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및 특별서평]
“완결된 메시지를 담은 미완의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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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 2019 년 4 월 [통권 제7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603회 / 댓글0건본문
김성동 | 도서출판 어의운하 대표
“1933년 유마경 번역을 시작하였다.” 작년 11월 만해 한용운 연구의 글을 읽다가, 이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듣는 정보였다. 만해의 저작물들 중 『유마경』이 있었나? 자료를 검색해도 만해가 번역한 『유마경』은 나오지 않았다. 만해를 다룬 수많은 연구 논문과 책들 중에 만해의 『유마경』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시 자료를 살폈고, 주변을 탐문한 후 만해가 심우장에서 1933년 『유마경』 번역을 시작했고, 제6 「부사의품」 일부까지 번역된 이 번역 원고가 400자 원고지 총 148장 분량으로 전해졌으며, 이 육필 원고를 후학들이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 발간된 『한용운전집』(전6권) 제3권에 수록했고, 「유마힐소설경강의」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것을 알았다.(이 육필 원고지는 후에 산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용운전집』에 실린 불교학자 조명기 선생의 해제를 읽으면서 만해의 「유마힐소설경강의」가 완역이 아닌, 절반의 번역본임을 확인했다. 안타까웠지만, 만해가 한글로 처음 번역한 경전이 『유마경』이었다는 것, 그리고 전문가들뿐 아니라 불교 대중들 대부분 만해가 한글로 번역한 『유마경』을 접해보지 못했다는 것 등은 나에게 ‘이 『유마경』을 출간해야겠다’는 마음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한용운전집』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정보를 나에게 주었다. 만해가 번역을 시작한 지 7년 후인 1940년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강의」를 연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만해연보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곧바로 1940년 『불교』지 2월호를 확인했다.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一)」. 필자는 失牛. 실우. 잃어버린 소. 만해가 쓰는 필명이다. 보물을 만난 듯했다. 세로쓰기로 쓰인 「불국품」을 읽자, 마치 만해가 79년의 시간을 거슬러 나타난 듯, 혹은 내가 79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 듯, 만해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1940년 2월에 연재된 「유마힐소설경강의」는 『한용운전집』에도 없는 자료였고, 79년 만에 처음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연재물의 분량은 『한용운전집』에 실린 육필 원고와 비교할 때 약 10배 가까이 많았다. 이 차이는 약 7년의 기간 동안 만해가 육필 원고 중에서 특히 한글 번역문의 주해註解를 풍부하게 보완했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주해를 읽어보면, 만해가 수많은 경전을 탐구했던 당대 최고의 불교사상가였음을 새삼 알게 된다. 너무나 안타깝지만, 이 연재는 2회만 진행된 채 멈춘다. 나는 『불교』지의 연재분과 『한용운전집』에 실린 육필 원고를 모아, 지난 2019년 3월1일 『만해의 마지막 유마경』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의 해제에서 서재영 박사가 밝혔듯이 『만해의 마지막 유마경』은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론 남겨진 과제도 있다.
첫째는 미완성 번역이란 점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후학들은 만해가 한글로 번역한 『유마경』 출간을 검토하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미완의 번역이지만, 절반의 번역만으로도 만해가 경전을 어떤 시선으로 해석하고 있는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만해는 “중생을 떠나서는 따로 불佛이 없으며, 예토穢土를 떠나서는 따로 정토가 없음을 보임이다”라며 부처님과 보적의 대화를 바라본다. 만해의 『유마경』이 완역이 아니지만, 미완성 속에도 완결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한글로 번역된 첫 『유마경』이란 점이다. 만해는 1933년 『한글』(제2권 1호)지에 쓴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보급방법’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이제야 세상에 나온 것은 너무나 늦었습니다. (중략) 우리 불교 기관에서는 이번에 나온 새 철자법을 실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힐 만큼 한글 보급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때문에 1913년에 발간된 『조선불교유신론』, 1914년에 발행된 『불교대전』이 한문을 중심으로 썼기에 누군가의 번역 등을 거쳐야 이해될 수 있지만, 1933년부터 번역하기 시작한 만해의 『유마경』은 한글 중심이기 때문에 오늘날 누구나 정독하면 그 뜻을 읽을 수 있다.
셋째는 6세부터 한문을 익히며 14세에 이미 한학의 천재 소리를 듣던 대가의 번역이란 점이다. 특히 1914년, 그가 36세에 편찬한 『불교대전』은 한역대장경과 남전대장경 등을 면밀하게 살핀 후 주제별로 분류해 재구성한 것이다. 인용 경전이 모두 444부에 이를 만큼 이 작업은 가히 지금까지도 어느 누구 실행하지 못한 대장경의 축소판인 셈이다. 그만큼 그는 불교사상과 내전에 깊은 안목을 갖춘 사람이었다. 『유마경』이 당대의 가장 위대한 경전 번역가며, 사상가인 만해의 한글 번역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넷째는 만해가 말년에 번역한 유일한 경전이란 점이다. 기록에 따르면 만해는 『유마경』을 1933년부터 번역한다. 생애 첫 온전한 한글 번역인 셈이다. 그리고 첫 연재를 1940년 『불교』지 2월호에 시작한 후 통합호인 3~4월호까지 연재한 후 중단된다. 왜 중단됐는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1940년이면 그의 나이 62세다. 이미 이때부터 만해는 병환으로 몸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기에 건강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 즈음 불편한 몸으로 창씨개명 반대운동에 강력하게 앞장섰던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만해는 4년 후 세상을 떠난다.
만해는 왜 삶의 완숙기에 수많은 경전 중 『유마경』 번역을 시작했을까. 『유마경』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뜻은 무엇이었을까. 만해가 남긴 미완의 유작으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불교계 편집자의 한 사람으로서 만해가 남긴 미완의 유작인 『유마경』을 대중에게 알리며 그 물음을 스스로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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