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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마음 돈오’와 혜능의 돈오견성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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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5 년 9 월 [통권 제149호]  /     /  작성일25-09-04 14:28  /   조회1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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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달마菩提達磨는 인도에서 건너와 중국에 선법禪法을 전한 초조로 알려져 있다. 이후 중국 선종은 『능가경』에 의거하는 달마-혜가慧可 계열의 선 수행 집단인 능가종楞伽宗, 선종의 네 번째 조사[四祖]로 일컬어지는 도신道信(580∼651)이 기주蘄州 쌍봉산雙峯山을 중심으로 개창한 새로운 선 수행 집단, 다섯 번째 조사[五祖] 홍인弘忍(601∼674)이 쌍봉산의 동산으로 수행처를 옮겨 도신의 선법을 계승하면서 펼친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는 전승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갔다. 선종 선사상의 안목과 개성은 마침내 한 인물의 등장으로 그 특유의 선관禪觀이 완성된다. 오조홍인의 제자 육조혜능六祖慧能(638∼713)이 그 인물이다.

 

선종 선사상의 확립과 혜능

 

『육조단경』이 전하는 혜능의 전기와 사상, 남종선南宗禪이 선종의 주류로 확립되는 과정에는, 혜능의 제자 하택신회荷澤神會(684∼758)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혜능이 홍인 문하의 수제자였던 신수神秀(606∼706)를 제치고 홍인의 전법 제자가 되는 드라마틱한 전기는 『신회어록神會語錄』 「혜능전」의 반영이다. 

 

‘신회의 혜능 이해’와 ‘혜능의 전기 및 사상’이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혜능에 대한 거의 모든 자료는 ‘신회의 혜능 이해’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혜능을 탐구할 때는 언제나 신회의 역할을 고려해야 한다. 지해종사知解宗師라는 비판적 평가는 후대 조사선 계보의 수립 과정에서 부여된 것이어서, 신회에 대한 평가는 더욱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학계의 중설衆說이다.

 

사진 1. 하택신회荷澤神會(684∼758). 12세기 화가 장승온張勝溫(1163∼1189)의 그림,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육조단경』에 따르면, 혜능은 홍인 문하에 있을 때만 해도 한문 해독과 작문 능력이 없었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6대 조사로서 펼치는 상당上堂 법문을 보면, 당시 유행하던 교학 이론과 개념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개진하고 있다. 홍인 화상의 전법 제자가 된 후 홍인의 당부대로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 동빙묘산東憑墓山을 떠나 최소 3년 동안은 법을 설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소주韶州 대범사大梵寺에서 설법을 시작하기까지 최소 3년 동안, 당시 유행하던 교학에 대한 탐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 따르면 혜능은 17년간의 은거 생활 끝에 인종印宗(627∼713)과의 문답을 통해 공식 활동을 개시한다. 아마도 상당 기간의 교학적 탐구와 학습이 혜능의 은거 생활 동안 이루어졌을 것이다. 깨달았기에 저절로 교학도 알게 되었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돈오견성을 전능의 신비주의 현상으로 이해하고 싶은 세인의 희망일 뿐이다. 또 그 어떤 생이지지生而知之 근기일지라도, 현재의 지식마저 학습 없이 저절로 습득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돈오견성頓悟見性과 무념無念의 법문

 

선지식들이여, 나는 홍인 화상의 처소에서 한 번 듣고 말 끝나자마자 크게 깨달아 ‘참 그대로를 보는 본연의 면모[眞如本性]’에 ‘한꺼번에 눈 떴다[頓見]’. 그러므로 [이] 가르침을 후대에 퍼뜨려 이제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깨달음[菩提]을 ‘한꺼번에 깨달아[頓悟]’ 각자 스스로 마음을 관觀하여 ‘[‘사실 그대로’와 만나는] 자기 본연의 면모[自本性]’를 ‘한꺼번에 깨닫게[頓悟]’ 하려고 한다. 만약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큰 선지식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아 ‘[‘사실 그대로’와 만나는] 본연에 눈떠야 한다[見性]’ … ‘[‘사실 그대로’와 만나는] 자기 본연의 마음자리[自性心地]‘에서 [‘사실 그대’로 보는] 지혜로써 관조觀照하여 ‘[자신과 세상에] 안팎으로 환히 밝으면[內外明徹]’ [분별망상으로 ‘사실 그대로’를 등지지 않는] ‘자기 본연의 마음[自本心]’을 알게 된다.

 

사진 2. 혜능대사가 『육조단경』을 설했던 대범사大梵寺는 오늘날 대감선사大鑑禪寺이다.

 

만약 [분별망상으로 ‘사실 그대로’를 등지지 않는] ‘본연의 마음[本心]’을 알면 곧 해탈이고, 이미 해탈을 성취하면 바로 반야삼매般若三昧이며, 반야삼매를 깨달으면 곧 ‘잘못 분별하는 생각이 없음[無念]’이다. 무엇을 ‘잘못 분별하는 생각이 없음[無念]’이라 하는가? ‘잘못 분별하는 생각이 없음’의 도리는 ‘모든 현상[一切法]’을 보면서도 [그] ‘모든 현상[一切法]’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곳에 이르면서도 [그] 모든 곳에 집착하지 않아 〈항상 ‘‘[사실 그대로 보는] 자신의 본연[自性]’(주1)을 온전하게 간직하는 것이니[常淨自性]〉, 여섯 도적[인 형상[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개념[法]]들로 하여금 여섯 문[인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意]]을 좇아 ‘여섯 대상[六塵]’으로 달려 나가게 하지만 [‘여섯 대상[六塵]’을] 떠나지도 않고 [‘여섯 대상[六塵]’에] 물들지도 않아 오고 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야삼매般若三昧이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이니, ‘잘못 분별하는 생각이 없는 수행[無念行]’이라 부른다. 모든 사물을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念]을 끊어야 한다고 하지 말지니, 그것은 바로 ‘현상에 묶인 것[法縛]’이며 ‘치우친 견해[邊見]’라 한다. ‘잘못 분별하는 생각이 없음[無念]’의 도리를 깨달은 이는 ‘모든 현상[萬法]’에 다 통하고, ‘잘못 분별하는 생각이 없음[無念]’의 도리를 깨달은 이는 모든 부처의 경지를 보며, 〈‘잘못 분별하는 생각이 없음[無念]’이라는 ‘한꺼번에 [닦는] 도리[頓[修]法]’〉[無念頓法]를 깨달은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른다.(주2)

 

선종의 법문을 ‘궁극실재로 안내하는 신비주의의 길’이라고 보는 시선들이 있다. 불교계 안팎으로 꽤 넓게 포진되어 있다. 혜능의 무념 법문에는 이런 시선들이 그 근거로 채택하는 대표적 용어들이 등장하고 있다. 진여본성眞如本性·자본성自本性·자성심지自性心地·자본심自本心·본심本心·자성自性이 그것이다. 만약 이 용어들에 대해 〈‘가변적 현상 이면에 있는 불변·독자의 완전한 궁극실재’를 의미한다〉라고 이해한다면, 혜능과 그를 계승한 선종의 가르침은 ‘궁극실재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가 된다. 선종을 마음수행의 가르침이라 보는 학인의 경우, 이때의 ‘마음수행’은 궁극실재인 마음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마음 신비주의 수행’이 된다. 학계나 구도 학인들 사이에서 드물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사진 3. 혜능대사 등신불. 광동성 남화선사南華禪寺.

 

이런 독법은 비록 매혹적이지만, 불교의 사상적 정체성과는 명백히 충돌한다. 아트만 신비주의 사유를 불교 언어로 포장만 바꾼 ‘불교 내부의 아트만 사상’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붓다는 명백히 ‘불멸의 완전한 궁극실재를 설정하는 아트만·브라흐만 신비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만약 혜능 법문에 등장하는 이런 용어들을 ‘신비주의 길의 목적지인 궁극실재로 안내하는 이정표’로 읽는다면, 혜능과 선종의 길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경험할 수 없는 허상’을 좇아가는 공허한 여정이 되고 만다. 

 

원효나 대승불교에서 등장하는 긍정형 용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궁극실재를 실제로 체득한 사람은 없다. 이런저런 사이비 증언만 난무할 뿐이다. 궁극실재나 그것을 인격화한 전능의 절대자를 직접 확인한 자는 없다. 본래부터 변화·관계로 이루어지고, 또 변화·관계로 전개되는 세계에서, 불변·절대의 존재는 끼일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선종 내부에서 등장하는 ‘깨달음의 증언’은 궁극실재와의 경험적 합일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비일상적 현상과 체험을 궁극실재와 관련시키는 착각, 멋대로 각색된 그럴듯한 전언들은 깨달음의 길을 어지럽게 할 뿐이다.

 

혜능 법문의 전후 맥락을 고려하면, 이 용어들은 분명 ‘마음’ 및 ‘마음 현상’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은 ‘불변·독자의 완전한 궁극실재’가 아니며, 그 마음 현상은 궁극실재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동일 내용을 폐쇄적으로 보존하는 ‘명사형 사태’가 아니다. 마음은 변화와 관계에 열린 채 역동적으로 흘러가는 ‘동사형 사태’다. 마음은 ‘닫혀 있고 정지해 있는 명사형 존재’가 아니라 ‘열려 있고 움직이는 동사적 국면’을 지시하는 것이다.

 

돈오와 무념 그리고 마음 돈오

 

혜능이 구사하는 이런 용어들은 마음의 어떤 역동적 국면, 어떤 동사적 사태를 일깨워 주려는 것일까? 무념에 관한 그의 설법은 이 질문에 답해 준다. 무념無念은 일반적으로 ‘분별하는 생각이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염念’은 ‘마음 작용’이다. 흔히 ‘생각’이라 번역된다. 그리고 ‘무념’은 ‘염念의 부재 상태’ 혹은 ‘염念의 극복 상태’를 지시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무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염은 어떤 생각, 어떤 마음 작용인가?〉를 물어야 한다.

 

혜능 설법에서 ‘염’은, 감관능력[六根]으로 대상[六境]들을 만나 느끼고 판단·평가하는 ‘인식 작용의 범주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다. ‘무념’은 이 인식 작용 전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무념은, 〈인식 작용의 전체 범주 속에 있으면서도, ‘인식 능력과 대상들과의 관계 방식 변경’을 통해 이 전체 범주의 내용 차원을 바꾸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유식에서는 ‘전의轉依’라고 부른다. ‘의지하면서도 바꾸는 방식’이다.

 

사진 4. 혜능대사가 인종법사를 만나 삭발했던 광동성 광효사.

 

〈인식의 대상이 되는 주·객관의 모든 현상에 불변성·동일성·독자성을 부여하면서 관계 맺는 마음 방식〉(분별심分別心)을, 새로운 마음 국면의 선택과 수립을 통해 〈변화·관계의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면서 관계 맺는 마음 방식〉(무분별심無分別心)으로 바꾸는 수행. - 그것이 무념이라는 마음수행이다. 다시 말해, 주·객관의 모든 현상과 만나면서도, ‘불변성·동일성·독자성을 부여하는 이해 및 마음 방식을 붙들지 않는 마음 국면’을 수립하여 ‘[사실 그대로 보는] 자기 본연의 마음자리[自性心地]’에 역동적으로 위치하는 것이 무념행無念行이다. 특정한 이해와, 그 이해를 붙들고 있는 마음 모두를, ‘괄호 쳐서 빠져나오는 마음자리’를 열고, 그 마음자리에서 ‘연기적 이해’를 수립하여 굴려 가는 노력이 무념행이다.

 

혜능에 의하면, 무념은 〈모든 현상을 무아나 공으로 이해하여 분별을 없앤 마음〉이 아니다. ‘모든 현상과 생각을 만나면서도 그것들을 붙들지 않는 마음 국면’이 무념이다. ‘불변·독자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이해나 생각으로 현상을 왜곡해 가는 마음 작용의 계열’에서 한꺼번에 빠져나와 멈추고,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마음 국면’을 확보하여 보전해 가는 것이 무념의 수행이다. ‘현상의 사실 그대로’는 본래부터 무실체·무본질·관계·변화의 사태이다. 이 ‘본래의 그러함[本然]’, 그 상실된 고향으로 회귀하는 발길이 ‘무념이라는 마음수행’이다. 무념은, ‘불변성·동일성·독자성을 부여하는 언어의 속성에 지배된 인식 작용’(분별식分別識)으로 인해 잊힌 ‘현상의 본래 그러한 고향’에 다시 안기는 마음의 행로다. 이 귀향의 행로는, 〈현상에 대한 ‘이해와 마음의 왜곡적 인지 작용’(분별식)을 붙들지 않는 ‘마음 국면’〉에서 열리는 길이다. ‘현상을 왜곡해 가는 마음작용 계열’에서 한꺼번에 빠져나온 마음 국면을 간직해 가는 것이 무념의 행각이다. 이 무념의 행각에는 현상의 ‘본래 그러함[本然]’이 동반한다.

 

무념은, 〈‘동일성 관념으로 차이 현상들을 왜곡하는 인식 작용’(분별식)의 계열과 범주에서 한꺼번에[頓] 빠져나오는 마음 국면〉이다. 따라서 무념의 마음수행으로 분별을 그치는 것은 ‘한꺼번에[頓] 그침’이다. 마찬가지로, ‘현상을 사실 그대로 보는 본연의 마음자리에 눈뜨듯 밝아지는 국면’인 견성見性은, 한꺼번에 빠져나오는 마음 국면에 대해 ‘눈뜨듯 한꺼번에 밝아지는 국면[頓見]’이라 해야 한다. 이렇게 견성과 돈오는 그 내용상 결합하고 있다. 그래서 ‘돈오견성頓悟見性’이다. 


<각주>

(주1) ‘자성自性’이라는 용어는 맥락에 따라 전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된다. ‘[사실 그대로 보는] 자신의 본연[自性]’을 지칭하기도 하고, 무아·공 사상이 부정하는 ‘불변·독자의 본질’을 지시하기도 한다. ‘성性’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이다. ‘본연’이라는 긍정 면모를 뜻하기도 하고 ‘불변·독자의 본질’이라는 부정 면모를 가리키기도 한다. 『대승기신론』이나 원효 저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념의 의미를 풀어쓰기 어려운 한자와 한문의 특성 때문에 같은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구사된다. 원효나 선 어록을 비롯한 한문 문헌들을 탐구하거나 번역할 때는 맥락별 의미를 간별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나 오역의 덫에 휘말리게 된다.

 

(주2) 『돈황본 육조단경』, “善知識, 我於忍和尙處, 一聞言下大悟, 頓見眞如本性. 是故以教法, 流行後代, 今學道者, 頓悟菩提, 各自觀心, 令自本性頓悟. 若能自悟者, 須覓大善知識, 示道見性. (…) 自性心地, 以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昧, 卽是無念. 何名無念? 無念法者, 見一切法不着一切法. 遍一切處不着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從六門, 走出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莫百物不思, 當令念絶, 卽是法縛, 卽名邊見.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頓法者, 至佛地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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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고려대에서 불교철학으로 석·박사 취득. 울산대 철학과 교수와 명예교수를 거쳐 현재 인재대 석좌교수로 있다. 울산대에서 불교, 노자, 장자 강의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원효전서 번역』, 『대승기신론사상연구』,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돈점 진리담론』, 『원효의 화쟁철학』, 『원효의 통섭철학』,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이해수행과 마음수행』 등이 있다.
twpark@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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