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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유신의 사가독서와 유생의 산사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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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5 년 7 월 [통권 제147호]  /     /  작성일25-07-05 12:10  /   조회1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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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공무원 시험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수험생들 중에는 대도시의 고시촌에서 숙식을 해가며 학원을 다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깊은 산속 사찰에서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산사에서 고시공부하던 학생들 중에는 수행자의 삶에 감동되어 출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사실 고시생이 산사에서 시험을 준비하는 관행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오랜 전통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산사에서는 과거를 앞둔 유생儒生들이 공부하기도 했고, 또 임금으로부터 휴가를 허락받은 유신儒臣이 독서를 하기도 했다. 유신이 휴가를 받아 독서하는 것을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는데, 이 전통은 세종 대부터 시작되었다.

 

임금이 집현전集賢殿의 부교리副校理 권채, 저작랑著作郞 신석견, 정자正字 남수문 등을 불러 명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집현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독서에 전심하여 성과를 내어서 나의 뜻에 맞도록 하라.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 『세종실록』 8년(1426) 12월 11일.

 

사진 1.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상.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이 연구에 전념해서 성과를 내도록 하기 위해 재충전의 시간을 갖도록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사가독서를 할 수 있는 관료의 인원과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평균 3~6명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1426년(세종 8)~1773년(영조 49)까지 300여 명을 선발한 것으로 추산된다. 임금은 그 사가문신賜暇文臣들에게 1~3개월 혹은 시기를 한정하지 않는 장기 휴가를 주어 심신을 새롭게 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실질적인 대우도 상당해서 학문을 총괄하던 홍문관 대제학 같은 경우는 독서당 출신이 아니면 임용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가독서를 허락받은 문신들은 대체로 사찰에서 독서하는 것을 좋아하였던 것 같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요한 곳에서 글을 읽는 것이 무슨 별다른 효과가 있는가.” 하니, 권채가 아뢰기를, “다시 다른 효과는 없는데 다만 마음이 산란하지 않을 뿐입니다.” 하였다. 김자도 또한 아뢰기를, “집에 있으면 사물事物과 빈객賓客을 응접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산속에 있는 한가하고 고요한 절만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10년(1428) 3월 28일.

 

사가문신들은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는 산사에서 독서하고자 했다. 아마도 그들이 과거 시험을 위해 공부하던 유생 시절부터 사찰에서 독서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험을 준비하는 유생들이 사찰에서 공부하던 전통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도 어린 시절에 사찰에서 독서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영사領事 정인지가 아뢰기를, “태종께서 사사寺社의 노비를 혁파할 때 각림사는 바로 태종께서 소년 시절에 독서하던 곳인데도 오히려 아울러 혁파시켰습니다. 이제 신씨申氏가 시납施納한 노비는 마땅히 개정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 『성종실록』 2년(1471) 11월 22일.

 

사가독서 제도는 문종과 단종 때까지 시행되다가 세조의 집권 이후 집현전이 폐지되면서 일시 중단되었으나 성종 때 부활했다. 이때도 여전히 사가문신들은 산사에서 독서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런데 산사에서 독서하던 유생들이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키면서 왕실에서 사가문신들의 사찰 독서까지도 반대했다. 그러자 사가문신들이 임금에게 산사의 독서를 허락해 달라며 건의하였다.

 

영사領事 홍윤성이 아뢰기를, “신臣이 일찍이 세종 때의 옛 사례에 따라 예문관원으로 하여금 산사에 나아가 독서하게 하도록 하자고 청하였었는데, 대비께서, ‘유생은 절에 갈 수가 없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습니다만, 신숙주 같은 이도 집현전의 일원으로서 산사에서 독서한 자입니다.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비大妃께 아뢰겠다.”고 하였다. 

- 『성종실록』 5년(1474) 4월 8일.

 

사진 2. 독서당계회도. 사진 : 국가유산청.

 

사찰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문제를 일으키며 승려들과 다투는 일이 조정에 자주 보고되었다. 그래서 『경국대전』에 유생의 사찰 출입 금지를 명문화하기도 했다. 이를 근거로 왕실에서는 사가문신들의 산사 독서까지도 못 하게 했던 것인데, 사가문신들은 조용한 산사의 독서를 허락해달라며 지속적으로 요청하였고, 이윽고 허락을 받았다. 성종은 “홍문관의 관리들에게 매번 세 사람씩 번갈아 가며 휴가를 주어 산사에서 독서하도록” 명하였다.[『성종실록』 11년(1480) 3월 20일] 그러나 대신들 가운데는 산사의 사가독서를 반대하는 이도 있었고, 왕실에서도 유생과 승려 사이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사가문신의 산사 독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므로, 결국 별도의 장소에 독서당을 마련하여 사가문신이 독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용산 한강변의 독서당이 낙성되었으므로 그 편액과 기문記文을 내일 안에 걸고자 하니, 홍문관 관원을 모두 그곳에 모이게 하라. 내가 술과 음악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 『성종실록』 24년(1493) 5월 11일.

 

성종은 도성 밖의 한가한 곳에 국가 상설기구를 설치해 선비들이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독서당이었다. 최초의 독서당은 용산 한강변에 있던 폐사를 수리하여 설치했고, 이후 정업원, 두모포, 한강별영 등으로 장소가 바뀌었다. 독서당의 성립 및 변천 과정에 대해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제학 유근이 아뢰기를, “사가독서의 규정은 세종조에 시작되었는데, 산사에서 글을 읽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 그 뒤 성종 대에 이르러 유신이 승려들과 섞여 지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용산에 있는 황폐한 사찰을 글 읽는 곳으로 삼았으며, 홍치 임자년(1492)에 조위의 건의에 의해 그 사찰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독서당이란 편액을 내렸습니다. 연산군 대에 이르러서는 이 선당選堂을 없애 마침내 궁인들이 차지하였고, 중종이 중흥하자 맨 먼저 옛 법규들을 회복시키면서 정업원 자리를 독서당 터로 삼았고, 을해년(1515)에는 독서당이 조정과 저자에 바싹 붙어 있어서 글을 읽는 아늑한 장소로 적합하지 못하다고 하여 동호東湖에 서당을 마련했습니다. 이것이 사가독서에 대한 대강의 연혁입니다. …” 하였다. 

- 『광해군일기』 즉위년(1608) 11월 21일.

 

사진 3. 서대문 백련사(조선시대 정토사) 전경.

 

독서당의 건립 이후 사가문신이 산사에서 독서하던 풍습은 사라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유생들의 산사 독서는 지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유생과 승려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기도 했다. 서울 서대문에 있는 백련사(조선시대 사찰명은 ‘정토사’)는 의숙공주(1441~1477)의 원당으로서, 도성에서 가까우면서도 교통이 편리한데다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백련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서 유생들의 공부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왕실이 의숙공주의 재궁齋宮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유생들의 백련사 출입을 금지하자 유생들은 정토사를 드나들며 소란을 피우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이에 왕실에서 정토사는 의숙공주의 재궁으로서 다른 사찰과 다르다며 소란을 피운 유생들에게 과거 응시를 금지하는 정거停擧 처분을 내렸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정토사에서 독서한 유생들을 정거하도록 명하셨다 하니, 신들은 경악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별도로 의숙공주를 제사 지내는 곳이 있거늘, 어찌 절에서 함부로 제사를 지낼 수 있겠습니까. … 더구나 유생들이 절에 올라가는 것은 오로지 독서를 위한 것으로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고 조종조에서 금지한 적이 없었습니다. … 독서하는 유생에게 죄를 가하려고까지 하시니, … 많은 선비들이 크게 기대하는 마음이 이로부터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유생을 정거한 명을 도로 거두고 아울러 공주를 승사僧寺에서 제사 지내는 일도 금하소서.”라고 하였다. 

- 『명종실록』 1년(1546) 1월 6일.

 

사진 4. 의숙공주 부부 발원으로 조성된 오대산 상원사 문수동자좌상.

 

사헌부의 대신들은 정토사에서 의숙공주의 삭망제朔望祭를 지내는 것 자체가 잘못이고 유생들이 절에서 독서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므로 그들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였다. 당시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을 대신해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던 시기이고, 문정왕후가 정토사에서 소란을 피운 유생들에게 정거 명령을 내렸던 것이므로 사헌부의 건의를 수용할 리 만무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명종은) 답하기를, “정토사는 다른 사찰에 비할 것이 아니다. 조종조로부터 공주를 위해 창립하여 제사 지낼 장소로 삼고 승려로 하여금 수호하게 한 것이다. 유생의 독서는 다른 사찰이라면 본디 무방하지만 정토사는 공주를 위하여 금하는 것이지, 유생의 독서를 금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유생이 절에 올라갈 수 없게 된 것이 본국의 옛 제도인데, 근자에 유생들이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능만凌慢하는 풍습만 자라서 거리낌없이 자행하여 장차 제사를 지낼 수 없어도 그에 대해 금할 수 있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이런 의사로 말했을 뿐이다.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 『명종실록』 1년(1546) 1월 6일.

 

정토사 외에도 한양 도성 인근 사찰들은 여러 유생들의 독서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대립 속에서 벌어진 을사사화(1545)로 죽임을 당한 윤임과 관련한 사건을 언급하는 기록에서도 삼각산 승가사에서 유생이 독서했던 내용이 나온다. 

 

“역적 윤임의 정상은 고금의 반역한 신하 가운데 가장 흉악한 것으로, 이덕응의 초기 진술서에 역력히 드러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 이덕응은 장의동藏義洞에서 나서 자랐고, 소신(안명세)은 명례방明禮坊에서 나서 자랐기에 남과 북으로 거리가 서로 동떨어져서 이덕응의 이름만을 들었을 뿐이고 얼굴은 일찍이 서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계묘년 어느 달에 소신이 독서하기 위하여 삼각산 승가사에 갔더니, 이덕응 역시 그의 동생들과 더불어 소신보다 3∼4개월 앞서부터 와서 글을 읽고 있었으므로, 소신이 그때야 겨우 그의 얼굴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 

- 『명종실록』 3년(1548) 2월 12일.

 

사진 5. 삼각산 승가사 마애여래좌상. 사진 : 국가유산청.

 

승가사 역시 왕실 원당으로서 유생의 독서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 조항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유생들과 승려 사이의 다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왕실 원당의 독서도 관례처럼 용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생의 산사 독서는 지방의 사찰에서 더욱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며, 많은 사찰들이 양반가의 원당처럼 활용되고 있었다. 가령 17세기 안동의 유학자 김광계는 『매원일기』를 남겼는데, 그 내용에 보면, 젊은 시절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운암사, 용수사 등지에서 공부했던 내용을 기록하고 있고, 자신의 동생과 아들도 산사에서 공부했다고 하였다. 

 

또한 유림들과 사찰에 모여 강회講會를 열기도 하고, 병이 들었을 때 요양처로 삼기도 했다. 게다가 연대사에 살던 승려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쇠약한 승려 대여섯만 남게 되자 이를 한탄하기도 하고, 운암사의 승려들이 물 부족을 이유로 모두 떠나버려 절이 텅 비게 되자 거처하기를 희망하는 승려를 물색하였고, 새로 승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노비를 시켜 절을 수리하고 청소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지방 양반가에게 있어서 사찰은 독서하는 학문 수양의 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유림들이 모이는 회합의 공간이었고 휴식의 공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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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불교학과에서 석사학위, 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 교수와 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국립순천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역서로 『운봉선사심성론』, 『월봉집』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 다수가 있다.
su55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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