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마음 돈오’와 혜능의 무념·무상·무주 그리고 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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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5 년 10 월 [통권 제150호] / / 작성일25-10-03 17:13 / 조회132회 / 댓글0건본문
선사상과 수행의 요점: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
혜능慧能(638〜713)은 대승 경론에서 즐겨 사용하는 무상無相과 무주無住라는 말을 ‘무념無念의 선 수행’과 연결하여 선종의 선관禪觀을 펼친다. 이후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는 선종 선사상과 수행의 핵심을 담는 용어가 된다.
혜능은 ‘잘못 분별하는 생각이 없음[無念]’을 으뜸[宗], ‘[불변·독자의 본질/실체인] 차이가 없음[無相]’을 토대[體], ‘[사실을 왜곡하여 분별하는 집착에] 머물지 않음[無住]’을 근본[本]이라 부르면서 세 가지의 내용을 결합한다.
혜능의 설법에서 특히 주목되는 내용은 무념·무상·무주에 대한 정의定義다. 그에 따르면, 무념無念은 〈생각하면서도 [사실을 왜곡하면서] 생각하지 않는 것〉(於念而不念)이고, 무상無相은 〈차이에 있으면서도 차이[에 대한 왜곡]에서 벗어나는 것〉(於相而離相)이며, 무주無住는 〈‘[사실 그대로 보는] 인간 본연의 면모[人本性]’가 되어 생각마다 [사실을 왜곡하여 분별하는 집착에] 머물지 않는 것〉(爲人本性, 念念不住)이다.(주1)
무념無念 법문
인간의 모든 느낌·지각·사유·인식·경험은 현상의 ‘특징을 지닌 차이[相]’와 접속하면서 발생한다. 좋거나 좋지 않은 느낌은 ‘분간할 수 있는 다른 특징을 지닌 차이’에 기대어 생겨난다.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현상은 ‘특징을 지닌 차이들’로서 나타나며, 생명체의 모든 경험은 ‘대상이 지닌 특징적 차이’와의 관계/만남에서 이루어진다. 단언컨대 ‘특징을 지닌 차이들’을 떠나서는 어떤 경험도 생겨나지 않는다. 붓다의 육근수호 법설은 이 점을 해탈 수행법과 연결시키고 있다.
무념은, 〈‘특징을 지닌 차이[相]’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지적 경험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특징적 차이의 사실 그대로[實相]’를 왜곡하지 않는 인지 작용을 펼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육근수호 법설의 요결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 무념은 사유의 제거나 멈춤이 아니다. 만약 사유 자체를 제거하거나 그치는 것을 무념의 경지라고 생각한다면, 삶 자체를 증발시키는 것을 깨달음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혜능은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대상[境]에서 떠나 생각[念]을 일으키지 않지만, 만약 생각함[有念]이 없다면 ‘생각이 없음[無念]’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을 아예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을 모두 없애려 하지 말라. 한 생각이라도 [완전히] 끊어지면 곧 죽어, 다른 곳에서 삶을 받는다.” 이러한 무념의 선관禪觀은, 상수멸정想受滅定을 ‘지각과 느낌의 완전한 소멸 경지’로 보는 류類의 전통 선정관禪定觀에 대한 명백한 비판이다. 원효도 같은 비판을 하고 있다.

생각·사유는 그 발생 조건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연기적 현상이다. 발생시키는 조건을 달리하면 다른 차원, 다른 내용의 생각·사유가 된다. 혜능의 무념 설법은 이 점을 통찰하고 있다. ‘생각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생각 발생의 조건을 바꾸는 것’이 무념이라 보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생각에서 대상[에 대한 잘못된 분별]을 벗어나면 현상에서 ‘[잘못 분별하는] 생각[念]’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연에 접했을 때 미혹한 사람은 ‘[특징적 차이를 지닌] 대상[境]’에 대해 ‘[잘못 분별하는] 생각[念]’을 내고 [그] ‘[잘못 분별하는] 생각[念]’ 위에서 곧 ‘삿된 견해[邪見]’를 일으키니, 모든 번뇌 망상이 이로부터 생겨난다.” 붓다의 육근수호 법설과 희론 망상 설법이 설하는 요점이 아니던가.
차이 현상 위에 불변 본질·실체의 옷을 입혀 왜곡시키던 차별의 망상 번뇌에서 빠져나오면, 생각[念]을 발생시키는 토대 조건은 ‘참 그대로, 사실 그대로[眞如]가 되고, 생각[念]은 ‘참 그대로, 사실 그대로[眞如]’의 현현[用]이 된다. 그럴 때는 감관능력[六根]에서 발생하는 모든 인지 현상이 ‘현상의 사실 그대로’에 상응한다. 그래서 혜능은 말한다. “‘무無’라는 것은 〈‘[불변·독자의 본질/실체로서 차별되어] 나누어진 차이[二相]’에서 생겨난 모든 번뇌〉(二相諸塵勞)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불변·독자의 본질/실체로서 차별되어] 나누어진 차이[二相]’에서 생겨난 모든 번뇌〉(二相諸塵勞)에서 벗어나면] ‘참 그대로[眞如]’가 생각함의 토대[體]이며, 생각함[念]은 ‘참 그대로[眞如]’의 현현[用]이다. [‘참 그대로[眞如]’를 보는] 본연[性]에서 생각을 일으키기에 비록 [‘여섯 가지 감관능력[六根]’으로] 보고[見] 듣고[聞] 느끼고[覺] 인지하여도[知] 모든 대상을 오염시키지 않고 늘 [왜곡하는 분별에서] 자유롭다.”
무주無住 법문
붓다의 육근수호 법설은, 감관능력이 ‘특징을 지닌 차이[相]’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는가에 따라 ‘해로움’과 ‘이로움’, ‘무명의 길’과 ‘지혜의 길’로 갈라진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눈·귀·코·혀·몸·의식/마음이 그에 상응하는 대상과 관계 맺을 때, 대상의 ‘전체적 차이/특징[nimitta, 相]’과 ‘부분적 차이/특징[anuvyañjana, 細相]’을 불변 본질·실체 관념으로 움켜쥐면 감관능력을 수호하지 못하게 되어 해로움이 삶과 세상에 밀려든다. 반면에 불변 본질·실체 관념으로 움켜쥐지 않으면 감관능력을 수호하게 되어 이로움이 삶과 세상을 채운다. 그리고 움켜쥐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의 핵심은 알아차림[正知, sampajānāti]이라는 것이다.
혜능의 ‘[사실을 왜곡하여 분별하는 집착에] 머물지 않음[無住]’ 설법은 붓다의 육근수호 법설과 그대로 통하고 있다. 〈생각마다 불변·독자의 본질/실체 관념으로 대상을 오염시키는 일을 붙들어 머물지 않는 것〉(念念不住)이 발생 조건이 되어, 〈차이 현상들과 접속해 있으면서도 차이에 대한 왜곡과 차별에서 벗어남〉(於相而離相)이 가능해진다. 그리하여 감관능력[六根]과 대상[六境]과의 관계는 이로움을 발생시킨다. 그 이로움은 ‘사실 그대로의 차이들과의 만남으로 인한 이로움’이고 ‘진실에 기반한 이로움’이다. 감관능력[六根]에서 발생하는 모든 인지 현상이 ‘현상의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혜능과 선종의 선관禪觀은 붓다의 선관과 이렇게 통한다. 혜능을 비롯한 선종은, 〈붓다의 알아차림(sampajānāti) 마음수행 → 유식무경唯識無境 마음수행 → ’공관을 품은 유식관‘에 의거한 원효의 일심一心 마음수행〉이 간직해 온 마음수행의 의미를 계승하여 개성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무상無相 법문
붓다의 길[中道]은 ‘변화·관계의 차이 현상[相]’과 접속을 끊는 길이 아니다. 인간의 인식과 경험은, 그 어떤 수준과 내용일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관계의 차이 현상과의 만남’을 그 발생 조건으로 삼는다. 중생이든 부처든, 관계 속에서 변하는 차이 현상이 제거되면 인식과 경험의 내용이 사라진다. 그것은 근거의 박탈이고 허무다. 붓다의 모든 법설은 이 통찰에 기대어 변주되고 있다. 붓다의 길은 ‘변화·관계의 차이 현상과 접속한 채 자유·평안·진실의 이로움을 구현하는 길’이다. 혜능은 ‘무상無相’을 〈차이에 있으면서도 차이[에 대한 왜곡]에서 벗어나는 것〉(於相而離相)이라 설한다. 붓다의 길이 어떤 특징을 지닌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혜능의 이러한 안목은 흥미롭게도 동시대의 조금 앞선 인물인 원효(617〜686)의 안목과도 겹친다. 〈‘특징적 차이 현상[相]’에 대한 인식적 왜곡 및 그로 인한 개인적·사회적 불화와 고통〉이 원효를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이고, 〈‘특징적 차이 현상[相]’들과의 접속을 유지하면서 차이로 인한 개인적·사회적 불화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통찰과 방법론〉이 원효사상의 일관된 지향이기 때문이다. 원효의 평생 탐구는, ‘왜곡·오염되어 부당하게 차별된 차이와 그 해로움’ 및 ‘제대로 이해된 사실 그대로의 차이와 그 이로움’에 관한 통찰로 귀결된다. 화쟁사상도 그 연장선에 있다.
좌선은 ‘대상 집중’이 아니다
선종 연구자들은 흔히 〈선종은 좌선을 부정한다〉라고 말한다. 선종 선사상에 대한 ‘이해주의 독법’이다. 〈선종은 원래 선정 수행을 거부하고 이해를 통한 견성을 강조한 것이다. 간화선 이전의 조사선은 ‘이해를 통한 깨달음’을 설했는데, 간화선에 오면서 선정 수행으로 풍토가 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선종의 원래 정신과 수행법을 회복하려면 간화선 이전의 이해 깨달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혜능의 좌선 법문,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이 집중 선정관으로 좌선하는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을 일깨워 깨닫게 한 일화(주2)에 대한 의미 해석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선종의 현재에서 목격되는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는 공감하지만, 대안과 출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혜능은 좌선에 대해 이렇게 설한다.
이제 이미 이와 같다면, 이 가르침에서는 무엇을 좌선이라 부르는가? 이 가르침에서는 모든 것에 [미혹으로] 걸림이 없으니, 밖으로 모든 대상에 대해 ‘[잘못 분별하는] 생각[念]’을 일으키지 않음이 앉음[坐]이 되고 [안으로] ‘[사실 그대로 보는] 본연의 면모에 눈떠[見本性]’ 어지럽지 않음이 선禪이 된다. … 단지 대상과의 접촉을 인연 삼아 접촉하면 곧 어지러워지니, ‘[불변·독자의 본질/실체로서 왜곡된] 차이[相]’에서 벗어나 어지럽지 않음이 곧 정定이다. 밖으로 ‘[불변·독자의 본질/실체로서 왜곡된] 차이[相]’에서 벗어남이 곧 선禪이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곧 정定이니, 밖으로 선禪이고 안으로 정定이기 때문에 선정이라 한다.(주3)
혜능의 좌선 법문은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 법문의 변주다. 좌선의 의미와 내용을 채우는 것은, ‘생각하면서도 [사실을 왜곡하면서] 생각하지 않는[於念而不念]’ 무념無念, ‘차이에 있으면서도 차이[에 대한 왜곡]에서 벗어나는[於相而離相]’ 무상無相, ‘[사실 그대로 보는] 인간 본연의 면모가 되어 생각마다 [사실을 왜곡하여 분별하는 집착에] 머물지 않는[爲人本性, 念念不住]’ 무주無住다. 변화·관계의 차이 현상에 있으면서도 차이[에 대한 왜곡]에서 벗어나고[無相], 차이 현상들을 불변·독자의 본질/실체로 왜곡하여 차별 세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분별을 붙들지 않으며[無住], 그리하여 ‘차이 현상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자리[本心, 自性, 本性]’에 눈떠[見性], 그 자리에서 차이 현상들에 대한 왜곡과 오염 없이 사유 작용을 펼치는 것[無念]. - 이것이 좌선과 선정 수행의 의미이자 내용이다. 후일 마조도일 선사는 남악회양 선사의 좌선 법문으로 인해 ‘무념의 마음 돈오 좌선법’에 눈떠 혜능의 법을 이을 수 있었다.

선禪의 탐구에서, 세 가지는 반드시 되짚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의 깨달음을 이해로 환원시키는 ‘이해주의 독법’, 선 수행의 목표를 ‘불변 궁극실재와의 합일’로 보는 ‘신비주의 선관’, 선 수행의 방법을 ‘대상 집중’으로 보는 ‘대상 집중 선정관’이 그것이다. 세 가지 모두 불교 내부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그 타당성을 되묻는 질문 자체가 불편하겠지만, 반드시 되묻고 견실한 내용으로 답해 보아야 한다. ‘붓다의 알아차림(sampajānāti) 마음수행’과 ‘선종의 마음 돈오’를, 필자는 ‘이해를 굴리는 마음 국면에서의 행보’로 본다.
원효의 일심 깨달음도 ‘이해를 굴리는 마음 행보’의 지평 전환이다. ‘이해를 굴리는 마음 국면 바꾸기 수행’은, 그 과정에서는 이해를 활용하고, 도착지에서는 궁극의 이해를 밝힌다. 오직 이해가 이해로 이끌어가는 지적知的 행보가 아니다. 선 수행은, ‘궁극 실재를 드러내기 위한 대상 집중’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이해 계열을 선택하여 굴려 가는 마음 국면’에 눈떠 간수해 가는 노력〉이라 본다. 덧붙이자면, 명상이나 선 수행의 효과를 뇌과학적으로 입증해 보는 작업에서는, 어떤 선관禪觀에 따른 뇌 현상 변화인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그러면 관찰 자료에 대한 의미 해석과 평가에 새로운 길이 열린다.
<각주>
(주1) 『돈황본 육조단경』, “善知識, 我自法門, 從上已來, 頓漸皆立, 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何名爲相無相? 於相而離相. 無念者, 於念而不念. 無住者, 爲人本性, 念念不住.”
(주2) 회양이 말했다.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지 못할진대, 좌선으로 어찌 부처를 이룹니까?” 도일이 말했다. “어찌해야 맞습니까?” 회양이 말했다. “만일 소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맞습니까, 소를 때려야 맞습니까?” (『마조도일선사광록馬祖道一禪師廣錄』)
(주3) 『돈황본 육조단경』, “今旣如是, 此法門中, 何名坐禪? 此法門中, 一切無礙, 外於一切境界上, 念不起爲坐, 見本性不亂爲禪. … 只緣境觸, 觸卽亂, 離相不亂卽定. 外離相卽禪, 内不亂卽定, 外禪内定, 故名禪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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