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 속 세상, 세상 속 화엄 ]
원력願力으로 만드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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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스님 / 2025 년 11 월 [통권 제151호] / / 작성일25-11-05 09:43 / 조회17회 / 댓글0건본문
세계성취품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여름밤, 하늘을 가득 채운 빛나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누구나 한 번쯤은 떠올려 봤을 법한 질문이다. 인류는 오랜 세월 그 질문 앞에 서 있었다. 현대 과학은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빅뱅(Big Bang)’ 이론을 제시한다. 약 138억 년 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빽빽한 밀도의 한 점에서 고온 고압을 견디지 못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시공간이 생겨나고, 무수한 인과가 얽히며 지금의 우주가 펼쳐졌다는 경이로운 서사이다.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
하지만 과학은 그 과정의 질서를 밝히지만, 그 안에 깃든 의미에 관해서는 침묵한다. 2,600여 년 전,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눈으로 보신 세계의 탄생 이야기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시작된다. 『화엄경』이 들려주는 ‘세계 성취’의 이야기는 단순한 물질의 생성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서로 감응하며 피워내는 마음의 작용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차가운 물리법칙의 결과가 아니라, 보살의 뜨거운 서원誓願과 자비의 원력願力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서사이다.
세계의 기원은 신의 명령이 아니라, 각 존재의 마음이 일으킨 인연이 빚어낸 총체이다. 『화엄경』에서 제시하는 세계의 시작은 외부의 창조가 아니라 내면의 깨달음이 현실로 드러나는 과정이다. 모든 존재가 저마다의 업력으로 세계를 빚어내고, 그 세계가 다시 존재를 길러내는 ‘상호 성취의 순환 구조’가 바로 화엄의 우주론이다.

『화엄경』 제4품 「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은 이 비밀을 장엄하게 풀어낸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어떻게 무한한 우주로 확장되고, 그 깨달음의 작용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세계를 이루는지를 보여준다. 이 품은 일종의 ‘화엄의 창세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창세기는 절대자의 명령으로 완성된 고정된 세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존재의 마음과 서원, 행위가 함께 그려가고 있는 살아 있는 우주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로 얽혀 있으며, 각자의 행위는 전체를 울리는 거대한 인드라망의 진동이 된다. 부처님은 그 광대한 연기의 실상을 보았고, 그 속에서 모든 생명은 서로의 빛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통찰은 “어떻게 세계가 생겨났는가?”라는 질문을 “어떻게 세계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전환한다. 그래서 화엄의 세계는 ‘창조’라기보다는 ‘성취’라는 관점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그 과정의 한가운데에서, 숨을 쉬고, 생각하고, 관계 맺으며 매 순간 세계를 다시 쓰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세계성취품」은 단순히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교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책임을 일깨우는 철학이 된다. 우리가 던진 말 한 마디, 일으킨 생각 하나, 선택하는 행동 하나가 법계의 그물 위로 파문처럼 번져나가고, 그 파문이 다시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낸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세계의 성취’란 결국, 우리가 매 순간 마음과 행위로 짓고 있는 지금도 계속해서 이룩되고 있는 세계이다.
『화엄경』 「세계성취품」
『화엄경』은 총 7곳의 장소에서 9번의 법회가 열리는 ‘7처 9회七處九會’의 형식으로 구성된다. 「세계성취품」은 그 첫 번째 법회인 ‘법보리장회法菩提場會’에 속하는 여섯 품 중 네 번째 품이다. 앞선 품들이 등장인물, 사건, 준비를 다루었다면, 「세계성취품」은 이 모든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 즉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근본 원인[因]과 과정을 밝히는 장이다.
보현보살을 비롯한 수많은 보살의 질문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부처님의 위신력을 통해 세계 성취의 비밀이 비로소 밝혀진다. 부처님의 본원력은 무량겁의 수행에서 비롯된 자비의 에너지로서,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의 동력이다. 보살들의 동업선근은 그 빛을 현실의 세계로 구체화한 설계도이며, 중생들의 업력은 그 세계의 모습을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능동적인 참여의 힘이다.
세 가지 힘이 서로 얽혀 작용할 때, 부처님의 깨달음은 한 개인의 내적 체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적 현실로 구현된다. 그 결과로 성취된 세계가 바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이다. 이 원리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교리가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모든 존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로써 무한히 연결되어 있다.

『화엄경』은 이를 인드라망因陀羅網의 비유로 설명한다. 제석천의 궁전에 걸린 그물마다 영롱한 구슬이 달려 있는데, 하나의 구슬 안에는 다른 모든 구슬이 비치고, 그 비친 모습 속에는 또다시 다른 모든 구슬의 모습이 무한히 반영되어 있다.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一中一切], 전체가 곧 하나[一切卽一]이다. 이 관계가 겹겹이 확산하는 모습을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한다. 「세계성취품」은 이러한 연기의 법칙을 통해, 세계가 외부의 신적 명령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과 인연이 빚어내는 유기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세계는 정지된 실체가 아니라, 부처님의 원력과 보살의 행원, 중생의 업력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순간마다 새롭게 성취되는 살아 있는 법계이다. 이 품을 이해하면 『화엄경』의 전체 구조가 한눈에 드러난다. 깨달음의 본체(여래현상품)가 보현보살의 깊은 삼매(보현삼매품)를 통해 그 지혜의 힘을 응축하고, 그 힘이 세계 성취의 원리(세계성취품)로 확장되어 마침내 장엄한 화장세계華藏世界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거대한 흐름이 완성된다. 즉 「세계성취품」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우주로 펼쳐지는 전환의 관문이라 할 수 있다.
다른 경전들이 주로 인간의 마음과 번뇌, 해탈의 길에 집중하는 반면, 『화엄경』은 그 규모를 우주 전체로 확장하여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가 어떻게 부처님의 깨달음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장엄하게 보여준다. 「세계성취품」은 바로 그 연결고리의 핵심을 설명하는 품으로서, 화엄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관문이다.
세계를 이루는 세 가지 위대한 힘
「세계성취품」에 따르면, 세계는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 보살의 행원行願, 중생의 업력業力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공동의 창조물이다. 부처님의 본원력은 태양처럼 모든 생명에 빛을 주고, 보살의 행원은 그 빛을 따라 자비의 길을 열며, 중생의 업력은 그 길 위에 무수한 발자취를 남긴다. 세계가 성립하는 첫 번째 힘은 비로자나불의 본원력이다.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본체이며, 모든 법을 머금은 존재이다.
부처님의 본원력은 무량겁 동안 세워온 자비와 지혜의 서원이자, 일체중생을 구제하려는 불퇴전의 마음이다. 그것은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존재의 바탕을 움직이는 거대한 에너지이다. 태양이 모든 생명을 가능하게 하듯, 부처님의 원력은 연화장세계의 모든 존재를 살게 한다. 『화엄경』은 “부처님의 몸은 법계에 충만하다[佛身充滿於法界]”라고 설한다. 우리가 밟는 땅, 마시는 공기, 바라보는 하늘 속에도 그 원력이 깃들어 있다.

두 번째 힘은 보살의 동업선근同業善根이다. ‘동업’이란 함께 짓는 업, 즉 공동의 행위를 뜻한다. 부처님의 본원력이 우주의 근본 에너지라면, 그것을 현실로 구현하는 것은 보살들의 행원이다. 그들은 부처님의 뜻에 감응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자비와 지혜를 실천한다. 이 세계는 단 한 존재의 작품이 아니라, 무수한 보살이 함께 닦은 선근의 총합이다.
보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장엄한다. 어떤 이는 가난한 이를 돕고, 어떤 이는 자연을 돌보며, 또 어떤 이는 침묵 속의 기도로 세계를 빚어간다. 「세계성취품」이 그리는 세계는 각자도생의 우주가 아니라 협력의 우주이다. 부처님의 본원력은 하나의 음音이고, 보살의 행원은 그 음에 화음을 더한다. 수많은 보살의 서원이 모여 우주의 교향곡을 완성한다. 이 우주는 본질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법계’이며, 나의 깨달음은 타인의 깨달음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세 번째 힘은 일체중생의 업력業力이다. 『화엄경』은 세계가 부처님과 보살에 의해 ‘밖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세계는 그 안에 사는 중생들의 마음과 행위, 즉 업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마음의 그림자이다. 탐욕과 분노로 가득한 마음은 어둠의 세계를 만들고, 자비와 평화의 마음은 빛의 세계를 만든다. 화엄의 세계에서 마음은 곧 우주와 동격이다. 개인의 의식은 법계의 파동과 연결되어 있으며, 한 생각이 시방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성취’는 거대한 신의 창조가 아니라, 매 순간 우리의 의식이 갱신되는 실시간 창조 행위이다. 우리는 세계의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의 공동 창조자이다.

여기서 화엄의 통찰은 과학이 멈춘 곳에서 다시 질문을 시작한다. 과학이 우주의 시작을 ‘빅뱅’으로 설명한다면, 『화엄경』은 그 폭발 이전의 근원을 묻는다. “무엇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세계성취품」의 대답은 바로 자비의 서원이다. 우주는 물리적 폭발의 결과가 아니라, 깨달음의 발현이다. 칼 세이건이 “우리는 별의 먼지로 이루어졌다.”라고 했다면, 『화엄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수많은 서원으로 이루어졌다.” 별의 죽음이 새로운 생명을 낳듯, 보살의 서원이 새로운 세계를 피워낸다.
우주는 끊임없이 소멸하고 다시 태어나며, 그 순환의 중심에는 한 생각의 자비가 있다. 부처님의 마음에서 시작된 서원의 진동이 법계의 그물 속을 타고 번지며, 현재도 수많은 세계가 서로의 빛을 비추며 새롭게 성취되고 있다. 『화엄경』의 가르침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 질문을 던진다. “그대는 지금 어떤 세계를 만들고 있는가?” 세계의 성취는 먼 우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마음이 향하는 한 생각의 방향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식사 한 끼를 앞에 두고 그 음식이 오기까지의 수많은 인연을 떠올리는 일, 그 짧은 순간이 바로 인드라망을 체험하는 명상이다. 한 사람의 땀, 한 줄기 바람, 한 방울의 비가 내 삶 속으로 흘러 들어와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일상은 수행이 된다. 그 한 호흡과 번지는 미소 속에서 이미 화엄의 세계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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