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조선 초 국경을 넘은 승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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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5 년 12 월 [통권 제152호] / / 작성일25-12-04 10:07 / 조회8회 / 댓글0건본문
조선이 건국될 무렵, 명나라는 압록강과 경계하고 있던 요동의 도사都司를 통해 몽골이나 여진족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조선과도 긴장 관계에 있었는데, 명 태조 홍무제는 조선이 압록강 요충지에 군량 1만~10만 석을 축적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서 요동 궁궐 건설을 중지시키고 조선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즈음 조선에서는 압록강을 건너온 중국 승려를 첩자라 여기고 참형에 처하였다.
요동의 승려 각오覺悟를 참형에 처하였다. 각오가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군사를 보내서 치려고 한다.” 하였으므로, 순군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각오가 “요동의 민천호閔千戶가 각자 위군衛軍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가면서 조선이 헛점을 노릴까 하여, 나를 보내서 정탐하게 한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었다.
- 『태조실록』 4년(1395) 5월 18일.
압록강을 건너온 명나라 승려들
그로부터 1년 후에는 동북면(함경도)에서 국경을 넘어온 승려가 잡혔다. 역시 첩자라 여기고 붙잡아 서울로 압송하였다.
동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 박신이 승려 해선海禪을 잡아 서울로 보냈다. 해선이 사방을 유람한다고 핑계대고 몰래 중국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경원부 경계에 이르렀는데, 박신이 사람을 보내어 유인하여 잡았던 것이다. … 해선이 말하기를, “… 지난번에 일이 있어 함주에 이르렀다가, 계월戒月이란 승려를 만났는데, 중국 풍토가 매우 좋다고 말하기에, 한 번 보고 싶어 왔소이다.” 하였다.
- 『태종실록』 6년(1406) 5월 23일.
동북면 도순문사는 해선을 붙잡아 서울로 보냈지만, 조정에서는 그의 첩자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하여 장杖 1백 대를 때리고 경상도 합포의 청지기로 유배 보냈다. 그런데 합포에 이른 해선이 “황제가 언젠가 나를 부를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발각되어 유배지를 내이포로 옮겼다.[『태종실록』 6년(1406) 6월 14일] 이런 가운데 상인이나 승려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고 있었다.

서북면 도순문사가 아뢰었다. “지역 내에 한가한 승려들이 초막을 짓고 원문願文을 써가지고 자주 모입니다. 인삼을 거두어 놓았다가 얼음이 얼 때면, 혹은 강을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자도 있고, 혹은 강 건너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숨어 있는 자도 있습니다. 바라건대, 강계·이성·의주·선주 이북의 초막을 모두 헐어서 승려들이 머물 곳을 강력하게 금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되, 다만 초막은 헐지 말라 하였다.
- 『태종실록』 6년(1406) 4월 18일.
중국과의 사私무역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상인이나 승려의 장사는 불법이었다. 그런데 장사는 금지하면서도 초막을 헐지 못하게 한 것은 사실상 승려의 장사를 용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국가에서 사원경제 지원을 대폭 줄이고 있던 시기에서 국경에서 승려들의 소요가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상왕 태조와 왕사 무학대사가 살아 있었으므로 가혹한 조치를 실행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 후 1414년에도 요동의 승려 몇 명이 국경을 넘어 의주에 왔다.
평안도 도순문사가 보고하기를, “요동의 승려 희청·창순·희전 등이 의주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원래 조선인인데 일찍이 중국인에게 붙잡혀서 끌려 들어갔다가 부모가 죽었으므로 조선에 온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종실록』 14년(1414) 3월 17일.
조정에서는 평안도의 보고를 받고 이들을 요동으로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조선인으로서 압록강을 건너갔다가 온 것이 아니라, 요동에서 살다가 출가한 후 국경을 넘어온 승려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중국인으로 판단하고 요동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한편, 조선 승려가 명나라로 갔다가 붙잡힌 경우도 있었다.
중국인을 명나라로 압송하는 관리인 설내偰耐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우리나라 승려가 몰래 요동으로 들어가니, 요동에서 붙잡아 결박하고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예부 낭중이 조선 승려를 꾸짖어 말하기를, ‘네 비록 유람왔다고 하지만 반드시 너희 나라에서 죄를 범하고 도망왔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왜인에게 붙잡힌 중국 사람도 모조리 명나라 조정으로 보낸다.’ 하고, 이 승려를 조선으로 보내야 마땅하겠다 하고, 다음날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황제가 ‘우선 절에 머물러 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종실록』 17년(1417) 윤5월 9일.
명나라는 조선의 승려를 돌려보내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국가의 불교 지원이 크게 줄어들면서 명나라로 넘어가는 승려들이 늘고 있었다.
공조 참판 신개가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아뢰기를, “우리나라 승려 11명이 몰래 중국 북경에 이르렀는데, 황제가 명하여 금릉金陵 천주사天住寺로 보냈습니다. 예부 상서 여진이 신에게 우리나라 관제와 작질爵秩, 승려를 관할하는 관원, 승려 도첩의 유무에 대해 물었습니다.” 하였다.
- 『태종실록』 17년(1417) 7월 4일.
나옹화상의 사리를 들고 명나라로 간 조선 승려들
당시 명나라는 여러 경로를 통해 조선의 불교 정책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조선 조정에서도 승려들이 명나라로 가서 배불정책을 황제에게 고발할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두 임금(태종과 세종)이 수강궁 편전에서 촛불을 켜고 병조 참의 윤회·지신사 원숙을 불러서, 좌우의 근시를 물리치고 승려들의 사건에 대하여 말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오늘 주상이 나에게 승려 30명이 도망하여 중국에 들어간 사건을 보고하였다. … 지금 황제가 불교를 신봉하는 것이 양 무제보다 더 심하여, 《명칭가곡》을 외우는 소리가 천하에 퍼져 있고, 부처와 하늘 꽃을 그린 그림을 상서롭게 여기는 풍습이 파다하게 퍼져 쏠리듯이 그 풍습을 따라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사사寺社의 전민을 혁파하여 겨우 열에 하나만 남겨 두었고, 이번에 또 절의 노비를 모두 없앴으니, 비록 그들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찌 원망이 없겠는가. 이들이 이미 희망을 잃었고, 또 명나라 황제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반드시 도망하여 중국에 들어가 말을 꾸며서 참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 하였다.
- 『세종실록』 1년(1419) 12월 10일.

두 임금의 염려에 대해 변계량은 사찰의 남자 종[奴子]을 돌려주는 한편 동북면과 서북면 양계에 엄히 명령을 내려 승려의 월경을 막고, 또 이미 도망쳐 들어간 승려를 돌려보내도록 요청하자고 하였다. 반면에 허조는 불교의 신앙을 인정하고 양반 자제가 출가하여 거주하고 있는 서울 사찰에 남자 종을 돌려주는 것에는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노비 모두를 돌려주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결국 이튿날 여러 의견을 들은 상왕(태종)은 ‘승록사에 남자 종을 이속시켜 태조가 창건한 흥천사·흥덕사·흥복사에 보내고, 예조에서는 승려들이 원하는 바를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세종실록』 1년(1419) 12월 11일] 그런데 1421년에 두 임금의 염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승려 적휴適休·신연信然·신휴信休·홍적洪適·혜선惠禪·신담信淡·홍혜洪惠·신운信雲·해비海丕 등 9명이 요동에 들어가 요동도사에게 글을 올렸다.
“저희들은 본국의 금강산·오대산·묘향산 등 여러 산에서 살다가 … 3월 14일에 비로소 이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먼 공중에서 떨어졌다가 신령한 학을 탄 것과 같고, 큰 바다에 빠졌다가 배를 만난 것과 같으니, 그 기쁨을 어찌 다 말하리까. 저희들은 돈은 한 푼도 없고, 다만 법보인 정광여래 사리 두 개와 본국의 왕사 나옹화상의 사리 한 개를 모셔 와서 바치나이다. 삼가 원하옵건대, 대인께서는 우리들의 뜻을 살펴서 황제가 계시는 곳에 아뢰어 부처님 법을 널리 펼 수 있도록 도와주심을 바라나이다.”
- 『세종실록』 3년(1421) 5월 19일.
요동도사가 그 9명을 북경에 보냈는데, 그들의 본래 목적은 조선이 부처님 법을 높이지 않음을 호소하고, 명나라에 의지하여 조선의 불교를 부흥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적휴의 사촌형인 승려 상강을 비롯하여 스승인 처우處愚와 그 제자 신행信行·신기信琦 등을 의금부에 가두고 심문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휴 등이 명나라로 간 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나라에 9명의 승려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세종실록』 3년(1421) 6월 17일]하는 한편, 상강·처우 등을 풀어주었다.[『세종실록』 3년(1421) 6월 18일] 이후 이 9명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사건의 주동자는 경상도 합천 출신 적휴였다. 그는 요역을 피해 출가했으나 발각되자 도망하여 평안도 묘향산 내원사에 은거하다가 1421년 1월 16일에 8명의 승려를 꾀어서 요동으로 갔다.[『세종실록』 3년(1421) 7월 2일] 이들은 황제의 명으로 남경 천계사天界寺에 거주하였다.[『세종실록』 3년(1421) 8월 9일] 천계사는 남경의 취보문聚寶門 밖 선세교善世橋 남쪽에 위치한 사찰이다. 원나라 시기에는 용상집경사龍翔集慶寺라 불렸던 곳이다. 신운의 속가 형인 유철은 그들이 명나라로 가는 것을 알고도 놓아주었다는 이유로 중형을 받았다.[『세종실록』 3년(1421) 8월 27일] 이러한 사건이 빌미가 되어 양계의 많은 사찰들은 강제로 폐사되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평안도와 함길도는 땅이 다른 나라의 경계와 연하여, 무식한 승려들이 몰래 숨어 들어가는 자가 간혹 있으니, 평안도의 의주·삭주·강계·여연·벽동·창성·이산·인산·정녕과 함길도의 경원·경성·갑산 등 각 고을의 신구新舊 사사寺社를 모두 헐어 없애고, 승려들은 모두 남도의 각 고을로 옮겨 그 왕래를 금하되, 만일 금하는 것을 무릅쓰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자에게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하여 환속시켜 군역에 충당하고, 위에서 언급한 군의 이남에 있는 각 고을 사사는 한 고을마다 하나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며, 살고 있는 승려는 그 수를 정하여 본관과 연령 등을 장부에 명백히 기록해 두고, 정해진 수 외에 떠돌이 승려들은 거주를 허락하지 말며, … ”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15년(1433) 1월 21일.

양계의 사찰을 헐어도 좋다는 조정의 명령이 실행되었다. 게다가 그 이후 새로 설치한 회령·종성·온성·경흥·부거의 지역도 위와 같이 승려들이 사찰을 짓고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세종실록』 28년(1446) 2월 12일] 이후로는 승려가 국경을 넘어간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1471년에 국경을 넘어 요동으로 갔다가 붙잡혀 온 승려 지청志淸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성종실록』 2년 4월 21일 ; 6월 2일 ; 6월 22일)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승려 지청이 요동에 잠입한 죄는 법률상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하고, 부모 형제 등 가족들은 모두 2천 리 밖으로 유배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지청의 죄는 용서할 수 없으나, 그러나 지금 천변天變을 경계하고 두려워할 때이니, 사람을 죽이지 않고자 한다. 그에게 특별히 사형을 면하고 변방 고을의 종[奴]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 『성종실록』 2년(1471) 12월 12일.
지청의 형벌은, 사형을 집행할 때 가을까지 기다리는 것이 원칙이나 중죄를 범한 죄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형을 집행하는, 참부대시에 해당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자연 재앙을 이유로 사형을 면해 주었다. 위 기록을 통해 국경을 넘어간 자는 그 본인만이 아니라 부모와 형제까지도 2천 리 밖으로 유배 보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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