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태고보우에 의한 임제종의 법맥 계승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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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 2025 년 12 월 [통권 제152호] / / 작성일25-12-04 09:37 / 조회8회 / 댓글0건본문
한국선 이야기 24
태고보우는 가지산문 출신의 선승이지만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하였고, 무자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원나라로 들어가 임제종의 명안 종사인 석옥청공으로부터 인가를 받고서 귀국하였는데, 그 시기는 1348년(충목왕 4)으로 그의 나이 48세 때이다. 이때부터 그가 열반에 든 1382년(우왕 8년)까지 34년 간의 시기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입전수수기入廛垂手期라 할 수 있다. ‘선사禪師’로서의 태고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난 시기이다.
귀국 후 입전수수 과정
태고가 귀국한 1348년은 충목왕 4년이었는데, 이듬해인 1349년에 충정왕이 즉위하여 1351년까지 3년을 재위하게 된다. 두 왕 모두 어린 국왕이었고 실질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것은 원 조정과 외척 세력이었다. 권문세족에 의하여 토지 겸병이 심화되었고 빈농층은 확산되었으며 민생은 파탄되었다. 사찰은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고 불교 교단은 세속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태고가 지향한 삶은 현실 정치를 떠나 청빈낙도淸貧樂道하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임제종의 대표적 승려였던 석옥청공이나 고봉원묘의 삶의 태도와도 결을 같이 하는 것이다. 남송 대 대혜종고가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했던 것과는 결이 다른데, 원대 한족漢族이 처한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기 태고는 삼각산 중흥사에 머물다가 용문산 북쪽 기슭에 소설암小雪庵을 짓고서 은거하게 된다. 이때 지은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보면 태고의 선禪의 경지를 이해할 수 있다.
원나라 천자는 성인 중의 성인이라
이 바위 골에 살며 세월을 보내게 하니
산중의 이 즐거움 함께할 이 아무도 없네
내 홀로 나의 성글고 졸렬함 좋아하니
물과 바위와 함께 스스로 길이 즐길지언정
세상 사람과 이 즐거움 나누지 않으리라.
대원천자성중성 大元天子聖中聖
사거암곡소일월 賜居岩谷消日月
무인공아산중락 無人共我山中樂
오독련오소전졸 吾獨憐吾踈轉拙
영동수석장자락 寧同水石長自樂
불여세인지차락 不與世人知此樂
(중략)
그대 보게나. 태고암의 이 즐거움
두타가 취해 춤추매 광풍이 온 골짜기에 일어나니
스스로 즐거워 계절이 가는 줄도 알지 못하고
다만 바위 꽃 피고 지는 것 볼 뿐이네(주1)
군간태고차중락 君看太古此中樂
두타취무광풍생만학 頭陀醉舞狂風生萬壑
자락부지시서천 自樂不知時序遷
단간암화개우락 但看嵓花開又落

1352년에 드디어 공민왕이 즉위하게 된다. 태자 시절 연경에서 “내가 장차 고려로 돌아가 정치를 맡게 되면 스님(태고)을 스승으로 모시리라.”라고 한 약속을 공민왕은 잊지 않았다. 즉위하자마자 공민왕은 태고에게 설법을 청하고 경룡사敬龍寺에 머물게 하였으며, 1356년(공민왕 5)에는 봉은사에서 개당설법을 하게 하고서 태고를 왕사로 삼는다. 이어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이의 주관을 태고에게 맡긴다.
왕사에 책봉된 다음 공민왕이 ‘위국爲國의 방도’를 물었을 때, 태고는 “다만 그 거룩하고 인자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요 다스림의 근원이니,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릴 것”을 당부하였다. 여기에 이어 몇 가지 정책들을 논하는 가운데 태고는 불교의 구산선문을 하나로 통일시킬 것과 백장청규의 도입 및 오교를 홍포할 것을 건의하였다.
아울러 도읍을 한양으로 옮길 것도 건의하였다. 이를 통해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대하여 태고가 크게 동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고가 원융부의 일에 관여한 것은 1년 남짓이다. 이후 1363년에는 양산사陽山寺(희양산 봉암사)의 주지가 되어 절을 중창하기도 하고, 가지사迦智寺(장흥 보림사)의 주지가 되어 선풍을 크게 떨쳤다.
신돈의 등장과 태고의 말년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리고 1365년(공민왕 14)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인해 공민왕은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신돈辛旽(1323~1371)이다. 신돈은 공민왕의 사부師傅가 되어 1365년(공민왕 15)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와 감찰사판사監察司判事 및 서운관판사書雲觀判事를 겸직하였다. 또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를 농민에게 보급하고 양인良人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석방시켰으며, 성균관을 중건重建하고 공자를 국사國師로 격상시키는 개혁 정책을 전개하였다.

태고는 공민왕에게 신돈을 멀리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결국 태고는 1366년 왕사를 사직하고 도솔산으로 들어갔다. 1368년(공민왕 18)에는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주석하면서 원나라로 가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신돈의 모함으로 금고형을 받고 속리산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듬해 금고형에서 풀려나 소설암으로 돌아오게 된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처형되고 나서야 태고는 국사에 봉해지게 된다. 1374년 공민왕 또한 44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어 우왕이 즉위하게 된다. 말년에 태고는 양산사(희양 봉암사)와 밀양의 영원사塋原寺 그리고 소설암 등에 머물렀다.
1382년(우왕 8년) 12월 24일, 소설암에서 열반에 들었는데, 이때 남긴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인생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공허한 것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을 꿈속에서 지나갔네 八十餘年春夢中
임종의 오늘에 이 몸을 버리니 臨終如今放皮垈
둥근 해가 서봉에 지네(주2) 一輪紅日下西峰
이듬해 1월에 다비를 하였는데, 사리가 수없이 출현하였다고 전한다. 우왕은 시호를 ‘원증圓證’이라 하였다. 태고에게는 수많은 문도가 있다. 태고암비의 음기에는 국사·대선사·선사를 위시하여 출가 사문의 문도가 천여 명이라 하였고, 최영·이성계를 비롯한 관계官界의 사람들도 문도로 기재되어 있다.
태고 선사상의 특징과 의의
종범스님은 「태고보우의 선풍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태고에 대한 관심이 법통설·종조설로 계속된다면, 태고에 대한 이해를 태고 자체 속에서 하지 않고 태고의 외적인 데에서만 찾는 모순이 있다.”(주3)라고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벌써 30년 전에 한 말씀이지만 다시금 무겁게 다가온다.

“선사로서의 태고의 진면목은 어디에 담겨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보면, 그에 대한 해답은 「태고암가太古庵歌」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는 태고가 석옥을 찾아가 인가를 받을 때 제시했던 것이 바로 ‘태고암가’이고, 자신의 호가 ‘태고’란 점에서도 그 같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태고암가」를 다시금 읽어보라, 거기에는 영가현각의 『증도가證道歌』와도 같이 초불월조超佛越祖의 본분사의 경지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 일부를 음미하여 보자.
그대는 보는가
태고암 중의 태고 일을
지금까지 분명하고 역력하여
백천삼매 그 속에 있어
때로는 중생을 이끌되 항상 적적하네
이 암자는 노승만 머물지 않고
무수한 불조가 같은 풍격일세
그대는 의심마라! 이 결정성을
지혜와 상식으로 알기 어려워
회광반조해도 오히려 망망하고
바로 알아도 자취에 걸리네.
뭐라고 물어도 크게 어긋났고
여여부동해도 돌과 다를 바 없네.(주4)
군불견 君不見
태고암중태고사 太古庵中太古事
지저여금명력력 只這如今明歷歷
백천삼매재기중 百千三昧在其中
이물응록상적적 利物應錄常寂寂
차암비단노승거 此菴非但老僧居
진사불조동풍격 塵沙佛祖同風格
결정설혜군막의 決定說君兮莫疑
지역난지식막측 智亦難知識莫測
회광반조상망망 回光返照尙茫茫
직하승당유체적 直下承當猶滯跡
진문여하환대착 進問如何還大錯
여여부동여완석 如如不動如頑石
태고의 법맥에 대해 ‘고려 가지산문의 법맥을 계승하였다는 입장과 임제와 석옥의 법맥을 계승하였다’라는 두 가지 입장이 공존한다. 태고가 분명 석옥으로부터 인가를 받아오긴 하였지만 귀국 이후 34년 간의 행적을 살펴보면 임제·석옥의 선풍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태고의 독자적인 선풍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태고의 선사상은 본분의 조사선풍과 간화선 수행에 중점을 두고 있으면서도 염불선과 화엄선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종범은 태고의 선사상의 특징에 대해 ‘① 초불월조의 본분선, ② 성성역력의 간화선, ③ 자성미타의 염불선, ④ 잡화삼매의 화엄선, ⑤ 호법교화의 원력선, ⑥ 보은우세의 동사선’ 등 여섯 가지로 밝힌 바 있다. 그의 시호가 ‘원증圓證’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태고는 선과 교 그리고 염불을 원융을 이념적으로 제시하였고 또 그 이념을 현실화하고자 실천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태고보우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이자, 한국불교태고종의 종조라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고의 선사상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각주>
(주1) 『태고화상어록』, 한국불교전서 6책, 684a-b.
(주2) 『태고화상어록』, 한국불교전서 6책, 699c.
(주3) 종범(서정문), 「太古普愚의 禪風에 관한 연구」, 『논문집』 3, 중앙승가대학, 1994, 7.
(주4) 『태고화상어록』, 한국불교전서 6책, 68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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