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양기파 무문혜개의 법맥을 이은 신치 가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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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4 년 4 월 [통권 제132호] / / 작성일24-04-05 09:59 / 조회1,701회 / 댓글0건본문
일본선 이야기 4
임제종 양기파의 여러 지류 가운데 또 하나가 일본에 정착했다. 신치 가쿠신(心地覺心, 1207〜1298)의 홋토파(法燈派)다. 오조법연→개복도령→무문혜개의 법맥을 이었다. 그는 29살에 동대사에서 수계하고 일본 밀교의 성지인 고야산으로 들어가 진언과 선을 배웠다. 1242년에는 조동종의 개조 도겐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았다. 에사이의 제자인 샤쿠엔 에초(釋圓榮朝)의 가르침도 받았다.
무문혜개에게 인가 받다
가쿠신이 “불교의 대의,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가.”라고 묻자, 에초는 “인욕정진하고, 한 티끌의 보물도 모으지 말라.”라고 했다. 야마시나현 심행사心行寺의 대웅전 뒷마당 평상에서 주야로 좌선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밤, 흉중에서 수많은 작은 뱀들이 나오는 꿈을 꾸고 난 뒤 눈을 뜨고 나서 마음의 미망이 해소되고, 학문적으로 공부한 것이 최선의 법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鷲峰開山法燈圓明國師行實年譜』, 이하 『연보』) 그리고 엔니벤넨으로부터 송나라 유학을 권유받고 43살 때인 1249년에 입송했다.
벤넨으로부터 무준사범의 문하에 들어가도록 권유받았지만, 얼마 전에 열반하는 바람에 인연이 되지 못했다. 도장산, 아육왕산, 천태산, 대매산을 역방하며 여러 선지식들을 만났다. 그리고 마침내 1253년 호국인왕사에서 무문혜개(불안선사)를 면회했다. “나의 도 가운데에는 문은 없다. 어디로부터 들어왔는가?” “무문無門으로부터 들어왔습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가쿠신[覺心]입니다.”
그러자 불안선사는 게송을 지어 주었다. “마음이 바로 이 부처, 부처가 바로 이 마음. 마음과 부처는 여여하니 예나 지금이나 그러하구나[心卽是佛 佛卽是心 心佛如如 亙古亙今].” 인가한 것이다. 불안선사가 “너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라며, 부채를 주면서 “보았는가?”라고 하자 언하에 바로 깨달았다.(『연보』) 『원림어록月林語錄』, 『대어록對語錄』, 『무문관』 등의 선어록과 가사 한 벌을 주었다.
가쿠신은 다음해에 6년간의 수학을 끝내고 귀국했다. 금강삼매원의 수좌를 맡았다가 1258년 와카야마현의 현 흥국사 전신인 취봉산鷲峰山 서방사西方寺의 개산조가 되었다. 이 절엔 구마노 모우데(熊野詣)의 도상이 있어 순례객들이 반드시 들려 그를 배알하고자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순례의 의미가 없다고까지 알려졌다. 구마노 모우데는 일본 고대 신사로 유명한 구마노삼산(熊野三山)인 구마노혼구대사(熊野本宮大社)·구마노하야타마대사(熊野速玉大社)·구마노나치대사(熊野那智大社)를 참배하는 전통을 말한다. 구마노는 또한 보타락산으로 알려져 관음신앙의 성지이기도 하다. 고대로부터 많은 왕족과 귀족, 서민들의 순례 장소였다.
1281년에는 당시 일왕 자신이 거처하던 곳을 개조하여 만든 쿄토 승림사勝林寺의 개산조로 삼고자 했다. 그러자 그는 “빈도는 무덕하므로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다.”라며 사양했다. 1285년에는 내승상의 요청으로 교토 묘광사妙光寺의 개산조가 되었다. 훗날 가쿠신의 법손들은 주로 묘광사와 서방사의 주지가 되었다.
잇펜에게 영향을 미치다
이 외에도 다른 종파의 사람들과도 교류가 많았다. 특히 시종時宗의 잇펜 치신(一遍智眞, 1239〜1289)과의 관계는 각별하다. 염불춤으로 유명한 잇펜은 정토종의 호넨, 정토진종의 신란에 이어 일본 정토종의 3대 교단으로 정토교의를 깊이 발전시켰다. 평생을 길에서 보낸 정토염불자로 스테히지리(捨聖)라 불리며 민중과 함께한 조사다.
구마노에서 가쿠신과의 법거량 끝에 “세상을 버린 몸은 죽은 몸과 같고, 추위가 닥치면 바람이 스미는구나.”라는 시로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一遍上人行狀』) 잇펜이 “심신을 방하하여 무아무인無我無人의 법에 귀의하면, 자타피차의 인아人我는 없다.”라고 한 법어를 볼 때 가쿠신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잇펜의 제자들은 가쿠신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또한 조동종의 태조(고조는 도겐)로 불리는 케이잔 조킨(瑩山紹瑾)과의 교류에 관한 여러 설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나이 차로 볼 때 그 가능성은 없다. 그렇지만 가쿠신의 제자들이 조동종 문하에서 참선하기도 했다.
스승인 불안선사와의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한번은 수정 염주를 보냈는데 불안선사가 게송으로 화답했다. “백팔마니百八摩尼는 알알이 둥글고, 아득한 하늘 콧구멍은 일제히 뚫렸구나.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부처와 보살이 날마다 부르며 와서 한 우리에서 뛰는도다.”(『원형석서)』) 선사로서의 가쿠신의 품격과 교화의 능력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가쿠신 선사상의 성격은 어떤 것일까. 그의 행장이 보여주듯이 밀교는 그의 불법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서방사에는 광명진언이나 다라니를 외우는 일과도 기록되어 있다. 방편으로써 염불을 외도록 권하고 있기도 하다. 선정일치의 염불이다. 그러나 그는 삼론, 천태, 화엄, 진언, 염불, 율종, 선종 중에서 좌선이 가장 이익이 많다고 한다. 제법 가운데는 선문이 가장 수승하며, 그 까닭은 불심종佛心宗이자 대안락행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러 방편을 활용하는 중에도 선을 중심에 놓고 있는 것이다. 노닌이나 에사이가 그랬듯이 당시 선종은 고대의 천태종이나 진언종에 비해 그다지 세력이 활발하지 못했으며, 이행도인 정토종의 흥기로 인해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의 전통신앙이나 주변의 여러 불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왕족이나 귀족들의 호기심을 사게 했으며, 이를 토대로 민중으로까지 확산시키고자 했다. 이는 비단 가쿠신만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불법 교화의 대상은 지배층은 물론 모든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무자 화두와 좌선 중시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선은 불조의 혜명을 잇는다는 자부심과 독자성을 내세우며 약진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선사들의 독창적 사상도 만개한다. 『무문관』은 가쿠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송나라에서는 ‘조주구자화趙州狗子話’의 화두를 사용했다. 승림사에서는 『선요』를 강의하고 ‘무자無字’ 화두를 활용했다.
그는 화두선과 더불어 도겐처럼 철저한 좌선행을 중시했다. 그는 『좌선의』에서 “초심의 사람은 염기좌선念起座禪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 처음을 잘 보면 맑은 하늘에 처음으로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은 온 그곳이 없다. 단지 맑은 허공과 같다. 비유하면 진심은 허공의 청정함과 같다. 망념은 만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마음은 즉 체體다. 거목의 근본과 같다. 염은 즉 용用이다. 이파리·꽃·과실·색·향기와 같다”라고 한다.
좌선은 일체유심조를 맛보는 일이다. 또한 좌선은 마음을 보아 부처를 보는 행이다. 또한 “자심의 미혹함을 면하고자 한다면, 자심을 한결같이 깨달아야 한다. 자심을 알기 때문에 법계를 얻을 수 있다. 자심을 아는 것을 지자知者로서 부처라고 이름한다. 실로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마음은 멀리 있지 않다. 타인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다. 불과를 얻고자 생각한다면 능히 부처가 될 수 있다.”라며 좌선은 마음의 근본을 보는 행이며, 그것이 바로 부처를 친견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쿠신은 좌선을 최고의 공덕으로 치면서도 대중에게 재계齋戒공덕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사람으로서 계를 받지 않는 사람은 모두 육천 마왕의 권속일 뿐이다. 경에 설하기를, 중생이 불계佛戒를 얻으면, 그 위는 모두 부처와 같다. 참된 불제자가 된다. 만약 재계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제석 모두 권속과 함께 사바세계에 와서 지재持齋하는 사람을 수호해 주신다. 특히 육재일을 굳게 지켜야 한다. 그 까닭에 제석·제천 등이 야차신을 데리고 염부제에 내려와 우리들을 지켜주신다.”(『법어)』라고 하여 지계를 강조한다. 이는 일본 선종 조사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가쿠신이 활동하던 시대에 정토계는 자력으로는 구제가 불가능한 말법시대의 범부라는 인식을 통해 수계나 지계는 물론 보리심마저 버렸으며, 선택적으로 오직 타방정토에 왕생하는 칭명염불만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전통적인 대교단이나 조정으로부터 비난받으며 이단으로 몰렸다.
불교가 다양한 방편을 쓰는 것은 대승의 정신이지만, 지계는 초기불교이래 불교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었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선종계로서는 지계야말로 선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마음과 몸을 일치시키는 것은 선수행의 가장 큰 토대인 것이다. 가쿠신은 전통적으로 지계청정한 날로 삼은 육재일을 통해 처자나 권속, 집이나 재보를 버리기 어려운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불도에 인연을 맺도록 하고 있다. 지계는 마귀가 엄습하는 것을 막고, 재난을 피해 복덕을 줄 것이라고 설하기도 했다. 가쿠신이 왕족에게 삼계와 오계를 수여함으로써 마귀를 항복시켰다는 여러 설화가 『연보』에도 등장하는 것을 볼 때, 매우 효과적인 불법 유인의 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홋토파라는 명칭의 유래
가쿠신의 선은 세력이 확장되어 홋토파(法燈派)로 불린다. 훗날 가메야마 상왕이 홋토선사로, 고다이고왕이 홋토엔묘(法燈圓明) 선사로 시호를 내린 것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홋토파를 보화종普化宗이라고 한다. 여러 설이 있다. 중국 당나라 때, 광풍의 선사로 알려진 보화선사로부터 유래한다. 『조당집』이나 여러 전등록, 고승전에도 등장하며, 임제선사와도 법거량을 했다고 전한다. 묘지에서 살며, 밥 먹는 것이 당나귀처럼 보이고, 요령을 가지고 다니며 구걸했다. 임종 때는 관 하나를 부탁해 그곳에 들어가 입적했다고 한다.
이러한 보화선사를 흠모한 가쿠신이 16세 법손인 장웅張雄의 피리소리에 정신이 맑아져서 그를 따라가 기법을 전수받았다는 설이다. 장웅의 거사 제자들과 함께 일본에 귀국하면서 서방사에서 피리 부는 법과 선법을 널리 보급했다는 설이다. 이는 후대에 들은 것을 기록한 18세기의 『보화종 문답』에 의거한 것이다.
또 하나는 중세에 피리를 불며 전국을 방랑하던 허무虛無라는 승려를 따라 부랑자들이 모여들어 허무공적을 종지로 삼은 일파를 형성했는데 이를 보화종이라고 했다. 허무는 서방사를 본사로 했다. 근세에 이르러 서방사의 말사가 50여 곳이나 되면서 일대 세력을 형성했다. 에도막부는 통제를 위해 이 종파를 인정했다. 이러한 역사가 착종되어 여러 설화가 탄생하고, 결국 가쿠신 교단을 보화종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는 선종이 약동하는 삶의 활발발한 모습을 긍정하는 자세를 형성한 것과도 관계가 깊다. 알고 보면 생활종교인 것이다.
문화교류는 가쿠신이 송나라로부터 항주 경산사의 된장 제조법을 모방한 금산사 된장을 가져온 것을 들 수 있다. 나가노현의 안양사安養寺를 개창하여 신슈(信州, 나가노현) 된장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1298년 92세에 접어들었어도 그를 친견하고자 하는 승속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서방사 규법 7개조」를 정하여 유계로 했다. 열반하기 직전 위의를 단정히 하고 적연하게 단좌했다. 상좌가 “스승님께서는 마지막을 고하고자 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가쿠신은 “낙諾(그렇다).” 하고 열반에 들었다. 선의 명료한 가르침 그대로의 최후 모습이다. 그는 제도를 위해서는 무한 방편을 활용하고, 무명을 밝힐 때는 전광석화처럼 정곡을 찌른 선승으로 민중의 선지식이 되었다. 불법이 어떤 불모의 땅에서도 꽃 피울 수 있음을 이렇게 일본의 조사들은 증명해 간다. 이야말로 불법의 약동하는 생명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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