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불교윤리 ]
현대사회에서 불교윤리의 역할과 가능성을 모색해 본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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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 2025 년 12 월 [통권 제152호] / / 작성일25-12-04 10:22 / 조회19회 / 댓글0건본문
불보살의 가피로 정통 불교 교양지 『고경古鏡』의 필진에 합류한 뒤 <현대사회와 불교윤리>란 제하의 연재를 시작한 지 어느덧 2년, 아쉽지만 작은 매듭을 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 나름대로는 2,500년 역사의 불교가 오늘날의 사회적 쟁점들과도 얼마든지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오래된 미래의 지혜와 자비의 보고寶庫임을 상기시키고자 했으나 의도한 목적을 얼마나 달성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평가는 오롯이 독자들의 몫이겠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는 않다. 그동안 다뤘던 주제들을 잠시 되돌아본 다음, 불교윤리에 대한 관심의 환기가 한국불교의 미래에도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어봤다.
다양한 사회적 쟁점과 불교윤리의 관계 소개
처음 다룬 주제는 ‘불교와 자살’이었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어느 큰스님의 충격적인 자화장自火葬 소식이 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아름다운 자살도 없고, 위대한 자살도 없다고 단단히 못박았다. ‘동물권리의 시대와 불교의 동물 49재’에서는 반려동물 가족이 1,500만 명이나 되는 시대에 불교가 동물에 대한 관심과 함께 동물관련 제사 의례를 고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라고 말했다.
‘지나친 육식과 불편한 채식 사이에서’는 인간의 밥상에 오르는 고기들의 짧은 삶을 살펴보고,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지나친 육식은 점차 줄이고, 다소 불편하더라도 채식은 조금씩 늘려가는 음식문화의 개선을 제의했었다.

‘불교의 성, 인간의 성’에서 우리는 현대인들의 성의식에 걸맞는 불교의 태도 변화가 요청된다는 데에 인식의 공감대를 가졌다. 그런 차원에서 남녀의 건강한 만남을 주제로 삼은 ‘나는 절로’와 같은 새로운 형식의 템플스테이는 박수를 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칭찬했다. 이어서 불교와 동성애의 문제도 다뤘다. ‘불교전통과 동성애의 관습’은 불교의 역사에서 동성애가 일방적으로 비난받은 것만은 아니며, 지역이나 전통에 따라 도덕적 평가가 달랐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공지능(AI)과 자비윤리’에서는 인공지능의 등장과 인류사회의 미래에 대한 불교윤리적 전망을 제시하면서 불교적 인공지능, 즉 자비로운 알고리즘의 개발을 염원했다. ‘업과 윤회의 일상적 의미’에 대해서도 살펴봤다. 현대인들에게 업과 윤회는 과거반성적인 숙명론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풍성한 도덕적 원천으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이른바 ‘먹방’의 만연시대를 꼬집기도 했다. ‘먹방의 시대-불교적으로 먹고, 윤리적으로 살기’가 그것이다. 불교적으로 가볍게 먹기와 윤리적으로 당당하게 살기를 주문했다. 불자라면 누구나 수지독송하는 ‘불자오계와 서양윤리의 가상대화’도 시도했다. 윤리적 갈등상황에서 누구나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결론은 오계의 일상적 준수가 정답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서양윤리학에서 말하는 공리주의적 입장도 불교의 오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는 와중에 2024년 12월 3일 밤 난데없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개인적으로는 45년 만에 겪는 아픈 트라우마의 재발이었다. 비상계엄령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1980년 이른 봄 나는 자원입대로 군복무를 시작했다. 광주의 비극과 아픔을 진해 해군훈련소에서 심각하게 왜곡, 조작된 국방늬우스로 들어야 했다. 작년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 소식을 듣자마자 책가방을 싸서 귀가하던 내가 용산 대통령실 앞을 지나면서 손가락과 주먹으로 쌍욕을 했던 기억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 것 같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직사회의 뿌리 깊은 연고주의와 엘리트 공무원들의 선민의식에 대해 3회에 걸쳐 긴 글을 썼던 기억도 아프게 떠오른다. ‘시대착오적인 연고주의와 그 폐해’에서는 아직 탄핵당하기 전인데도 윤석열 대통령과 그 동조자들에게 겁도 없이 강도 높은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일부 지역에서 『고경』 편집부로 항의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고 전해들었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인 윤석열을 정점으로 한 검찰조직의 권력사유화가 비상계엄령 선포라는 엄청난 역사적 헛발질의 토대가 되었다고 비판했던 것 같다. 이면에는 유교적 공직문화의 영향을 받은 가족 패거리 의식이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다른 한편, 일반시민들의 높은 교양 수준과 깨인 민주정치의식이 윤석열 대통령의 친위 쿠테타 음모를 막은 일등 공신이라는 점도 부각시켰다.
뒤이어 ‘공公과 사私의 윤리’ ①, ②에서 한국공직사회가 ‘공(impartial)’과 ‘사(partial)’의 문제를 얼마나 안일하게 인식하고 있는가와 유가 윤리의 ‘사私’적 윤리전통이 미친 부정적 영향에 대해 무거운 마음으로 톺아봤다. 우리나라의 불교전통에서도 문중의식으로 대표되는 사적 윤리문화가 사부대중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시에 서양철학의 ‘사’적 윤리전통에 대해서도 개략적으로 다루었다. 우리가 평범한 인간인 이상 완전한 의미의 ‘공’적 사고와 이에 따른 ‘공’적 행동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적 친분관계를 중시하는 가족주의적 패거리 문화는 퇴행적 도덕의식의 대표적인 사례임을 거듭 일깨워주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불교의 전개과정에서는 ‘공’과 ‘사’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 무분별적 윤리전통이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들을 강조하면서 불교윤리의 기본인식은 12·3 비상계엄령과 같은 권력 오남용을 결코 용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었다.
‘도덕적 무지와 도덕적 책임의 문제’에서도 비슷한 역사의식을 피력한 바 있다.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책임은 소속 공동체의 직, 간접적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아돌프 히틀러의 전쟁범죄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듯이 도덕문화와 개인 행위의 관계는 그것의 관련성과는 별도로 구체적인 행동을 한 개인에게 언제나 엄중한 책임을 물어왔다는 사실도 거듭 환기시켰다.
이럴 때일수록 불교윤리적 삶을 살기 위한 일반 재가불자들의 인식변화와 더불어 태도의 전환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진 지금 ‘불교와 여성’을 다루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불교 경전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언급도 있지만, 동시에 여성과 남성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언급들도 많다. 그런 만큼 불교가 여성을 포함한 인간일반의 영원한 친구이자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지평을 함께 넓혀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불교와 전쟁의 관계를 살펴본 ‘갈등해결과 전쟁방지를 위한 불교적 해법’은 불교가 폭력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가와 불교의 역사에서 전쟁과 폭력이 결코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붓다의 육성 그대로 “승리는 증오를 낳고, 패자는 고통 속에 산다. 고요한 자의 행복한 삶은 승리와 패배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SN.Ⅰ.83; Dhp. 201).”는 가르침에 따라 살 것을 요청했다. 무엇보다도 붓다는 현실적인 조건의 한계와는 별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비폭력, 평화주의자였음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사회도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만큼 노인 세대가 겪는 삶의 질과 관련된 죽음 방식의 선택 문제도 불교윤리의 주요 관심 대상이다. 우리나라는 실정법상 안락사 또는 존엄사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불치병 말기 환자들의 인권 또한 인간의 기본권에 속하는 대단히 중요한 쟁점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안락사나 존엄사의 문제는 법적 제한과 관계없이 조만간 시급한 사회적 현안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붓다 당시에도 늙고 병든 비구들의 자살이나 안락사가 승가의 쟁점이 된 적이 있었다. 이제 한국불교도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입장 정리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스스로 곡기穀氣를 끊는 단식 존엄사’에서는 최근에 있었던 대만의 저명한 재활의학 전문의이자 종합병원 의사인 비류잉이 자신의 어머니가 선택한 단식 존엄사의 실행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책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했던 환자의 결연한 의지 앞에서 온몸이 숙연해짐을 느꼈다. 이와 함께 자이나교의 단식 존엄사 전통인 살레카나를 되돌아봄으로써 불교적 존엄사의 이론적 배경이 될 가능성을 검토해 봤다. 65세 이상의 노인 연령에 속한 나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요즘 유행하는 선명상도 빼놓을 수 없었다. ‘선명상의 시대, 선禪의 윤리를 생각하다’에서 나는 선명상의 상업화 분위기를 경계하면서 선명상에도 선의 ‘윤리’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선명상 본래의 윤리적, 해탈적 지향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잠시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본다.
요즘 엣지 있는 국내외 청장년층들의 고급 취향이 되고 있는 ‘플로깅(plogging)’도 다뤄봤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단순한 행동 속에서 오히려 불교윤리의 현실적 실천방안을 모색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플로깅(plogging) 운동에서 불교윤리의 미래를 엿보다’를 통해 나는 심오한 사고를 넘어 단순한 행동이야말로 우리의 불교윤리적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멋진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선택한 작은 행동 하나가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이미 대승보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새삼스럽지만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전통불교와 참여불교’에서는 얼마 전에 작고한 동물생태학자이자 세계적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의 일생이 어쩌면 참여불교의 미래 모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봤다. 모든 것이 인드라의 그물망처럼 촘촘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이때, 불교의 비폭력 전통은 미래사회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도덕적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날이 갈수록 불교의 가치가 더욱 빛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다.
인공지능(AI)의 시대, 불교적 휴머니즘이 대안이다
성큼 다가온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우리는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인 불교윤리의 역할과 기능을 새삼 곱씹어보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불교가 기존의 사회적 쟁점들을 해결할 능력 못지 않게 ‘인공지능 시대의 휴머니즘’으로도 얼마든지 작동할 수 있다고 보고 싶다.
이와 관련하여 태국의 불교 철학자인 소랏 헝라다롬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 인공지능(AI)의 기술적 특성을 ‘자비로운 알고리즘(merciful algorithm)’으로 성격규정한 바 있다. 그것은 이른바 ‘기술적 탁월성(technological excellence)’과 ‘윤리적 탁월성(ethical excellence)’을 두루 갖추고 ‘기계의 깨달음(machine enlightenment)’을 구현하는 인공지능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그는 불교적 인공지능 기술은 세상의 평등과 정의를 창출하기 위한 공동선의 바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불교의 ‘연민(悲, karuṇā)’ 개념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우리의 윤리적 행동에 지혜롭게 적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 기술을 열망한다. 인공지능이 말 그대로 자비로운 것이 되려면 알고리즘 설계자가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원력과 실천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소랏 헝라다롬이 말하는 자비로운 인공지능은 AI 기술을 둘러싼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인 ‘테크노쇼비니즘(technochauvinism)’과 ‘테크노포비즘(technophobism)’ 사이의 중도를 모색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처럼 불교윤리는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고유의 지혜와 자비에 바탕을 둔 휴머니즘의 역할과 기능을 다할 충분한 잠재력을 갖춘 위대한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끝으로 불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소회를 덧붙이는 것으로 지난 2년 동안의 연재를 기분 좋게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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