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 속 세상, 세상 속 화엄 ]
화장세계품: 향수해 위에 핀 연꽃 속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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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스님 / 2025 년 12 월 [통권 제152호] / / 작성일25-12-04 09:56 / 조회7회 / 댓글0건본문
우리는 언제나 ‘사이’를 살아간다. 가족과 동료 사이, 모니터와 눈동자 사이, 생각과 말 사이, 말과 실천 사이, 매 순간 우리는 보이지 않는 다리를 놓으며 산다. 하지만 진정한 연결은 절대 쉽지 않다. 물리적 거리와 시간의 간극은 물론, 마음의 벽과 차원의 경계가 우리를 갈라놓는다. 그 단절과 고립 속에서 현대인은 유례없는 고통과 갈등을 겪고 있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가자, 수단과 미얀마, 예멘과 시리아에서는 폭격이 계속되고, 국경과 종교의 이름으로 증오가 대물림되고 있다. 심지어 기후위기 앞에서도 각국이 자국 이익만을 고집하는 현실과 겹치며 우리의 ‘사이’를 더 멀리 갈라놓는다. SNS로 수천 수만 명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깊은 고독을 느끼고,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각자의 스마트폰 속에 갇혀 산다. 세대 간 언어는 통하지 않고, 진영 간 대화는 평행선을 그으며, 가족조차 서로를 낯선 타인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렇다면 이토록 파편화된 세계를 이어줄 실마리는 정녕 없는 것일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터스텔라>(2014)는 이 물음에 매우 흥미로운 답을 제시한다. 영화 제목이 뜻하는 ‘별과 별 사이(Interstellar)’의 광막한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딸 사이, 현재와 미래 사이, 절망과 희망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랑의 여정이다.
지구가 죽어가는 근미래, 주인공 쿠퍼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성간星間 여행이라는 극한의 모험을 감행한다. 우여곡절 끝에 블랙홀 가르강튀아에서 이른바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선 쿠퍼가 마주한 것은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곳은 ‘테서랙트(Tesseract)’라 불리는 5차원 공간이었다.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에서는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만, 이 5차원 공간에서는 시간조차 물리적 차원이 되어 있었다. 마치 도서관의 책장처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무한히 펼쳐진 격자 구조 속에서 시간은 공간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딸 머피의 방이 무수히 반복되어 나타났다. 어린 시절의 머피, 책장 앞에서 유령을 찾던 머피, 아버지를 원망하며 떠나보내던 머피, 그리고 성인이 되어 인류를 구할 방정식을 풀려 애쓰는 머피까지, 모든 시간이 동시에 존재했다. 책장 너머로 어린 머피가 떨어지는 책들을 보며 “유령이야!”라고 외치는 순간, 쿠퍼는 전율했다. 그 유령은 다름 아닌 지금의 자신이었다.
딸이 어릴 적부터 믿어 왔던 수호천사, 책을 떨어뜨리고 먼지로 신호를 보내던 존재가 바로 미래에서 온 아버지 자신이었다. 이 ‘테서랙트’에서 과거의 쿠퍼 자신이 미래의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딸이 아버지의 신호를 받아 우주의 비밀을 푸는 이 불가사의한 순환 구조를 보여준다. 책장 뒤에서 필사적으로 책을 밀어내고, 먼지로 모스 부호를 만들며, 마침내 시계 초침으로 블랙홀의 양자 데이터를 전송하는 그 모든 행위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연결고리였다.

‘테서랙트’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랑의 힘이 시공간을 관통할 수 있게 만든 통로였다. “사랑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야. 시공간을 초월하는…” 브랜드 박사의 말이 ‘테서랙트’ 속에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영화 초반에 쿠퍼가 그의 딸에게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라는 약속은 결국 가장 오래된 진리, ‘사랑’이라는 답으로 귀결되었다.
보현보살이 삼매 속에서 본 우주의 참 모습
「화장세계품」은 바로 그 ‘사이’를 화엄의 시선에서 우주의 질서로 확장해 보여주는 경이로운 우주의 청사진이다. 연꽃 위에 펼쳐진 세계, 향기로운 바다와 바람의 바퀴, 무수한 세계의 씨앗이 서로를 비추며 피어나는 질서가 곧 우리의 일상적 ‘사이’의 본모습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장면이다.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은 80 『화엄경』의 전체 구성 7처 9회 39품 중에서 첫 번째 법보리도량 법회의 제5품에 해당한다.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의 원래 명칭은 ‘화장장엄세계해華藏莊嚴世界海’이다. 즉 보살의 무수한 실천이라는 꽃[華]이 부처의 과덕을 창고처럼 간직[藏]하여 세계를 장엄莊嚴하고, 그 세계가 바다처럼 광대무변함[世界海]을 선언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장엄한 화장세계의 모습을 누가, 어디에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일까? 「화장세계품」의 설주는 바로 보현보살이다.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현보살이 깊은 삼매 속에서 직접 목격한 우주의 실상을 우리에게 전한다. 이는 마치 우주비행사가 지구 밖에서 본 푸른 지구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전하듯,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위신력에 힘입어 ‘일체제불비로자나여래장신삼매’라는 깊은 선정 속에서 법계 전체를 조망하고 그 경이로운 광경을 우리와 공유한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이 설법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보리도량, 부처님께서 막 깨달음을 얻으신 그 성스러운 자리라는 점이다. 이곳은 단순한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무명의 어둠이 지혜의 빛으로 전환되는 우주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며, 따라서 화장세계의 진실이 드러나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다. 문수보살이 지혜의 관점에서 법을 설한다면, 행원行願의 보살인 보현보살은 그 지혜가 만들어낸 장엄한 세계를 실제로 보여주는데, 이는 이론이 아닌 체험의 공유이며, 관념이 아닌 실상의 증언이다.
“묘한 보석으로 된 연꽃이 성곽이 되어, 온갖 빛깔 마니로 장엄하였고, 진주구름 그림자가 사방에 퍼져서, 이와 같이 향수해를 장엄하였네.” - 「화장세계품」, 무비스님 역 중에서,
보현보살은 깊은 삼매 속에서 ‘풍륜風輪’이라는 바람의 바퀴 위에 떠 있는 화장세계華藏世界를 본다. 풍륜은 우주를 지탱하는 평등의 힘이며, 끝없이 움직이는 생명의 에너지다. 그 위로 향기로운 물의 바다, 향수해香水海가 펼쳐져 있다. 이 바다는 지혜와 자비의 근원이며, 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자비의 모태이다. 그 향수해 한가운데 피어난 거대한 연꽃[大蓮華] 속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피어난다. 번뇌와 고통의 세상에 살면서도 본성은 청정하며, 언제든 깨달음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상징이다. 이 연꽃 속에는 다시 무수한 세계종世界種, 즉 세계의 씨앗들이 떠 있다. 하나의 씨앗 안에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안에 다시 무수한 세계가 겹겹이 들어 있다. 『화엄경』은 이를 이십중二十重 화장세계, 즉 스무 겹의 중층세계로 묘사한다.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는 그 스무 겹 가운데 13번째 층에 위치하며, 무한한 세계 중 하나일 뿐이다. 이 거대한 세계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화엄경』은 중앙의 세계를 둘러싼 다른 세계의 수를 ‘십불찰미진수十佛刹微塵數’, 즉 부처님의 세계를 갈아 만든 티끌의 수만큼이라 한다. 이는 곧 무한대를 뜻하며, 그만큼 부처님의 자비가 닿지 않는 곳이 없음을 나타낸다. 무수한 세계가 각기 다른 빛깔로 존재하지만, 그 모든 세계는 결국 하나의 법계法界, 하나의 진리 위에서 서로를 비춘다. 어떤 세계는 연꽃 모양이고, 어떤 세계는 보배 그물, 어떤 세계는 수미산처럼 우뚝하다. 다양성 속에서도 모두가 비로자나불의 본원력으로 장엄해 있다는 점에서 통일된다.
화장세계의 절정은 ‘일일세계 일일불一一世界 一一佛’, 즉 “하나의 세계마다 한 분의 부처님이 계신다.”라는 선언이다. 이는 수많은 부처가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분의 비로자나불이 모든 세계에 동시에 현전한다는 의미이다. 진리는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법당에서만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고통의 순간에서도 우리는 언제든 부처님과 마주할 수 있다.
이처럼 화장세계는 정지된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살아 있는 우주이다. 그리고 그 모든 세계 속에서 비로자나불의 빛이 끊임없이 반사되어, 무수한 인연이 서로를 비추며 장엄의 조화를 이룬다. 화엄의 우주는 거대한 연꽃 위의 우주이며, 그 연꽃은 지금 우리의 마음에서도 매 순간 피어나고 있다. 따라서 「화장세계품」을 일상에서 구현하는 열쇠는 ‘사이’를 어떻게 장엄할 것인가의 문제로 다시 돌아온다. 경전은 ‘향수해’를 연꽃과 인드라망이 어우러진 바다로 그리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는 그것이 곧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 의견과 의견 사이로 나타난다. 서로의 눈빛이 오가는 그 사이가 곧 ‘인터스텔라’이며, 그 공간을 자비와 지혜로 장엄하는 일이 바로 화엄 행자의 창조 행위이다.
화엄의 인터스텔라, 향수해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에서 아버지 쿠퍼가 딸 머피에게 전하는 명대사,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라는 말은 단순한 낙관론을 넘어선다. 이 대사는 인류가 지혜와 탐험 정신을 통해 숱한 위기와 난관 속에서도 매번 길을 찾아왔다는 역사적 경험을 담고 있다. 이는 『화엄경』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계가 차가운 물리 법칙의 결과가 아니라 보살의 서원[願力]과 중생의 업력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통찰과 맞닿아 있다.

인류가 답을 찾는 능력은 곧 세계를 창조하는 세주世主의 내재한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아가, 영화에서 쿠퍼와 머피를 최종적으로 연결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힘은 과학 기술이나 물리력이 아닌, 가족 간의 사랑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다. 이 마음은 시간과 공간, 심지어 중력마저 뛰어넘어 우주의 질서를 변화시키는 차원을 초월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는 『화엄경』 「화장세계품」에서 별과 별 사이의 공간, 즉 향수해香水海가 인드라망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설하는 가르침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 공간을 자비와 공덕의 바다로 채우는 것은 바로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라는 서원의 진동이다.
결국, <인터스텔라>가 말하는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라는 말은 현실을 개탄하는 대신, 마음이 곧 세계를 창조한다는 화엄의 지혜를 현대적인 서사로 풀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세주가 되어, 서로의 ‘사이’를 채우는 향수해를 희망의 서원으로 장엄할 때, “늘 그랬듯이”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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