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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성철 스님 열반 25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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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8 년 10 월 [통권 제6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99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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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집에 불 났습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스님 집에 불 났습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스님 집에 불 났습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세 번 크게 외치며 스님의 법구를 모셔놓은 연화대에 불을 붙였습니다. 모여든 수많은 참배객들이 염불하는 사이 연화대는 점점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1972년 1월 출가하고자 돌로 만든 백련암 계단에 올라서며 “깨치지 않고서는 내려가지는 않으리라!”며 다짐했습니다. 그 다짐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1993년 11월4일(음력 9월21일) 아침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습골拾骨을 마치고 입적하신지 두 번째 추모재가 가까워질 무렵 ‘사리친견법회’를 봉행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배객들이 밀려들었습니다. 채 열흘이 지나지도 않아 새벽 3시부터 참배객들이 왔습니다. 참배객들을 감당할 수 없어 다섯 번째 추모재를 마친 뒤 “내년 4월에 다시 사리친견법회를 개최한다.”고 공포했습니다. 겨울 날씨에 혹 사고라도 날까 봐 사리친견법회를 중단했습니다. 다음해 4월 “한 달 동안 사리친견법회를 개최한다.”고 알렸음에도 지난 12월의 열기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것을 그때 깊이 느꼈습니다.

 

소납이 큰스님을 곁에서 시봉하고 있을 때, 스님과 신도들이 “언제 선방으로 공부하러 갑니까?”라는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출가 후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큰스님이 열반에 드시면 그날로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자유롭게 백련암을 떠나 제방 선원을 다니며 정진할 생각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그때부터 자유롭게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그날부터 양 어깨에 무게를 모를 무거움이 느껴졌습니다. 그 무게는 지금도 가벼워지지 않고 있어, “내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을 때때로 합니다.

 

큰스님께서 떠나신 뒤의 25년을 되돌아보면 주명덕 사진작가가 먼저 떠오릅니다. 큰스님을 촬영해 사진집 『포영집』을 출간해 주셨고, 김호석 화백을 소개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김 화백은 진영뿐만 아니라 큰스님의 모습 수십 점을 그려주셨습니다. 1995년 3월 예술의전당에서 ‘주명덕 사진전 및 김호석 수묵화전’을 열었습니다. 당시 그 전시회에 경북고 동창생 이효신도 왔습니다. 졸업 후 몇십 년 만에 만난 회포를 이야기로 풀고 헤어졌는데, 저녁 무렵 그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미술에 관심 이 있어 조각가 몇 분을 압니다. 몇 분을 추천할 터이니 스님이 선택하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강대철 조각가를 소개받았습니다. 지금 백련암 고심원에 앉아있는 존상, 겁외사 마당에 모셔져있는 입立존상, 성철스님 기념관에 봉안되어 있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큰스님 설법상, 기념관 석굴안의 1230좌座의 청자불감과 1230위位의 금동불상, 1000위 아미타 토조상, 1000위 약사여래 토조상, 1200위 미륵불 토조상, 기념관 입구의 금강역사상, 아홉 마리 용조각상 등이 강태철 조각가의 열정이 담긴 작품들입니다.

 

제일 숙원 사업이었던 큰스님 사리탑 조성은 당시 동국대 황수영 교수님, 정영호 교수님, 김동현 문화재연구소장님을 지도 위원으로 모시고 의견을 청했습니다. “우리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성철 스님 사리탑에는 조각을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조각을 잘해도 옛 솜씨를 따르는 장인이 지금은 없습니다. 둘째, ‘우리 스님 최고’라는 식으로 탑을 5층탑, 9층탑으로 높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오히려 성철 스님의 덕을 감하게 될 것이니 될수록 낮게 하십시오. 셋째, 전통을 계승하되 우리시대의 조형언어로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우여곡절 끝에 사리탑 자리가 결정되고, 세 분 전문가들의 지도로 ‘퇴옹당 성철대종사 사리탑 설계현상공모’를 했습니다. 응모작 30여 점 중에서 당선작이 없어, 우수작 세 편·가작 두 편에게 현상금을 주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당선작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는데, 주명덕 사진작가님이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재은 작가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를 찾아가는 선의 공간’이라는 사리탑이 완성되었습니다.

 

큰스님 열반 25주기에 돌이켜 보면, 우리시대 전문가들의 참여와 안목 속에 추모불사들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무엇보다 감사해야 할 대상은 신도 분들입니다. 25년 동안 불사에 관심을 가져주셨고, 백련암 3,000배 · 아비라 기도에 변함없이 동참해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7년 4월 ‘KBS 다큐공감’에 방영된 「3000배! 나의 기도」라는 제목의 방송은 지금도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3년 전부터 1년에 3∼4회씩 10,000배 참회기도를 정기적으로 진행 할 수 있게 된 것 역시 신도님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각각의 신행 시간은 60년 · 50년 · 40년 · 30년 · 20년 · 10년 등으로 달라도, 긴 시간 큰스님의 덕화德化에 의지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들 같다고 여겨집니다. 변함없이 신행 · 수행하고 계시는 신도님들께 참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큰스님 열반 25주기를 맞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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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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