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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중종대 도성 원각사와 지방 산사의 철거에 관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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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5 년 9 월 [통권 제149호]  /     /  작성일25-09-04 14:50  /   조회1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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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정에서 불교 정책 방향에 관한 논의가 많았던 시기는 건국 초기와 중종·명종 대였다. 건국 초기에는 불교에 대한 국가의 관리 범위를 축소하는 문제, 군역을 피해 출가한 승려들을 찾아내서 환속시키는 문제, 왕실의 불교 의례를 유교식으로 대체하는 문제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논의하였다.

 

이때의 결정을 종합해 보자면, 속세를 떠나 출가한 승려는 속가의 법으로 다스릴 수 없으므로 국가의 간여를 최소한으로 하되 승과에 합격한 학승들이나 깊은 산속에서 수행하는 고승들은 국가에서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중종·명종 대의 논의는 대체로 연산군 대에 파괴된 각종 불교 제도를 어느 정도로 복구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는데, 도성과 지방의 사찰에 대한 논의가 주목된다. 먼저 연산군 대 파괴된 도성의 사찰에 관해 논의가 이루어졌다. 

 

사진 1. 고승 보호를 하달하는 관부문서(1652년). 담양 용흥사 소장.

 

시독관 최숙생이 아뢰기를, “도성 안의 원각사 등과 같은 절은 이미 폐지되었으나 영원히 다시 세우지 말 것을 다시 하교하소서. 승도들이 부세를 도피하고 부역을 모면하여 유교에 해가 되니 통절히 뿌리를 뽑으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조종조로부터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통절히 물리칠 수도 없고 또한 숭상하여 믿을 수도 없으니, 다만 내버려 두고 문제 삼지 않을 뿐이다.” 하였다. 

- 『중종실록』 1년(1506) 10월 15일.

 

신하들은 이미 파되된 도성의 사찰을 복구할 필요가 없으며, 출가 자체를 금지하자고 건의하였다. 하지만 중종은 선대 임금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므로 그대로 두자고 하였다. 실록을 기록한 사신史臣은 위의 인용문을 이어서 사론史論에서 “훗날 양종兩宗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 ‘통절히 물리칠 수 없다’고 한 전교가 이를 열어주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 중종 대의 실록을 정비한 때가 명종 때이므로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가 양종을 복립한 것에 대해 사신이 실록의 지면을 빌어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중종은 도성이나 지방의 절을 새로 세우지 말라고 명한다. 

 

임금이 명하기를, “도성 안 원각사 등의 절을 다시 세우지 말라. 또 외방의 새로 창건하는 절을 통절히 금하고, 승려도 도첩이 있는 자 외는 아울러 통절히 금할 것을 팔도에 유시하라.” 하였다.

- 『중종실록』 1년(1506) 10월 16일.

 

사진 2. 서울 탑골공원 전경(원각사터). 사진: 국가유산청.

 

중종은 도성이나 지방의 절을 새로 창건하는 것을 금지하고, 또 도첩이 없는 승려를 환속시키라는 취지로 명하였다. 그러나 중종의 모친으로서 대비였던 정현왕후의 반대가 심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대비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한다. 

 

대비가 좌우 정승에게 전교하기를, “도성 안에 있는 양종에 소속된 사찰은 근래에 와서 창건한 것이 아니며, 원각사와 정업원 역시 선대 임금이 세운 것이다. … 자손으로서 숭봉하지는 않더라도 영구히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 조종조의 유훈인데도 지난 연산군이 폐지하였으니 이는 조종조에게 크게 죄를 지은 것이다. 지금 새로 임금이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사찰을 세우는 것이 부당한 줄은 알지만, 이것은 내가 불교를 숭상하여 믿으려는 것이 아니라, … 부득이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임금 역시 박원종·유순정에게 전교하기를, “… 지금 대비마마의 말씀을 들으니, 조종조의 유훈이 지극히 정녕하다. 그 유훈을 어긴다면 불효막심한 일이니, 부득이 예전 관습대로 하고자 한다.” 하였다.

- 『중종실록』 2년(1507) 1월 7일.

 

사진 3. 정현왕후 윤씨(1462~1530)의 묘 선릉宣陵. 사진: 국가유산청.

 

대비의 명에 대해 신하들이 즉각적으로 반대하였다. 중종은 대비와 신하의 중간에서 우왕좌왕하면서 3년의 기한을 정하여 사찰을 새로 세우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사찰의 중창을 금지하지 않으면서도 3년이라는 기한을 정하여 절충안을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3년의 기한을 정하지 말고 영원히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중종실록』 2년(1507) 1월 13일) 대비와 신하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면서 끝내 원각사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원각사가 있던 자리에는 서울을 다스리는 관청인 한성부가 들어섰다.

 

관리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원각사의 저주

 

한성부 판윤 이계남과 좌윤 손주와 우윤 심정 등이 보고하였다. “한성부를 정묘년(1507)에 원각사로 옮겼는데, 절의 창과 벽이 모두 파손되어 있었고, 또한 장부와 호적 및 각년各年의 결송문안決訟文案을 한성부에서 보관하였습니다. 그래서 원각사에 관한 문서를 찾아볼 일이 있으면 별도로 한성부로 낭관을 보내오니, 그 폐단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성부에는 노비들 수가 적은데 날마다 당상관과 낭관에게 음식을 운반하느라 바쁘니, 이 또한 폐단이 됩니다. 청컨대 다시 본부를 다시 옮겨주소서.”

- 『중종실록』 5년(1510) 1월 12일.

 

당시 한성부의 관청을 폐사된 원각사 터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성부 우윤 성윤조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사람들은 폐사된 원각사의 저주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한성부의 판윤을 비롯해 좌윤과 우윤이 한성부를 다시 옮겨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결국 한성부의 관청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원각사 건물은 한동안 비어 있었다. 신하들은 원각사 인근의 빈터를 사대부가 집을 짓도록 내어주자고 했으나 임금은 그나마도 윤허하지 않았다.(『중종실록』 7년(1512) 7월 24일) 한성부가 옮겨간 지 여러 해가 지나서야 원각사의 무너진 건물 재목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대해 실록의 사론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사진 4. 원각사 터(탑골공원)의 팔각정. 사진: 국가유산청.

 

사신은 논한다. 원각사는 도성 안에 있으니, 세조가 창건한 것인데, 연산군 대에 이르러서 승도를 모두 내보내고, 불상을 끌어내었으므로 비어 있었다. 중종이 반정한 뒤 한성부가 옮겨와서 관아로 삼았는데, 판윤 전임田霖이 이곳에서 병들어 죽자 뒷사람이 저주라고 두려워하여 옛 관아로 도로 돌아갔다. 그리고 절 곁에 있는 빈터가 매우 넓어서 한성부에서 집 없는 재상과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두려워하며 감히 살지 못하니, 도성 사람들은 원각사 터가 신령한 곳이라고 여겼고, 그 터의 뿌리가 매우 공고鞏固하니 모두 다시 중흥할 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중종실록』 9년 갑술(1514) 8월 6일.

 

앞서 언급했듯이, 원각사 터에 한성부 관아를 옮긴 이후, 우윤 성윤조가 사망하고, 또 판윤 전임도 갑자가 병으로 죽었던 것 같다. 연이어 벌어진 사망 사건으로 원각사 터에 사람들이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중들은 언젠가 원각사가 다시 중흥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 엷어졌다. 건물들은 점차 무너지고 온전한 나무들만 빼내 다른 건물의 부재로 사용되었다. 무너지지 않은 원각사 탑만 그 자리에 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징표가 되었다. 원각사가 더 이상 중창되지 못하면서 도성 내에 있던 다른 사찰들도 모두 폐사되었고, 더 이상 도성 안에는 사찰이 건립되지 못하였다.

당시 신하들과 유생들은 도성 내의 사찰 창건을 금지하는 데 그치지 말고 지방의 산사들을 모두 철거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종은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였다.

 

석강에 나아갔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전에 경상도 절도사가 모든 산의 사찰을 헐어버리자고 청하였는데, 일시에 다 헐지는 못하더라도 각도로 하여금 승도를 추쇄한다면 군액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사경司經 이청이 아뢰기를, “승도를 추쇄하여 환속시키면 군액이 늘 수 있으며, 그 전답을 모두 향교에 붙이면 어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 중종 9년(1514) 2월 9일.

 

중종이 직접 지방 산사의 승려들을 추쇄하여 군액을 늘리자고 말하였다. 경상도 절도사가 산사를 헐어버리자고 건의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지만 임금이 직접 승려의 추쇄를 언급하였다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승려의 추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예조에 명하였다. “팔도의 여러 산에 있는 사찰을 일시에 철거시킨다면 소요할 폐단이 없지 아니할 것이니, 새로 창건하거나 중창하는 것은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절대 금지시키고, 더 나아가 젊은 승려를 찾아내어 군역에 충원하도록 하라.”

- 중종 9년(1514) 3월 3일.


불교 무용론을 편 중종의 불교관

 

중종은 왕실 비빈들의 깊은 불교 신앙에도 아랑곳없이 사찰이나 승려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리려 했던 유학자들의 입장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는 중종의 불교관을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이 나온다. 

 

중종이 이르기를, “무릇 창업한 임금은 반드시 후세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대업을 이룬 것이 반드시 여러 부처의 호위하는 힘을 입은 것이다.’고 했으니, 이 때문에 후세에 신돈의 난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보더라도 양나라 무제가 불교를 신앙하다가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는 욕을 면치 못했으니, 마땅히 거울삼아 경계할 일이다.” 하였다.

- 중종 9년 갑술(1514) 5월 20일.

 

사진 5. 『삼강행실도』. 사진: 국가유산청.

 

불교를 신봉했던 고려 태조와 양나라 무제의 예를 들면서, 불교 신앙이 깊다 한들 종묘사직을 보전하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한 죽음을 막지 못한다면서 불교 무용론을 이야기하였다. 중종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불교보다 유교의 가르침이 훨씬 효용성이 크다고 여겼다. 

 

임금이 명하였다. “개성부의 인민들이 고려에서 남긴 풍속에 의하여 불교를 숭상하고 유교의 윤리를 알지 못하니 진실로 염려된다. 예조로 하여금 『삼강행실도』를 더 많이 인쇄하여서 내려보내게 하라.”

- 중종 10년(1515) 6월 9일.

 

중종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의 윤리를 그림과 글로 기록한 『삼강행실도』를 널리 퍼뜨려 유교적 가치관이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리되면 불교는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그는 불교적 교리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야간에 이루어진 경연 자리에서 임금이 고전의 글을 보고 이르기를, “석가의 지옥이란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데에 들어가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선을 권장하지는 못 한다.” 하였다. 참찬관 한충이 아뢰기를, “석가가 본래는 세속의 탐하고 악함을 싫어하여 불교를 만들어 교화하려 하였고, 그 폐해가 중국으로 흘러들게 되었습니다.” 하고, 시독관 이희민이 아뢰기를, “하등 인품의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두려워하게 하려 한 계책입니다. 그러나 어찌 그렇게 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천당과 지옥이란 말을 가지고 백성을 교화하려 했던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허위이니, 어찌 오래 유지될 수 있겠는가? 진실로 착한 도리로써 인도한다면 풍습과 세속이 반드시 아름다워질 것이다.” 하였다.

- 중종 14년(1519) 8월 29일.

 

불교의 윤회설에서 설하는 천당과 지옥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을 선으로 이끌기 위해 만들어낸 허위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이는 불교를 받아들인 초기부터 중국의 지식인들이 불교를 비판할 때 주장했던 논리이기도 하다. 유학자들의 주장에 깊이 물든 중종은 왕실 비빈들과 달리 불교적 신앙심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한때 불교에 관심을 가져보고자 『유마경』을 읽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유마경』을 고전이라고 생각하여 살펴볼 것이 있으리라 여겨서 가져다 보았더니, 쓸데없는 불교의 책일 뿐이었다. 다시 문무루文武樓에 보관해 두게 하라.”(중종 27년(1532) 7월 22일)고 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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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불교학과에서 석사학위, 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 교수와 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국립순천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역서로 『운봉선사심성론』, 『월봉집』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 다수가 있다.
su55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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