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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별어]
『사십이장경』을 ‘리메이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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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4 년 8 월 [통권 제1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68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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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곡으로 전설을 노래하다

 

한 시절 귀에 익숙했던 7080노래가 ‘불후의 명곡’이라는 타이틀 아래 공중파 방송에 다시 등장했다. 그 제목만으로 찬사가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전설을 노래하다’는 부제까지 달았다. 광고처럼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래도 7080세대를 우쭐하게 만들어준다. 가끔 한가할 때 ‘다시보기’를 통해 그 시절 좋아했던 노래 제목을 클릭한다. 본래가수보다 더 분위기 있게 노래를 잘 부른다. 게다가 똑같이 따라 부르는 모방이 아니라 자기만의 색깔까지 입혔다. 편곡이라고 하지만 거의 재창작에 가까웠다. 몇 곡을 섭렵하면서 처음에는 가수를 주목하다가 나중에는 편곡자의 이름에 시선이 꽂혔다. 소박한 원곡을 저렇게도 화려하고 아름답게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뽑아내는 그 안목과 솜씨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어느새 가수가 아니라 편곡자의 팬이 되어 있었다.

 

짜깁기로 새로운 경전을 재편집하다

 

노래뿐만 아니라 경전도 때로는 편곡수준의 편집 작업을 거치기도 한다. ‘형 만한 아우 없다’고 하지만 현실은 꼭 그런 것 만도 아니다. 중국에서 활동한 역경가들은 출신지역에 관계없이 한문번역문이 인도원문보다 내용과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였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과감하다고 할 정도로 가감(加減)을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짜깁기를 통하여 새로운 경전을 재편집하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부처님의 속뜻에 절대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사십이장경 편집이 이뤄진 중국 낙양의 백마사 

 

불교전래 초기에는 한 권의 특정한 경전번역보다도 불교전반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개론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경전번역이 더욱 시급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 요구를 충족할 만한 적당한 경전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재편집이라는 방법을 도입했다. 기존의 자료 속에서 불교의 핵심이 될 만한 내용을 따로 추렸다. 

 

드디어 42가지 주옥같은 경구를 취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사십이장경』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역경&편집자는 중인도 출신의 축법란(竺法蘭)과 가섭마등(迦葉摩騰)이라고 전한다. 편집 장소는 중국최초의 사찰인 낙양의 백마사(白馬寺)였다. 서기 67년의 일이다. 현재 해인사 팔만대장경(K19-865)에도 수록 되어 있다. 뒷날 학자들은 이를『고형본(古型本) 사십이장경』이라고 불렀다.

 

마조 선사의 제자그룹이 편곡솜씨를 선보이다

 

1933년 발견된『보림전』권1의 앞부분에는『사십이장경』이 수록되어 있었다. 보통 필요한 것만 부분적으로 인용하던 통례를 깨고서 전문을 통째로 끼워 넣은 상태였다. 801년에 편집했다는 간기(刊記)에 의거한다면 그 무렵 편입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니 기존『사십이장경』과는 달랐다. 엄청난 ‘편곡작업’을 거친 새로운 물건이었다. 『보림전본 사십이장경』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름을 얻게 된 연유이다. 

 

‘편곡’기간은 육조혜능 열반(712년) 이후『보림전』이 등장할 때까지 80여 년이다. 편곡자는 물론 마조(馬祖, 709~788) 선사의 제자그룹이었다. 기존『사십이장경』을 선종의 안목으로 다시 재구성한 것이다. 최종 완성판은 혜거(惠炬혹은 智炬) 선사가 마무리를 지었다. 격외(格外)도리를 일삼는 선사들의 가풍답지 않게 이상하리만치(?) 이 경에 집착한 이유는 ‘최초의 선어록’으로 간주한 까닭이다. 물론 원저자는 ‘구담 실달(瞿曇悉達: 고타마 싯타르타 음역) 선사’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는 선종의 대의명분과 역사적 정통성을 염두에 둔 일종의 선종적 교판(敎判)이라 하겠다.

 

오십대를 위한, 이십대 시절의 노래에 열광하다

 

20대 때는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밖에 없었다. (물론 그 시절에는 젊음이 참으로 큰 재산인 줄도 몰랐지만….)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은 불확실성 그 자체였다. 그야말로 밀리언셀러 책 제목처럼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되뇌어야만 하는 흔들림밖에 없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들의 시대마저 참으로 암울하다고 여겼다. 어떤 세대건 자기시대가 가장 어려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자기시대 외 다른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비교대상이 없으므로 ‘진짜 그 시대가 다른 시대보다 유별나게 어려웠던가?’하는 것은 그 누구도 절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불안한 청춘과 불안한 시대를 위로해주는 노래에 열광했다. 그 유일한 돌파구에 더러 금지곡 딱지가 붙기도 했다.

 

7080노래가 30년 전의 오리지널 기조를 포기하고 ‘불후의 명곡’으로 다시 편곡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어른이 되었고 ‘열심히 일한 당신’으로 살아온 덕분에 50즈음에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 그리고 심리적 여유가 생겼다. 기득권층이 되어버린 그 세대는 엄청난 구매력을 갖춘 거대한 소비 집단을 겸하게 된 것이다. 청춘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옛 노래들이 부활하면서 시장을 형성했다. 이십대 시절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오십대인 현재를 위한 노래였다. 대대적인 편곡이 이루어졌고 화려한 무대에 올려진 ‘신7080노래’에 그들은 또다시 열광했다.

 

최상승을 위해『사십이장경』을 리노베이션하다

 

‘67고형본’은 ‘801『보림전』본’으로 다시 편곡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지 700여년 만에 불교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진 탓이다. 수레는 이미 소승 대승을 거쳐 최상승(最上乘)이라는 상표를 달고 있었다. 소박한 모습의 후발주자인 선종이 중국 불교계를 완전히 평정하면서 거대한 주류 교단이 된 것이다. 인도불교를 넘어선 완전한 ‘창조불교’였다. 그래도 초심을 늘 견지하고자 애썼다. 최초어록『사십이장경』을 정체성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커져버린 몸에 맞을 수가 없었다. 최상승에 걸맞은 과감한 ‘리노베이션’ 작업이 뒤따랐다. 

 

더불어 어떤 장(章)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구절까지 추가로 덧붙여, 그 속내를 감추지 않는 절대 자신감을 함께 드러냈다.

 

“악한 사람 백 명에게 공양하는 것이 착한 사람 한 명을 대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착한 사람 천 명에게 공양하는 것이 오계(五戒)를 받은 사람 한 명을 대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중략)

일억 명의 아라한에게 공양하는 것이 연각(緣覺) 한 명을 대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중략)

천억의 삼세제불에게 공양하는 것이 제대로 공부한 선사(禪師) 한 명을 대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飯千億三世諸佛不如飯無念無住無修無證之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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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원철 스님은 해인사,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연구하고 강의했다. 그리고 일간지와 교계지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로써 주변과 소통해왔다.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절집을 물고 물고기 떠있네』등 몇 권의 산문집을 출간했다. 번역서에는『선림승보전』상·하가 있으며, 초역을 마친『보림전』의 교열 및 윤문작업 중이다.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해인사승가대학 학장(강주) 소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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