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법안문익의 오도송과 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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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5 년 12 월 [통권 제152호] / / 작성일25-12-04 09:30 / 조회12회 / 댓글0건본문
중국선 이야기 57_ 법안종 ❹
중국선에서는 선사들의 게송偈頌을 상당히 중시하고 있다. 본래 불교는 십이분교十二分敎(주1)로 나누고 있으며, 그 가운데 운문韻文에 해당하는 것은 ‘응송應頌(祇夜, geya)’과 ‘풍송諷頌(伽陀, gāthā)’이다. 그렇지만 중국불교에서는 ‘응송’의 용례는 그다지 보이지 않으며, ‘풍송’이 ‘게송’으로 운용되었다고 하겠다. 북송北宋 시기에 목암선경睦庵善卿이 편찬한 선종의 자전字典인 『조정사원祖庭事苑』 가운데 ‘게송’ 조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운문雲門 선사가 지은 게송들은 모두 제목을 달지 않았으며, 종지宗旨를 거량擧揚하거나 혹은 후손들을 일깨우려는 것으로, 시인詩人들이 제목을 짓고 난 후에 짓는 것과는 다르다. (주2)

『조정사원』은 운문문언雲門文偃과 설두중현雪竇重顯의 어록 등으로부터 2천 4백여 항목을 채택해 그 연원 등을 밝힌 책이므로 당연히 문언의 예로 ‘게송’을 설명하고 있지만, 이로부터 선종의 게송은 제목을 붙이는 일반적인 시詩와는 분명히 다르게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사선에서는 특히 오도송悟道頌을 중시하는데, 이는 돈오頓悟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돈오의 견지에서는 교학에서의 차제와 단계를 제시할 수 없는 까닭에 직접적인 선리禪理를 체득한 경계를 내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삼계유심의 게송
『문익선사어록』에는 여러 가지 게송이 보인다. 그 가운데 ‘송화엄육상의頌華嚴六相義’는 앞에서 소개하였지만 그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실려 있다.
송삼계유심頌三界唯心
삼계는 오직 마음[心]일 뿐이요, 만법은 오직 식識일 뿐이네.
오직 식과 마음이니, 눈은 소리를 보고 귀는 빛을 듣는다.
빛이 귀에 이르지 않는데, 소리가 어찌 눈에 닿겠는가?
눈과 빛, 귀와 소리, 만법이 이로써 이루어진다.
만법이 연緣이 아니라면, 어찌 환幻이라 관觀할 수 있겠는가?
산하와 대지, 누가 견고하고 누가 변하는가?(주3)
여기에서 언급하는 ‘삼계유심’은 『화엄경』과 『입능가경』 등의 경전으로부터 『성유식론』, 『섭대승론』, 『십지경론』 등 다양한 논서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어 경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만법유식’은 직접적으로 설하는 경전은 없지만, 다양한 경소經疏와 특히 조사선 선사들의 어록에 자주 언급된다. 특히 ‘삼계유심, 만법유식’을 함께 사용하는 용례는 선종의 많은 문헌에서 보이고, 심지어 법안종의 사상과는 근본적인 차별을 보이는 임제의 『임제어록臨濟語錄』(주4)에도 언급하는 부분이다. 그에 따라 이 문구를 반드시 화엄학과 관련된 것이라 단정할 수 없지만, 문익은 명확하게 화엄학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겠다. 특히 문익의 법손法孫인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찬술한 『종경록宗鏡錄』에서는 이 ‘삼계유심, 만법유식’을 최소한 30차례 이상 대량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위의 게송에서 문익은 심체心體로서의 심心과 만법을 일으키는 ‘용用’으로서 유식唯識의 관계를 논하고 있고, 비록 연기緣起로부터 발생한 만법은 ‘환幻’이지만, 이른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관계로 논리를 세워서 깨달음의 경계를 ‘묘유’의 입장에서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오직 식과 마음이니, 눈은 소리를 보고 귀는 빛을 듣는다.”라는 문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게송에는 이른바 『중론中論』의 유명한 “공의空義가 있는 까닭에 일체법이 성립할 수 있으며, 공의가 없다면 일체법은 이루어질 수 없다.”(주5)라는 문구를 원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문익은 법장法藏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華嚴一乘教義分齊章』에서 『중론』의 문구를 인용한 것을 보고서 착안한 것으로 추정된다.(주6) 앞에서도 논술한 바와 같이 문익은 법장의 문구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익의 오도송
그런데 문익은 나한계침羅漢桂琛으로부터 ‘일체현성’을 듣고서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그에 대한 오도송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익선사어록』에는 그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추정할 다음과 같은 게송이 실려 있다.
이극理極에서는 정을 잊음[忘情]으로, 어찌 비유를 갖추겠는가?
서리 내린 밤의 달빛 아래, 저절로 앞 시내로 떨어지리라.
열매가 익어 원숭이도 또한 살찌우고, 산에 길게 뻗어 길이 아득하구나.
고개 들어보니 남은 햇살이 아직 남아 있는데, 원래 서쪽에 머물렀을 뿐이네.(주7)
이 게송은 문익의 ‘일체현성’에 대한 취지가 가득 담겨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극’은 궁극적인 경지로 세간의 모든 것을 잊어야 함[忘情]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장자莊子』에서는 ‘도’와 어그러지는 원인을 물질에 대한 욕심인 물욕物欲과 인정에 이끌리는 정루情累, 그리고 그로부터 형성되는 자기[己]에 대한 집착으로 보고,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망물忘物·망정·망기忘己, 이른바 삼망三忘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결코 잊으면 안 되는 소중한 가치조차 잊는 것을 ‘성망誠忘’이라 칭하고, 그를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다. 따라서 문익이 여기에서 ‘망정’의 용어를 사용한 까닭은 절대적인 떠남[離]이나 소멸[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理와 정情, 즉 이사理事의 원융적인 견지를 보이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어찌 비유를 갖추겠는가?”라는 말은 이 경계는 결코 형식적인 문자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로, 문익이 중시하는 승조僧肇의 어법으로는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주8)의 경지라고 하겠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그대로 임운자재任運自在가 이루어진다고 하겠는데, 바로 “서리 내린 밤의 달빛 아래, 저절로[任運] 앞 시내로 떨어지리라.”라는 문구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열매가 익어 원숭이도 또한 살찌우고, 산에 길게 뻗어 길이 아득하구나.”라는 문구는 자신이 후학들에 대한 교계敎誡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문익 자신의 경계가 더욱 원숙해지면서 학인을 끊임없이 제접提接하여 깨달음으로 이끌지만, 여전히 학인들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선사의 정서를 깊게 드리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고개 들어보니 남은 햇살이 아직 남아 있음”을 논하고 있지만, 결국은 “원래 서쪽에 머물렀을 뿐이네.”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서쪽[西]’은 인도나 서역의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진리의 당체當體의 소재를 의미하니, 결국은 ‘일체현성’의 도리를 드러내며 게송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하겠다.

『문익선사어록』이나 다른 전적에서 이를 문익의 오도송으로 칭하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지만, 이 게송은 문익이 계침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에 찬술한 오도송이라는 심증이 굳어진다. 다만 원오극근圓悟克勤이 찬술한 『벽암록』에는 문익의 이 게송을 두 차례나 “법안원성실성송法眼圓成實性頌”(주9)으로 칭명하고 있는데, 여러 가지로 검토해도 이 게송이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드러내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이 게송이 문익의 오도송이 틀림없을 것이라 본다.
남당 황제를 깨우친 게송
『문익선사어록』에는 문익이 남당南唐의 황제 이경李璟에게 법을 강의한 이후 함께 활짝 핀 모란꽃을 감상하였는데, 황제가 문익에게 게송을 청하였고, 문익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승복을 입고 꽃 무더기 앞에 마주하니, 예로부터 그 뜻이 같지 않구나.
머리털은 오늘로부터 하얘지는데, 꽃은 작년의 붉은빛 그대로이다.
화려한 빛은 아침 이슬 따라 사라지고, 그 향기는 저녁 바람을 따라 흩어지네.
어찌 반드시 다 떨어진 뒤에야 비로소 공空함을 알겠는가!(주10)

이 게송을 분석하자면, 상당히 다양한 의미를 도출할 수 있겠지만, 승복을 걸침[擁毳]과 꽃 무더기[芳叢], 백발과 붉은빛 등의 비교를 통하여 황제에게 ‘공’을 깨우치는 의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게송에서 언급하는 ‘공’은 착공鑿空(著空)이나 필경공畢竟空의 의미가 아닌 앞에서 언급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입장으로 문익의 핵심적인 선리인 ‘일체현성’에 이르는 ‘공’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게송을 듣고 황제는 그 자리에서 깨달음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이상으로 『문익선사어록』에 나타난 게송을 살펴보았는데, 모두 문익이 제창하는 ‘일체현성’의 취지가 가득 담겨 있다고 하겠다. 이에 이어서 문익이 찬술한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을 고찰하고자 한다.
<각주>
(주1) [唐]玄奘譯, 『大般若波羅蜜多經』 卷127(大正藏5, 699a), “若有如來、應、正等覺住三示導, 為諸有情宣說正法, 所謂契經、應頌、記別、諷頌、自說、因緣、本事、本生、方廣、希法、譬喩、論義. …… 若三示導, 若所宣說十二分教, 皆依般若波羅蜜多而出生故.” 이로부터 ‘십이분교’는 “契經, 應頌, 記別, 諷頌, 自說, 因緣, 本事, 本生, 方廣, 希法, 譬喩, 論義”임을 알 수 있다.
(주2) [宋]睦庵善卿編正, 『祖庭事苑』 卷1(卍續藏64, 318a), “雲門所著偈頌, 皆不立題目, 或擧揚宗旨, 或激勸後昆, 非同詩人俟題而後有作.”
(주3) [明]語風圓信, 郭凝之編集, 『金陵清涼院文益禪師語錄』(大正藏47, 591a), “頌三界唯心云: 三界唯心, 萬法唯識. 唯識唯心, 眼聲耳色. 色不到耳, 聲何觸眼. 眼色耳聲, 萬法成辦. 萬法匪緣, 豈觀如幻. 山河大地, 誰堅誰變.”
(주4) [唐]慧然集, 『鎮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500a), “나는 제법의 공상을 보았으니, 변하면 곧 있음이요, 변하면 곧 없음이다. 삼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고, 만법은 오직 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꿈과 환상과 허공의 꽃 같은 것들을 어째서 애써 붙잡으려 하는가?[我見諸法空相, 變即有, 變卽無. 三界唯心, 萬法唯識, 所以夢幻空花, 何勞把捉?]”
(주5) 龍樹菩薩造, 青目釋, [姚秦]鳩摩羅什譯, 『中論』(大正藏30, 33a), “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 若無空義者, 一切則不成.”
(주6) [唐]法藏述, 『華嚴一乘敎義分齊章』 卷4(大正藏45, 499b), “中論云: 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者. 此則由無性故卽明緣生也.”
(주8) [後秦]僧肇作, 『肇論』(大正藏45, 157c), “涅槃非有, 亦復非無. 言語道斷, 心行處滅.”
(주9) [宋]重顯頌古, 克勤評唱, 『佛果圜悟禪師碧巖錄』 卷4(大正藏48, 173b), “法眼圓成實性頌云: 理極忘情謂, 如何有喩齊. 到頭霜夜月, 任運落前谿. 果熟猿兼重, 山長似路迷. 擧頭殘照在, 元是住居西.”, 앞의 책, 卷9(大正藏48, 215b)에서도 동일하게 인용하고 있다.
(주10) [明]語風圓信, 郭凝之編集, 『金陵清涼院文益禪師語錄』(大正藏47, 590c), “擁毳對芳叢, 由來趣不同. 髮從今日白, 花是去年紅. 艶冶隨朝露, 馨香逐晩風. 何須待零落, 然後始知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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