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적명 대종사 원적 … 텅 빔과 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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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0 년 2 월 [통권 제8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8,513회 / 댓글0건본문
원택 스님 | 발행인
매년 해오던 봉암사 산중공양을 기해년(2019년) 납월 14일(양력 2020년 1월8일)에 가기로 동안거 입제 아비라기도 회의에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께서 원적에 드셨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2019년 12월24일 저녁 무렵에 들려왔습니다. 다음 순간, 2018년 1월10일에 봉암사 산중공양 당시 뵈었을 때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시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2020년 1월 6일 봉암사에서 거행된 적명 스님 2재에 참석한 원택 스님. 사진 고심정사 자상인 불자
2019년 12월26일, 음력 납월 초하루 적명 큰스님 열반에 드신 소식을 듣고 침울해 하는 신도님들에게 한 말씀 드렸습니다. “적명 스님이 원적에 드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당황하였는지 모릅니다. 80세지만 여전히 희양산 정상을 맨손으로 갔다 왔다고 자랑하시던 모습이 생생해 스님의 떠나심을 실감할 수 없습니다. 적명 스님의 떠나심은, 성철 큰스님이 저에게 내리신 ‘차가운 논두렁을 베게 삼고, 푸른 별빛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수행자의 모습에 가깝다’는 말씀을 실천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며 신도님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스무 살 끝물 무렵 출가할 때 성철 큰스님이 저에게 내리신 말씀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속세의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당시의 머릿속에 큰스님 말씀이 고스란히 들어 올 리도 이해될 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택근 작가가 2017년 『성철 평전』(서울:모과나무)을 펴냈는데, 어디서 보셨는지, 큰스님이 저에게 내리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책 서두에 인용해 강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중 됐네. 머리만 깎았다고 출가자가 된 게 아니다. 수행자답게 살아야 한다. 야반삼경에 다 떨어진 걸망 하나 지고, 달빛 수북한 논두렁길을 걷다가, 차가운 논두렁을 베게삼아 베고, 푸른 별빛을 바라다보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조금이나마 수행자의 참모습에 가깝다.”
아무튼, 적명 스님께서 ‘조실’을 사양하고 겸손하게 ‘수좌’자리에 있으며 봉암사에 주석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나갑니다. “성철 큰스님의 ‘봉암사의 꿈’을 후대 수좌 스님들에게 전하는 계기로 삼자!”고 문도들이 결의해, 성철 대종사께서 열반에 드신 후 지금까지 매년 동안거에 백련암 신도님들이 봉암사 산중공양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적명 수좌 스님은 부임한 지 몇 년 동안은 별 관심을 두지 않으신 듯 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는 산중공양에 오는 백련암 신도님들을 반갑게 맞으셨습니다. 올 때 마다 법문해 주셨지만 더욱 정과 덕을 표하시며 흔연해하셨습니다. “내가 10년 가까이 있었지만 한 문중에서 이렇게 정성을 가지고 봉암사를 찾아주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데, 이제 몇 년만 더 오면 30년이 된다니 고맙고 고마운 일입니다.”고 덕담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인연이 깊은 적명 수좌 스님이 떠나셨다니 10여 년 동안 찾아뵈었던 신도님들의 마음이 텅 비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9년 12월26일 초하루 법문을 마치고 부산에서 14:00시 KTX를 타고 15시15분 김천 · 구미역에 도착, 마중 나온 일운 스님이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봉암사에 가니 16시30분경이 되었습니다. 빈소로 안내되어 단위에 안치되어 있는 진영을 대하니 울컥하는 마음에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텅 빔’이 밀려 왔습니다. 삼배를 드리고, 살아있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곱씹고 곱씹었습니다. 선원의 여러 스님들과 소임 스님들을 만나 뵈오니, 수좌 스님의 원적에 낙심하는 모습에 무슨 말을 더 보탤 수가 없었습니다. 봉암사 주지 스님은 “오일장을 치르며 49제는 매주 월요일마다 올린다.”고 했습니다.
백련암에 돌아가 천진성 보살님에게 저간의 사정을 알려드렸습니다. “우리가 적명 수좌스님과 대중 스님을 위해 8일 수요일에 산중공양을 가려고 예정하고 있었습니다. 적명 수좌 스님의 2재가 6일 월요일이라 하니, 이틀을 당겨 산중공양을 가서 재에 참석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다음날 보살님이 “회장 보살이 대중과 의논하니 다들 찬성한다고 합니다.”라는 연락을 전화로 주었습니다. 6일 오전 7시쯤 출발하려니 소한小寒 추위에 눈은 내리지 않고 가랑비만 내리고 있었습니다. 전날 법호륜 회장님에게 “봉암사는 선원이라 준비가 잘 갖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신도님들이 국화꽃 한 송이라도 영전에 올릴 수 있도록 준비해 갔으면 합니다.”고 말씀드렸더니 “벌써 버스 3대가 준비되었습니다. 내일 이곳저곳에서 신도들이 문상하러 온다니 국화꽃 150송이를 준비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6일 10시30분, 재를 마치고 봉암사 대중 스님들이 법당을 떠나자, 140여 명에 가까운 백련암 신도님들이 5명씩 국화꽃을 적명 수좌 스님 영전에 올리고 삼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후 108배, 능엄주 독송 등을 마치고 12시10분쯤 대웅전 앞마당에서 단체기념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쏟아지는 함박눈을 반가워하며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려 공양간으로 갈 때즈음, 20여분 쏟아지던 눈발이 서서히 개이기 시작했습니다. 12시30분이 지나 일행들이 용추계곡에 모셔져 있는 마애석불을 친견하러 떠나 돌아오는 14:00까지, 함박눈이 내리다가 목화송이만큼 큰 눈으로 변하기도 하는 등 눈이 여러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겨울 눈 구경을 제대로 못한 부산 보살님들이 뜻밖의 눈에 동심으로 돌아간 듯 했습니다. 떠나신 적명 수좌 스님이 눈꽃 잔치로 신도들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셨다고 모두 숙연해 했습니다.
“적명 수좌 스님! 백련암 신도님들의 마음을 곱게 어루만져주시고 극락세계에 편히 가셨다가 속히 사바세계로 다시 오시어, 중생들을 불국정토로 이끌어 주십시오.”
적명 스님 2재에 참석한 고심정사 신도들이 봉암사 대웅보전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2020년 1월 6일. 사진 자상인 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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