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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마음이 이해를 바꾼다 - 이해와 마음 그리고 돈오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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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5 년 7 월 [통권 제147호]  /     /  작성일25-07-05 11:23  /   조회1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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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성 관념이 장악한 이해’를 거부하고 ‘연기 사유에 따른 이해’로 바꾸는 역할은 무엇이 할까? 〈이해가 이해를 바꾼다〉라고 보기는 어렵다. 〈인종 차이에는 불변하는 동일한 본질이 있다〉라는 관점·견해는 ‘동일성 관념이 장악한 이해’에 해당한다.

 

이해를 바꾸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비해 〈인종 차이는 수많은 조건의 인과관계에 따라 생겨난 것이고 가변적이다. 동일한 본질이 나타난 불변의 것이 아니다〉라는 관점·견해는 ‘연기 사유에 따른 이해’에 속한다. 이 두 이해는 상반된 내용이어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이 자리에서 물러난다. 만약 〈이해가 이해를 바꾼다〉라고 한다면, 〈이해에는 본래 자기 부정의 면모가 있다〉라는 의미가 되어 이해에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게 된다.

 

‘이해’는 존재가 아니라 ‘조건들의 인과관계에서 발생한 현상’이다. 그리고 모든 조건은 변한다. 따라서 어떤 이해도 항상 변화에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이해라도 그 발생 조건들의 변화에 따라 변할 수 있다〉라는 것과, 〈이해에는 애초부터 상반된 내용을 발생시켜 자기를 부정하는 기능이 있다〉라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어떤 이해가 다른 이해를 만나는 것이 조건이 되어 다른 이해로 변할 수도 있다. 이 경우는 ‘이해를 변하게 하는 새로운 조건들이 형성되는 것’이지 ‘이해라는 존재가 스스로 다른 이해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는 분명 연기적 현상이다. ‘조건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조건들은 우연히 모이는 것일까? ‘이해를 형성하는 조건들’ 가운데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허다한 것이 사실이다. 이미 주어진 환경이나 신체적 조건들이 이해 형성과 변화의 강력한 요인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어진 조건들’이라도 우연히 인간의 이해 형성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해’와 ‘주어진 조건들’ 사이에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인과관계가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연기적 사유에 부합한다.

 

그런데 이해가 ‘주어진 조건들과의 인과관계’에 따라 수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일 뿐이라면, 숙명론적 결정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때 인간의 의지와 의도적 선택으로 삶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허탈하다. 자신이 선택하여 바꾸었다고 여기는 ‘이해의 변화’가 기실 ‘이미 주어진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예외 없는 우주의 이법이라면, 인간의 자기 결정권은 박탈당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이해에도 인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저 〈이미 주어진 조건들과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이야〉라고 말하면 그뿐이다. 이 결정론은 사실일까?

 

〈인간은 ‘이해를 형성하는 조건들’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인가?〉 - 이해를 바꾸어 삶과 세상을 바꾸려면 물어야만 하는 질문이다. 이해를 형성하는 많은 조건이 환경처럼 ‘주어지는 것들’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이해 형성의 조건들’도 있다. 특히 그 선택 가능한 조건들 가운데는, ‘이해 형성의 근원적·결정적 역할을 하는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을 선택하는 능동적 역량이 ‘이해를 수립·유지·수정·교체하는 근원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해의 수립·유지뿐 아니라 수정·교체를 가능케 하는 ‘이해 아닌 그 어떤 역할’은 인간 내면의 원초적 역량으로 존재한다. 그 역량은 무엇인가? 불교에서 거론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붓다의 가르침과 그것을 수용해 간 불교 전통, 특히 대승 유식학과 원효 및 선종이 부각하는 ‘마음의 세계’는 그 역량에 관한 통찰이다. 그러나 아비담마 유부의 마음 이해는 궤도 이탈로 보인다. 또 유식학의 청정무구식淸淨無垢識이나 원효의 일심一心, 선종의 〈마음이 바로 부처다[卽心是佛]〉라는 말을, ‘완결된 내용을 이미 갖추고 모든 현상을 초월해 있는 전능의 궁극 실재로서의 마음’에 관한 소식으로 읽는 것은, 마음에 관한 오해이고 근거 없는 망상이다.

 

부처님께서 머무렸던 기원정사의 여래 향실. 사진 : 서재영.

 

그런 신비주의 관점으로는 붓다와 불교의 마음 통찰을 감당하지 못한다.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이끄는 표지판들을 그럴듯하게 꾸며 세워 길 찾는 이들을 헤매게 한다. 마음 깨달음을 체득한 사람들의 마음 찬탄 수사修辭는, ‘망상 계열의 마음 국면’과 ‘그 계열에서 한꺼번에 빠져나온 마음 국면’의 천지 현격한 차이를 나름의 언어 자료에 담은 것이지, 불변·절대의 궁극 실재에 대한 증언이 아니다. 그런 실재는 원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초적 창발력創發力과 마음

 

생명현상의 전개 과정에는 ‘원초적 창발력’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초적 창발력이 어떻게 발생했고 언제부터 작동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지구 생명의 진화 계열에서 분명히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간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는 그 원초적 창발력의 전개 양상이 유별나게 고도화된 수준과 내용을 보여준다. 언어능력의 창발이 그 특이성의 분기점이다. ‘이해’라는 인간 특유의 현상은 이 언어능력에 수반하여 발생하였다.

 

붓다 이래 불교에서 주목해 온 ‘마음’이라는 현상과 능력은, 인간 생명의 진화 계열에서 작동해 온 ‘원초적 창발력의 표현’으로 보인다. 생명현상에서 목격되는 원초적 창발력의 인간적 작동 양상이 ‘마음’ 혹은 ‘마음 주관성’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마음’이라 부르는 원초적 창발력은 이미 완결된 내용을 갖춘 힘이나 존재가 아니다. 끊임없이 작용하면서 내용을 이루어가는 역동적 현상이다. ‘인간의 언어 면모와 이해 면모’는 ‘마음’에서 발생하여 역동적으로 고도화된 것이다. ‘이해를 수립·유지·수정·교체하는 근본 토대’는 바로 이 마음의 역동적 작용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마음의 전개 방향과 내용 구성에서 ‘근원적 선택력’을 지닌다. ‘근원적’이라 말한 것은, 현실의 마음이 과거부터 축적된 마음 내용과 경향성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내 마음을 뜻대로 바꾸기 어려워〉라고 할 때의 정황이다. 그러나 누적된 과거 내용과 경향성의 압도적 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제나’ 마음 국면과 내용을 이전과는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 가능성에 열려 있다. 붓다가 설한 선禪 수행의 요점을 담고 있는 알아차림[正知, sampajānāti], 이를 계승한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유식관唯識觀과 원효의 일심一心, 무념無念의 돈오頓悟를 천명하는 선종禪宗 선관禪觀은, 모두 이 ‘마음 구성의 능동적 가능성’을 겨냥하고 있다. 

 

불교는 ‘마음에 대한 통찰의 거대 체계’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에 관한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탐구가 켜켜이 쌓여 있는 보물 창고이다.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현대 물리학 이론은 물질 현상과 정신 현상의 상호 조건적 관계를 논하면서도 특히 ‘마음 주관성의 역할’을 주목한다. 〈양자 역학에서는 관측자가 측정 결과의 범주를 설정하고 그 범주 안에서 대상의 모습이 나타난다. 관측자의 의도와 무관한 객관 대상은 없다. 현상은 대상 자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이 객관과 어떤 연기적 맥락을 형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주1)

 

〈관측자의 의도가 설정한 범주에 따라 대상의 모습이 나타난다〉라는 말은, 〈물질 현상과 객관 대상에 대한 인간의 인지에서는 마음 주관성의 선택 역할이 결정적이다〉라는 의미로 보인다. 객관적 조건들이 ‘마음 주관성의 선택’과 결합할 때라야 비로소 ‘물질이나 대상’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정신 현상과 물질 현상의 ‘상호 조건적 관계’에서 인간 주관성의 선택이 궁극 역할을 한다는 불교 유식사상과 통한다. 〈오직 ‘마음 주관성[識]’에 의한 구성이지 ‘마음 주관성과 무관한 대상[境]’은 없다〉라는 것이 유식무경唯識無境의 통찰이다. 연기緣起(조건에 따른 발생)와 마음 주관성에 관한 불교의 통찰이 첨단 물리학의 관점과 상통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탐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붓다에 의하면,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발생시키는 조건들[緣] 가운데 특히 ‘알음알이 능력[意根]’의 역할이 근원적 결정력을 지닌다. 이러한 통찰을 계승하여 대승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알음알이 현상[識]’의 대상 구성력[唯識無境, 萬法唯識]을 강조한다. 아울러 ‘알음알이 현상[識]’을 다양한 층위의 유형별 특성으로 분류하면서 알음알이 체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필자가 ‘마음’ 혹은 ‘마음 주관성’이라 부르는 현상은 〈‘알음알이 능력[意根]’에 의한 ‘알음알이 현상[識]’〉을 총괄하는 용어다. 원효의 ‘하나처럼 통하는 마음[一心]’, 선종 선문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사람의 마음[人心]’은 모두 〈‘알음알이 능력[意根]’에 의한 ‘알음알이 현상[識]’〉에 관한 붓다의 깨달음을 잇고 있다.

 

언어능력과 이해 그리고 ‘마음 돈오’

 

‘현상의 법칙·질서·이치에 대한 포착 능력’인 이해理解(understanding)는 ‘비교된 차이들의 질서와 법칙에 대한 인지’다. 다시 말해, 이해는 ‘언어·개념에 담아 재처리된 차이들에 대한 법칙적 인지’인데, 이 이해 능력의 핵심은 ‘인과관계에 대한 포착 능력’이다. 〈해가 뜨면 밝고 해가 지면 어둡다〉, 〈걸어가면 늦게 도착하고 달려가면 일찍 도착한다〉라는 경험 차이를, 인간은 ‘원인과 그에 따른 결과’라는 법칙으로 포착한다.

 

인과관계를 포착하는 이해 능력이 발현되자,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는 ‘논리(logic)’가 발전하였고, 뒤이어 논리의 체계인 ‘이론理論(theory)’이 등장하였으며, 이에 상응하여 비교·판단·평가·종합·분석·추론 등의 능력이 더욱 고도화되었다. 언어능력의 고도화 과정에서 인간이 확보한 ‘법칙 포착 능력’은 ‘인과관계에 대한 포착’을 근간으로 삼아 그 내용이 풍요로워진 것이다. 이러한 이해 현상을 발현시킨 것이 언어능력이고, 언어능력은 ‘마음으로서 구현된 생명의 원초적 창발력’이 창발한 것이다. 따라서 언어능력과 이해는 근원적으로 마음을 원천으로 삼는다.

 

욕망과 행위, 감정과 인식 등 인간의 모든 경험 현상은 ‘이해와 마음’에 연루되어 있다. 인간의 경험은, 아무리 본능에 영향을 받는 것일지라도, ‘본능적 범주’가 아니라 ‘인식적 범주’가 된다. ‘인식적’이라는 말은, 〈차이들을 언어로 분류한 후 비교·판단·평가·기억·분석·추론하여 이해한 것에 연관된다〉라는 뜻이다. 인간의 경험이 ‘본능적 범주’를 넘어 ‘인식적 범주’가 되는 것은, ‘언어에서 비롯된 이해’와 ‘이해를 수립·관리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해와 마음이 인간의 모든 것을 ‘인식적’이게 만드는 원초적 조건이다.

 

붓다 이래 해탈·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불교 수행은 ‘세 가지의 향상 노력[三學]’을 축으로 삼고 있다. ‘이해 수행[慧學]’과 ‘마음 수행[定學]’ 그리고 ‘행위의 윤리적 향상 수행[戒學]’이 그것이다. 마치 세 다리가 한 솥을 떠받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이 세 가지 축이 서로에게 힘을 더해 가면서,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이해[如實知, 明知, 無分別智]’와 ‘여실한 이해를 수립하는 마음 국면[眞心, 心眞如]’의 궁극 수준[淸淨無垢識, 一心]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수행 가운데서도 ‘이해 수행[慧學]’과 ‘마음 수행[定學]’이 더 근원적 역할을 한다. ‘이해와 마음’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특성을 자아내는 원천이고, 인간 탐구의 핵심이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근원적 단서이다.

 

돈오에는 ‘이해 돈오’와 ‘마음 돈오’의 두 측면이 있다. 마음 돈오는 ‘동일성 관념에 따라 차이/특징의 사실 그대로를 왜곡해 가는 마음 계열’에서 ‘한꺼번에 빠져나오는 마음 국면’의 체득이다. 마음 수행의 핵심 관문關門이다. 다음 글에서 ‘마음 돈오’의 문제를 이어간다. 

 

<각주>

(주1)  양자 역학과 불교」(양형진, 『불교평론』 26권 3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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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고려대에서 불교철학으로 석·박사 취득. 울산대 철학과 교수와 명예교수를 거쳐 현재 인재대 석좌교수로 있다. 울산대에서 불교, 노자, 장자 강의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원효전서 번역』, 『대승기신론사상연구』,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돈점 진리담론』, 『원효의 화쟁철학』, 『원효의 통섭철학』,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이해수행과 마음수행』 등이 있다.
twpark@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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