.’결심하고, 남쪽 우양현으로 가서 방산에 석굴을 파고『신화엄경론』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런 설화가 암시하듯, 장자는『화엄경』을 해석하려고 이 세상에 나오신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효 대사도『화엄경』해석을 시도했으나 ‘10회향품’까지만 저술하고 끝을 맺지 못할 정도로 방대한 경이 화엄경이다. 다행히 통현 장자와 청량 국사의 해석본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후학들은 그것으로 어려운 화엄경 공부를 그나마 수월하게 해온 셈이다.
이통현 장자의 수행처인 산서성(山西省) 보성(晋城) 현수사(賢首寺).
지난 회에서는, 통현 장자의 해석을 따르는 쪽은 선종계열이고, 교종계열에서는 주로 청량 국사의『화엄경소초』를 교재로 삼아서 공부했다고 밝혔었다. 선종에서 ‘돈오성불법’을 주장한 것이『신화엄경론』에서 일정 정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가질 수 있다. 물론『화엄경』은 선종법문의 토대가 될 만한 돈오법문으로 가득한 최상승경이다.
대심중생이 불성을 단박에 보아 정각을 이룬다
통현 장자의 대표작인『신화엄경론』의 한 구절을 살펴보면 그의 안목이 선종과 맞닿아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화엄경』은 바로 최상 대심자(大心者)를 위하여 말함이라. 보위(寶位: 임금 자리)를 가지고서 바로 범용(凡庸: 범부)에게 줌과 같으며 밤에 천만년을 꿈속에서 살고 있으니 깨고 보면 곧 없어짐과 같다.『열반경』에 말한바 ‘설산에 풀이 있으니 그 이름이 비니초(香草)라. 만일 소가 먹으면 순전히 제호(醍????: 최상급 우유)를 얻어서 청, 황, 적, 백, 흑색이 없다’고 하셨으니 최상 대심중생도 또한 그와 같아서 불성을 단박에 봄에 문득 정각을 이루고 소위(小位)로부터 점점 온 것이 아니다.”
여기서 최상의 대심자는 보살심을 발한 자, 바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으로 처음 발심할 때 부처의 깨달음과 같은 상근기를 말한다. 보현, 문수, 노사나가 우리와 다를 바 없고 우리도 발심하면 가능하다는 큰마음을 가진 대장부만이 화엄법문에 들어갈 수 있다. 잠을 자다가 깰 때는 꿈속에 천만 년을 살았더라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범부중생으로서 수천만 년 동안 부처의 자리가 무엇인지 몰랐다가 초발심 할 때 바로 부처의 자리를 아는 변성정각(便成正覺)의 도리를 비유한 대목이 ‘나라 임금의 자리를 범부에게 준다’는 말이다. 크게 발심한 대심중생은 소가 비니초를 먹고 제호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단번에 불성을 보아 돈오성불(頓悟成佛)한 것이다. 이러한 경전적 근거가 있기에 선종의 돈오(頓悟)사상이 교리적으로도 당위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선재동자가 처음 덕운 비구에게 깨달은 것이 ‘돈오’
“선재가 10주(住)의 초심(初心)에 묘봉산 위의 덕운 비구처소에서 일체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기억하고 지혜광명으로 널리 보는 법문을 얻어서 곧 정각을 이룬 후에 비로소 모든 벗에게 나아가서 보살도를 구하며, 보살행을 하시니, 마땅히 알라. 정각의 체와 용의 때에는 곧
마음의 짓는 것 없음이 곧 이 부처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나니 설령 수행이 원만하다 해도 또한 지금을 떠나지 아니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재 동자가 처음 덕운 비구에게 깨달은 것이 돈오(頓悟)가 되고 선지식에게 낱낱이 친견하며 도를 배운 것이 돈수(頓修) 또는 점수(漸修)이다. 부처자리인 정각(正覺)에는 마음에 작위(作爲)가 전혀 없다. 분별·망상이 없는, 조작된 마음인 작처(作處)가 없는 자리를 무심(無心)이라 한다.
통현 장자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곳으로 전해지는 오대산의 연못.
그런데, 선재 동자가 53선지식을 낱낱이 친견하여 수행했음에도, 왜 “닦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했을까? ‘일체경계 본래일심’을 증득한 돈오 이후는 ‘닦는 것 없이 닦고’(점수), ‘ 닦아도 닦는 것이 없기 때문’(돈수)이다. 돈오 이후의 점수니 돈수니 하는 말은 설명하기 위해 방편상 붙인 말일 뿐이지 뜻은 같다. 완전한 깨달음은 얻을 것이 없고(無所得法), 정해진 것이 없는 것(無有定法)이며, 지금 이 마음 즉 당념(當念)을 떠나지 않기에 돈수니 점수니 하는 말도 붙일 곳이 없다.
통현 장자는 10주(住) 초발심주에서 깨달음을 통해서 여래의 성품을 보아 철견하고, 입법계품을 가장 중요한 본론으로 하여 선재동자와 같이 우리도 일생을 통해 마음의 부처를 감득해야 한다고 보았다. 10주에서 깨달은 성품을 ‘문수의 지혜’ 곧 체(體)로 하고, 이어 10행 10회향 10지 11지의 수행이 모두 ‘보현의 행’을 이루어 용(用)이 되며, 문수의 이(理)와 보현의 행(事)이 회통하여 체용이 서로 사무치면서 일진법계(一眞法界), 과덕(果德)을 이룬다. 문수는 법계의 체(體·因)이고, 보현은 법계의 용(用·果)으로써 여래의 출현을 설명하는 경이『화엄경』이다. 10주에서 여래의 성품을 보고 나머지 행을 통해 무심(無心)으로 감득하여 무심·무주로 행을 체득해나가면 근본지(根本智)와 차별지(差別智)의 체용이 자재한 비로자나불이 된다는 것이 장자의 견해이다.
『화엄경론』의 다음 글 역시, 선사의 어록과 다름없는 법문이다.
“이『화엄경』은 바로 ‘참으로 증득하는 위치’를 논한 것이요, 서원을 논한 것이 아니니 이 교문은 모두 일시(一時), 일제(一際), 일법계(一法界)가 됨이라. 다른 생각이 없고 앞뒤의 생각이 끊어져서 범부와 성인이 동일한 성(性)이기에 감정으로 계교하는 것을 논하는 것이 아니니 응당 무념(無念)과 무작(無作)의 법계문(法界門)으로써 비춰보면 볼 수 있으나 만약 정견(情見)을 내세우면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대자대비의 보현행이 불행(佛行)이다
범부와 성인이 동일한 그 자리는 전후의 생각이 뚝 끊겨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면서도 하나의 시공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다. 분별·망상이 없는 자리가 무념이고, 취사·선택하는 생각이 없어서 작위(作爲)가 없다. 분별심, 차별심과 같은 견해를 낸다면 화엄법문을 믿기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돈오 이후의 수행은 대자대비의 행위로 드러나야 참된 보임(保任)공부가 아닐 수 없다. “먼저 비로자나법계를 깨닫고 뒤에 보현보살의 행원을 닦는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의 보살행은 바로 불행(佛行)이다. 『신화엄경론』에서는 “법신 자체의 지혜로써 모든 번뇌를 다스리고, 만행으로써 중생을 구제하되 법신(法身)과 지신(智身)이 마음대로 무작대비(無作大悲)에 따라서 한때에 단박에 쓴다”는 법문이 나온다. 여기서 무작대비란 무공용(無功用)의 대자대비 즉, 무심경지에 도달하여 해도 하는 바 없고, 하는 것 없이 하는 무념행·부처행을 말한다. 이러한 무작대비는『화엄경』의 10바라밀(피안에 이르는 방법)을 통해 현실 속에서 구체화된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혜(慧: 반야) 등 6바라밀에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 根本智와 後得智까지 겸한 대지혜)의 보조바라밀을 더한 것이다.
천녀와 호랑이의 시중을 받으며 『화엄경』을 해석하는 통현 장자.
이렇듯 통현 장자의 화엄법문은 단박 깨침과 대자대비행, 보살의 대원을 겸한 위대한 마음공부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대승최상승의 공부라고 하기 어렵다. 선(禪)공부를 한다고 경을 외면하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영가 대사는『유마경』을 읽고 마음이 열렸고, 보조 국사도 통현 장자의『신화엄경론』을 읽고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경을 보되 문자에 매이지 않고 자심반조(自心返照)하면 진짜 ‘마음의 경〔心經〕’을 보게 된다. 수행자라면 반드시 ‘경중의 왕’이라고 불리는『화엄경』과『법화경』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 이후에 참선하고 염불하고 다라니를 염한다면 힘을 얻는 기간이 수십 분의 일로 단축되리라 확신한다. 물론 진실로 간절하다면 경을 펼치는순간, ‘법의문〔法門〕’이 열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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