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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를 만들어 낸 불교의 바닷길 ]
말레이반도 부장 계곡의 잊혀진 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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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  2025 년 9 월 [통권 제149호]  /     /  작성일25-09-04 15:55  /   조회5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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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불교 교류사에서 육로만 강조하다 보니 바닷길의 존재는 무시하거나 간과한다. 그러나 바닷길도 엄연한 항로가 존재했으며 아무 길로나 가는 것이 아니다. 바람, 항구, 선편 등을 두루 고려하여 바닷길을 개척해 왔고, 이를 이용하여 불교 전파와 상호 교류가 이루어졌다.

 

본생담에 등장하는 황금의 땅 

 

초기 동남아시아의 해양실크로드는 오늘날처럼 믈라카 ‘해협海峽’이 아니라 말레이반도의 ‘지협地峽’을 통과하는 노선이었다. 끄라 지협을 관통해 동쪽의 시암만과 서쪽 안다만해를 연결했다. 선박 규모가 작고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한 조건에서는 지협이 안전했다. 

 

사진 1. 지정학적으로 동서 교차로에 위치한 말레이반도.

 

본디 이 지협은 말레이 원주민이 오랫동안 사용하던 노선이었다. 서쪽의 인도, 동쪽의 시암만(태국만)을 거쳐서 메콩강 하구와 연결되고, 베트남을 끼고 북상하여 남중국해에 당도한다. 지협은 접근이 용이한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다. 또한 말레이반도는 개미의 허리처럼 잘록한 곳이 많아서 강뿐 아니라 육로로 연결해도 쉽게 안다만 제도 해역과 시암만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부처의 〈본생담(자카타)〉에 일찍이 황금의 땅이 등장한다. 선장으로 등장하는 수파라가 보살이 황금의 땅으로 상인과 선원을 이끌고 간다. 〈본생담〉에서 ‘금의 섬(Suvarnadvipa, Island of Gold)’, ‘금의 땅(Suvarnabhumi, Land of Gold)’이 언급된다. 실제로 동남아시아의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 칼리만탄에서는 금이 산출됐다. 시암만 왓클롱톰(Wat Khlong Thom)에서는 페룸 파탄(Perum Patan, ‘위대한 금 대장장이’라는 뜻)의 존재가 확인된다. 남인도 타밀의 많은 상선이 금을 찾아서 동남아시아와 교역했다는 증거다. 

 

사진 2. 말레이반도의 고대 크라운하 추정도.

 

기원전 3~4세기부터 끄라 지협이 본격적으로 동서 문물을 실어 나르면서 장거리 교역은 지역 주민에게 사회·경제·정치적 영향을 남겼다. 인도는 마우리아 왕조, 중국은 한나라 때였다. 바닷길로 불교와 힌두교가 확산됐으며, 인도 브라만의 정치 시스템과 다양한 물질문화가 당도했다. 여행자와 상인은 몬순을 이용해 바다와 강을 항해했고 일상적으로 말레이반도를 가로질렀다. 말레이반도는 벵골만과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혁신의 허브이자 요람으로 부각됐다.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와 힌두교

 

말레이반도는 통일왕국이 아니라 항시국가였다. 항시국가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몇 개의 항구를 연결하는 연합체 성격을 지녔다. 우리로 치면 가야연맹 비슷한 성격이었다. 항시국가는 무역과 문화 교류에서 결정적 역할을 감당했다. 항시는 인도 자장권에 놓여 있었고, 인도 이주민이 정착했으므로 이식된 문화 덕분에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항시 구성원은 말레이 원주민이 바탕을 이루고 바다를 건너온 인도인이 공존하는 방식이었다. 

 

고대와 중세, 동남아시아에 인도 식민지가 건설된다. 그 식민지라는 것은 근대적 의미의 식민지와는 전혀 다르다. 종족 이동과 정착, 문명의 전파와 이식에 따른 정착촌의 성립을 뜻한다. 동남아시아 식민지는 대체로 인도 동해안에서 이주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오딧샤 상인들이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다.

 

사진 3. 말레이반도의 불상. 사진: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동남아시아와 인도의 무역 관계는 당연히 문명 교류를 수반했다. 불교와 힌두교,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 산스크리트 문자, 사원 건축 양식, 종교 의례 등이 교류 품목에 망라됐다. 사람 이름, 흔히 사용하는 어휘, 예술이나 공예품에서 인도의 흔적이 뚜렷하다. 불교는 지금도 미얀마에서 베트남까지 주요 종교로 남아 있으며, 발리섬처럼 힌두교가 주류인 곳도 산재한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인도에서 동남아시아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도 문명도 동방으로부터 받은 영향 덕분에 한결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지역 통치자들은 브라만이나 불교 승려를 초청해 정치적·개인적 안정을 꾀했다. 인도의 브라만 성직자, 불교 승려, 학자, 예술가, 상인 등이 끊임없이 말레이반도로 들어왔다. 지정학적 거리와 문화사적 요구에 의거하고 무역을 통한 거래 이윤 증대를 빌미로 인도인들은 말레이반도에 수시로 도착하였다. 말레이반도 동쪽 해안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배들이 당도하고 있었다.

 

백제와 연관된 랑카수카 

 

해양실크로드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항시국가 ‘낭아수국(狼牙脩國, 凌牙斯加, 랑카수카)’이다. 그 중요성이란, 중국 사서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백제 사신이 랑카수카 사신과 함께 등장한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랑카수카만이 중요하다는 관점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말레이반도 북부의 미얀마 접경지대, 동쪽으로 시암만 방향도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사진 4. 〈양직공도〉는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으로 백제를 포함해 12개국 사신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랑카수카는 양梁에 빈번히 사신을 보냈으며, 백제 사신의 행차를 그린 〈양직공도〉에 선명하게 등장한다. 랑카수카 이름은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했는데, ‘랑카(langkha)’는 ‘빛나는 땅’, ‘수카(sukkha)’는 ‘천복天福’ 또는 ‘지복至福’을 뜻한다. 고대 동남아시아의 인도화된 국가 중에 하나다.

 

문명사적으로 인도 자장권에 속하는 고대 말레이 힌두교-불교 왕국이었다. 정치·종교 등 구심점은 말레이반도 서쪽의 부장 계곡(Bujang Valley)에 집중되었다. 케다라고도 불리는 지역이다. 부장의 초기 탄생 역사 자체도 인도에서 건너온 세력에 힘입어 만들어졌다. 당대 주민 구성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상당수 인도인이 거주했을 것이다. 

 

인도 측 사료에는 케다로 등장하지만, 중국 측 사료에는 일관되게 ‘낭아수국’이라 언급한다. 526∼536년 무렵 양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양직공도梁職貢圖〉가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에 전해온다. 그 나라의 상황과 중국과의 왕래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양서』 「제이전」의 서술과 부합된다. 침향나무와 녹나무가 왕국에 풍부했다.

 

사진 5. 〈양직공도〉에 등장하는 랑카수카의 사신.

 

케다는 지리적·역사적 중요성만큼이나 문제가 많고, 발굴 유적지와 문헌 기록과의 불일치 등 논란을 남긴다. 상당한 발굴이 이루어졌으나 추가로 자료가 더 나올 지역이기 때문에 적어도 몇십 년 뒤에나 연구 진척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랑카수카-케다를 하나의 정치권력으로 묶어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오늘의 케다는 말레이반도에서 태국과 말레이 국경이 만나는 접경지대다.

 

초기불교의 중심지 부장 계곡

 

순가이페타니(Sungai Petani)에 있는 부장 계곡은 그 자체로 거대 힌두교-불교 유적군이다. 강가 옆에 건설되어 곧바로 안다만 제도를 통해 인도로 갈 수 있는 전략적 위치다. 산스크리트어에서 ‘부장가(bhujanga)’는 뱀을 의미하므로, 부장 계곡은 ‘뱀 계곡’이라는 뜻이다. 

 

케다 일원의 발굴을 통해 50개가 넘는 고분, 방파제 유적, 철 제련 장소, 다양한 벽돌 건축물이 밝혀졌다. 산스크리트 문자가 각인된 돌관과 서판, 금속 도구 및 장식품, 도자기, 힌두교 아이콘 등으로 미루어 보아 건설자들이 힌두교-불교를 매개로 한 인도의 문화와 정치 모델을 택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6. 브라흐미문자로 각인된 스투파(부장계곡, 5세기, Kolkata Indian Museum).

 

출토 유물은 인도아대륙의 팔라바 왕국, 촐라 왕국, 베트남의 푸난, 인도네시아의 스리위자야, 마자파히트 등 해상왕국이 시기를 달리하면서 모두 선보였다. 수마트라와 자바섬에 건설된 왕국들은 힘이 커질 때 말레이반도의 항시국가를 점령하여 식민거점으로 경영하였다. 그 결과 말레이반도에 다양한 지배층이 등장하고, 그때마다 해양 전략 요충지인 케다에서 교차하면서 이곳을 중국과 인도의 실크로드 중간 거점으로 활용했다. 

 

부장은 동남아시아 초기 불교의 중심지다. 발굴 도자편에 스투파가 새겨져 있고, 주변은 산스크리트어로 각인됐다. 남인도 그란타(Grantha) 문자로 450~500년으로 추측된다. 세베랑페라이(Seberang Perai)에서 발굴된 비석은 ‘위대한 바다 선장 부다굽타(the great sea-captain Buddhagupta)’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모든 수단을 강구해 … 성공리에 여행을 했다.”라는 내용이다.

 

사진 7. 부장 계곡에서 발굴된 1200년 된 불상.

 

비석은 1840년대에 케다의 무다(Muda) 강 주변에서 발굴됐으며, 주변에서 불교 사원터도 확인됐다. 무다 강 주변에서는 힌두 사원터도 다수 발굴됐다. 이로써 이 일대가 불교와 힌두의 본거지였음이 확인된다. 당 말과 오대의 도자기, 중동 이슬람의 유리그릇도 발굴됐다. 

 

부장 계곡의 중요성은 이미 7세기에 중국에서 인정받았다. 607년 수 왕실은 광저우에서 부장 계곡으로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다. 중국과의 직거래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졌고, 부장 계곡에서 다양한 불교문화가 중국으로 넘어갔다. 약 70년 후 중국 문헌은 부장 계곡을 지에투(羯茶, Jietu)로 기록한다. 688~695년 사이에 말레이 군도를 방문한 당의 의정義淨도 케다를 언급했다.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떠난 이후 671년경 천축으로 자신을 데려다줄 배로 갈아탄 그곳이다. 수마트라에서 직접 인도로 넘어가지 않고 부장 계곡을 거친 것은 그곳에 안전하게 개발된 항로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부장 계곡은, 해상운송로의 항구로써 당 도자기가 동경편銅鏡片과 함께 발견됐다. 아랍 유리와 페르시아산 청록색 도기도 발견됐다. 중국과 중동을 오가는 무역선의 수출입항으로 기능한 것이다. 10세기에 막강한 촐라 왕국의 군대가 스리랑카를 침략해 영토로 삼는다. 남인도 및 스리랑카와 국제 거래를 하던 케다는 촐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1086년 비문이 케다에서 발견됐다. 촐라 왕국이 말레이반도 케다를 거점으로 국제무역을 했다는 증거다. 케다 비문은 팔라바 문자로 기록됐다. 촐라의 쿨로툰가 촐라(Kulothunga Chola) 1세가 남겼으며, 남인도와 말레이의 무역 관계를 시사한다.

 

사진 8. 스리비자야 영향권이었던 말레이반도 차이아(Chaiya)의 관음보살상.

 

그런데 인도에 집중하던 케다의 태도에 변화가 감지된다. 힌두 중심의 왕국에서 이슬람 중심의 왕국으로 바뀐다. 국제 상인의 힘으로 이슬람 전파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케다 술탄국(吉打国, Kesultanan Kedah)이 1136년에 세워진다. 이에 힘입어 많은 아라비아 상인이 케다를 여행하며 기록을 남겼다. 케다 술탄국은 이전의 아홉 명 힌두 통치자에 의한 힌두교-불교 왕조를 청산하고 이슬람으로 재출발한 왕국이다. 항시국가에서 하나로 통일된 술탄국가가 성립된다. 그 결과 말레이반도에서 불교는 영구히 잊혀져갔다.

 

이처럼 불교 교류사에서 중간 거점이자 디딤돌인 말레이반도의 중요성을 재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말레이는 기본적으로 회교국가이다. 따라서 불교에 관한 깊은 연구도, 불교 유적에 관한 발굴 등도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진다. 자료도 빈약하고 불교연구사 자체가 미성숙이다. 한국에서 부장 계곡 등의 존재를 아는 이도 드물 지경이다. 의정 같은 선승들이 거쳐갔던 불교 교류의 길목인 황금의 땅 말레이반도를 기억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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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분과학문의 지적·제도적 장벽에 구애받지 않고 융·연구를 해왔다. 역사학, 민속학, 인류학, 민족학 등에 기반해 바다문명사를 탐구하고 있다. 제주대 석좌교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역사민속학회장,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POCC) 등을 거쳤다. 『마을로 간 미륵』, 『바다를 건넌 붓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등 50여 권의 책을 펴냈으며, 2024 뇌허불교학술상을 수상했다.
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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