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
“내 ○은 매일 아침 부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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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8 년 9 월 [통권 제65호] / / 작성일20-07-17 10:17 / 조회6,740회 / 댓글0건본문
내가 나를 사랑할 순 있어도 내가 나로 인해 마음이 상하지는 않는다. 내가 나를 미워할 순 있어도 내가 나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질투는 희한한 감정이다. 내 것인데도, 나를 죽인다.
물론 질투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자들의 숙명이다. 눈깔이 바깥으로 뚫린 짐승들은 항시 엿보거나 노려보거나 훔쳐보면서 살도록 되어 있다. 제대로 보지를 않으면서 언제나 남 탓이다. 그들은 한눈을 팔거나, 정말로 한눈을 내다팔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 잠잘 때나 집을 찾고 영원히 잠자야 할 때나 내면을 찾는다.
#. 고암의 ‘무문’
최근 입적한 설악무산(雪嶽霧山, 1932~2018)이 불교신문 논설위원이던 1982년 2월, 조계종 종정을 지낸 고암상언(古庵祥彦, 1899~1988)과 신춘(新春) 인터뷰를 진행했다.
= 큰스님들이시어, 어디로 가셨사옵니까?
마지막 당부를 청하는 질문에 고암은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 속히 사바세계로 돌아오시어 어리석은 우리 중생들을 보살펴주소서!
“대도(大道)는 뒤로 보면 열려 있습니다. 앞으로 보니까 무문(無門)이지요.”
= 아침 식탁에 놓인 고등어 한 마리가 웃는 상이다. “자, 어쩔 테냐.”
집을 나서면 얼굴들이 밀려온다. 모르는 얼굴들의 출근길을 지나면 아는 얼굴들의 사무실이 나타난다. 늙은 얼굴과 젊은 얼굴이 적절히 배열되어 있다. 까만 얼굴과 하얀 얼굴은 거의 만날 일이 없는 직업이다. 다들 노란 얼굴들이고 대부분 노랗게 뜬 얼굴들이다. 사회생활은 먹고살자는 것이지 같이 살자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남녀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냥 화장한 얼굴과 화장 안한 얼굴로 나누는 편이다.
나는 성실한 직장인이며 근무 중에는 무성애자가 된다. 나를 좋아하는 얼굴이라면 못생긴 얼굴이어도 좋아한다. 예쁜 얼굴이라 봐야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 얼굴이다. 외근을 할 때에도 나는 묶여 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웃어주거나 일부러 찡그리면서 뭔가를 기대한다. 내게 살가운 얼굴들과 적대적인 얼굴들의 난립 속에서, 나는 어떤 얼굴로 서 있는 게 좋을지 늘 고민한다.
퇴근시간이 되면 또 다시 얼굴들이 밀려온다. 그들은 하나같이 죽상이고 또한 죽상이었지만, 나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울상도 어쩌면 하나의 순박한 얼굴일 수 있는 것이다. 사이사이 멋진 뒤태들이 있는데, 자신들이 그리 의도하지는 않은 매력이다. 뒤통수에 눈이 달려있지 않아서, 억지로 웃거나 우는 척하지 않아도 되는 가석방들. 이 세상 모든 뒷모습엔 적의(敵意)가 없다. 그리고 이럴 때나 뒤로 보게 된다. 오늘 나도 적지 않은 이들에게 앞모습이었겠구나.
●
싸우는 게 힘들어서
눈을 질끈 감았는데,
말로 하면 풀릴 것을
주야장천 박치기네.
#. 춘성의 ‘팩트폭격(?)’
불혹(不惑)을 한참 넘었건만 인생이 그다지 신통치는 않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대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더 이상 ‘정의’라는 개념에 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의(敵意)’를, 술 취한 조물주가 잘못 표기한 것이다. 스스로 “청정하다”는 자들은 행여 자신들의 몸이 더러워질 때를 대비하여, 항상 입에 걸레를 물고 있다.
춘성창림(春城昌林, 1891~1977)이 어느 날 전철을 탔다. 객차 안에서 ‘불신지옥, 예수천국' 피켓을 들고 전도를 하던 개신교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 운문 선사는 “도(道)는 똥 막대기에도 있다”고 말했다.
“스님, 죽은 석가모니 따위 믿지 말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래야 천국 갑니다."
= “도를 아시느냐”고 물으며 접근하는 사람들이, 나는 똥차처럼 무섭다.
춘성이 물었다. “부활이 뭐요?”
= 대학 시절, 벤치에 혼자 앉아 있으면 1년에 두 세 번은 전도를 당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오. 석가는 다시 살아나지 못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셨소. 예수가 훨씬 위대하니 예수를 믿으시오."
= 내가 만난 크리스천들은 거의가 선량했으나, 나는 선행을 베푸는 사람보다 가만히 내버려두는 사람을 더 선호하게 생겨먹었다. 아이를 어려서부터 집에 혼자 두면 나중에 큰일 난다.
춘성이 되물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게 부활이라… 이 말이오?”
= 굳이 당신이 개입하지 않아도, 이 지옥은 반복되리라.
“그렇소."
= 심지어 어떤 젊은 여자는 “그분을 믿어 달라”며 내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다.
춘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질렀다.
“그럼 너는 내 좆을 믿어라!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죽었다가 도로 살아나는 것은 좆밖에 보지 못했다. 더군다나 내 좆은 매일 아침마다 부활한다. 예수가 내 좆하고 같으니 너는 내 좆을 믿어라!"
=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다”며 그녀를 겨우 돌려보냈다.
나의 불교는 반(反)기독교에서 출발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아버지’란 말에 손쉽게 결론을 내렸다. 내 아버지도 못 믿겠는데 어떻게 남의 아버지를 믿으라는 건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친구가 필요했지 아버지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결코 행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인생이다. 삶이 너무 힘들 때에는 차라리 신(神)에게, 없는 신이라도 만들어서 의지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신세가 좀 나아진다 싶으면 잔뜩 움츠려서 떨던 나는 또 다시 피어나 일어섰다. ‘발기’라고 해도 좋다. 우리는 지금 좀 서먹하지만 반드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당신처럼, 힘이 없으면 절망했고 힘이 생기면 탕진했다.
나의 시간은 자주 흔들렸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던 자존감은 이제 너덜거릴 건더기조차 얼마 남지 않았다. 고작 폐타이어 하나 갖자고 아등바등된 지난날이 일견 한심하다. 그렇게 자아의 고갈과 범람 사이를 수없이 오가다 보니, 이제는 ‘좆같다’는 말이 단순히 욕설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나이고 싶지 않았던 나와, 내가 끝내 얻지 못했던 나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내가 시계불알처럼 덜렁거린다.
여전히 신을 믿지는 않는다. 아직은 살 만한 것이다. 그렇다고 나를 믿지도 않는다. 자식을 두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나’라는 건 관념이 아니라 철저히 현실의 영역이다. 믿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이번 생에 어떻게든 지켜내야 할 ‘물건’일 뿐. 거울 안에는 아버지가 아니지만 아버지가 되어버린 몸뚱이가 비친다. 용하다 용해! 그래도 나를 지탱하는 일부라고, 끼니도 안 되는 고깃덩이가 나를 보며 꼬리를 흔든다.
●
반성하지 마라.
패배했을 뿐이다.
비난하지 마라.
당신도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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