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 스님의 호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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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5 년 10 월 [통권 제150호] / / 작성일25-10-03 17:47 / 조회129회 / 댓글0건본문
고려시대 이래 국가에서는 승록사僧錄司를 설치하여 출가한 승려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승적僧籍을 관리하고 사찰의 주지 임명 및 고승의 장례 등 불교행정 전반을 관장하게 하였다. 승려는 일반 백성과 달리 출가자로서 승적에 등재되어 있어서, 전조田租·신역身役·호공戶貢을 거두기 위해 작성하는 호적戶籍에는 그 이름이 실려 있지 않았다. ‘출가자’라는 말 자체가 집을 떠난 사람이라는 의미이므로 호적에 그 이름이 실려 있다면, 승적과 호적에 모두 이름이 오르게 되어 속세의 남은 가족이 출가자의 세금까지 떠맡아야 하는 병폐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는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도 이어졌다.
조숭덕이 명나라 황제에게 전달할 문서를 가지고 북경에 이르러 아뢰었다. “… 우리나라에서는 승속僧俗의 백성이 모두 적籍에 실려 있는데, 승려 적휴適休는 함부로 조선의 역役을 피하고 승려들을 꾀어내어 함께 도망하여 명나라에 이른 자입니다. 이에 도리상 마땅히 아뢰는 것입니다.” - 『세종실록』 3년(1421) 7월 2일.
학자에 따라서는 위 글의 “승속이 모두 적에 실려 있다.”는 문구를 인용할 적에 승려도 호적에 등재된 것처럼 해석하기도 하지만, 승려의 경우는 호적이 아니라 승적에 등재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당시에는 승록사가 엄연히 건재하였고, 특히 승려들은 신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군역이나 요역의 의무가 없어서 도첩度牒을 발급받아 그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도평의사사의 배극렴·조준 등이 상언하기를, “무릇 승려가 되려는 사람이 양반의 자제이면 오승포五升布 1백 필을, 서인이면 1백 50필을, 천인이면 2백 필을 바치게 하여, 거주하고 있는 소재지의 관청에서 바친 베의 숫자를 계산하여 맞으면 ‘도첩’을 주어 출가하게 하고, 제 마음대로 출가하는 사람은 엄격히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 『태조실록』 1년(1392) 9월 24일.
3년에서 5년치 급여를 내야 받을 수 있는 도첩
당시 15~40세 노비의 값이 오승포 1백 50필이고, 노비의 한 달 급여가 3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승려가 되기 위해 바치는 100~200필은 적은 수치가 아니었다.[『태조실록』 7년(1398) 6월 18일] 그렇게 100~200필의 오승포를 바친 출가자에게 국가에서 ‘도첩’을 발급하여 승려로서 인정해 주고 승적에 올려 군역이나 요역 등의 신역을 면제해 주었다.

한편,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왕족·양반으로부터 양인·노비에 이르기까지 16~60세의 모든 남성을 대상으로 개인 신분증이라 할 수 있는 호패號牌를 발급하였다. 태조 대에 도평의사사에서 호패법을 처음 건의하였고, 태종 대에 이르러 시행하게 되었던 것이다.[『태종실록』 2년(1402) 8월 2일] 호패제도는 지속적으로 실시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중단되었는데, 1416년(태종 16) 6월 폐지, 1459년(세조 5) 2월 실시, 1469년(성종 즉위) 12월 폐지, 1610년(광해군 2) 9월 실시, 1612년 7월 폐지, 1626년(인조 4) 1월 실시, 1627년 1월 폐지, 1675년(숙종 1) 11월 실시 등의 변천을 겪으면서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지속되었다.
호패제도가 때때로 중단되었던 것은 백성들이 호패를 받으면 자신의 국역이 늘어날 것을 염려하여 호패 받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호패제도를 실시할 때 승려에 관한 사항은 보이지 않고, 세조 대에 이르러 도첩을 받은 승려에게 호패를 발급하는 ‘승인호패법僧人號牌法’을 제정하였다.
임금이 우찬성 구치관과 병조참판 김국광에게 묻기를, “승려의 호패를 상세히 갖추기 어렵지만 내 생각으로는, 서울은 선교양종으로 하여금 출가한 사찰과 승려의 생김새를 기록하여 해당 관청에 보고하게 하고, 지방은 여러 산의 중심이 되는 사찰로 하여금 승려를 기록하여 그 고을에 알리면 고을에서 도장을 찍어 주도록 하고, 만일 도첩에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호패를 주지 말고 가려내어 환속시키려고 하는데 어떠하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므로 마침내 ‘승인호패법’을 정하였다.
- 『세조실록』 7년(1461) 8월 12일.

승인호패법을 제정하면서 둥근 패牌에 인적사항을 표기하도록 하였으나 그 규정이 모호하여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호패의 모양과 크기 및 기입할 내용 등에 대해 자세히 정하였다.[『세조실록』 9년(1463) 1월 12일]
一. 호패는 원형 지름 2치[寸]이며, 앞에는 직명·생년·생김새를 쓸 것.
一. 앞뒤의 상·하단에 증명하는 도장으로 서울은 ‘예조’를, 지방은 ‘읍명’을 찍을 것.
一. 서울은 선교양종에서 각각 그 소속한 절에 사는 승려의 직명·생년·생김새를 갖추어 예조에 보고하고, 지방은 사찰에서 맡은 소임을 서울의 예에 따라 그 읍에 써서 보고하되, 호패를 받을 때는 각각 도첩을 가지고 직접 예조와 지방관에 가서 대조하여 확인한 뒤에 호패를 발급받으며, 그 가운데 나이 50세 이상과 심행心行이 증명되는 자는 비록 도첩이 없더라도 호패를 발급할 것.
一. 서울과 지방은 호패를 발급한 승려를 승적에 올리되, 서울 승려는 선교양종과 예조에, 지방 승려는 그 읍과 예조에 간직하고, 호패를 잃어버린 자는 승적을 살펴서 다시 발급할 것.
폐지와 부활을 거듭한 승인호패법
호패는 남자 승려인 비구만 착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 승려인 비구니 역시 지니고 다니도록 했다. 임금은 “여자 승려의 호패를 남자 승려의 예와 같이 시행하라.”[『세조실록』 13년(1467) 9월 20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모든 남녀 승려들이 호패를 착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승인호패제도 역시 왕조의 정책에 따라 존폐를 거듭하였다.
임금이 의정부에 명하기를, “호패법은 양민과 천인의 인구수를 알려고 한 것인데, 이제 그 수효를 알게 되었고, 또 시행한 지가 10여 년이나 되었다. 그사이 죽은 사람도 많았을 터인데 한 사람도 호패를 돌려주는 이가 없으니, 이는 분명히 호패 없는 사람들이 필시 돌아가면서 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이것이 어찌 법을 제정한 본뜻이겠는가? …” 하였다. - 『성종실록』 즉위년(1469) 12월 6일.
성종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성의 호패법을 폐지하였는데, 이때 승려의 호패 착용 역시 폐지되었다. 그런데 승려의 경우는 군역을 면제받는 신분이므로 승적에 기재되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승려의 신분을 인정해 주는 도승법度僧法도 폐지되었기 때문에 승복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군역을 면제받는 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이거인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러한 자들을 쇄환하여 내는 방책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다시 호패제도를 복구해서 모든 승려가 호패를 차도록 하되 호패가 없는 승려에게 벌을 주는 것이 첫째이고 … ” 하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호패제도는 혁파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지금 다시 세워서 승려들에게만 차게 할 수는 없습니다. … 청컨대 거행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성종실록』 13년(1482) 3월 26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절도사의 입장에서는 군역을 부과해야 할 자원을 파악하기 위해 군역을 피해 승려로 위장한 백성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승인호패법의 복구를 요청하였으나 조정 대신들은 승려들만 호패를 차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중종 대에 이르러 다시 승인호패법이 부활되었다.
임금이 명하기를, “양정良丁으로서 출가한 자는 신역身役을 시킨 뒤에 호패를 주기로 이미 의논하여 결정했다. 그렇다고 공사公私의 천민으로서 출가하여 승려가 된 자도 함께 신역을 시킨 뒤에 호패를 준다면, 사람들이 기꺼이 승려가 되어 공사의 천민 수효가 줄어들 것이니 그것은 옳지 못할 것 같다. … 아직 승려가 되지 않은 자는 엄격히 금지하고 이미 승려 된 자는 모두 신역을 시킨 뒤에 호패를 주는 일에 대해 사관史官을 보내어 대신과 의논하라.” 하였다.
- 『중종실록』 30년(1535) 11월 19일.
중종은 왕위에 오른 초기에 연산군 대의 폐정을 개혁하였지만 불교에 대해서만큼은 냉소적이었다. 승과僧科를 시행하지 않았고 도첩을 발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경국대전』의 도승度僧에 관한 조문까지 삭제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 11년(1516) 12월 16일] 그러나 신역은 국가 운영의 중대사이고 상당수의 승려들이 그와 관련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승인호패법을 복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1536년(중종 31) 5월에 한강 광나루 부근의 물목인 견항犬項의 제방 공사에 승려들을 동원하여 작업 일수를 채우면 호패를 지급하였는데 수천 명의 승려들이 공사에 참여하였다. 또 그 이듬해(1537) 2월과 4월에 태안반도 안행량 포구와 의항진 공사에 승려들을 동원하여 호패를 지급했다. 호패를 받은 승려는 군역을 면제받으므로 유생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래서 호패법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가 거듭 올라갔다.
오늘날 불교가 쇠미한 것 같으나 승도들이 많기는 지금보다 더한 적이 없으며, 호패를 믿고서 교만을 부리는 것이 매우 심하고 포악스럽고 광패스러워 살인·약탈·간음을 기탄없이 하니, 백성의 피해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 『중종실록』 33년(1538) 9월 27일.
호패를 발급받은 승려들은 군역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래서 너도나도 머리를 깎고 호패를 발급받다 보니 승려 수가 늘어났다. 호패법을 제정한 의미가 점차 무색해지고 있었다. 호패가 있는 자는 승려로 두고 호패가 없는 자는 환속시킨다면 승려들을 감소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사찰에는 호패가 있는 자와 없는 승려가 섞여 살고 있었다.[『중종실록』 34년(1539) 6월 10일] 그 후 명종 대에 문정왕후에 의해 불교가 중흥되면서 호패제도 역시 유명무실하게 시행되고 있다가,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 사후에 모든 불교 관련 국가 제도가 철폐되면서 승인호패법 역시 폐지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가로부터 도첩이나 호패를 받은 승려들은 군역의 의무가 없었지만 새로 출가하는 승려에게 국가에서 도첩이나 호패를 발급하지 않으면서 점차 승려의 신분이 모호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승려들의 의승군으로 참전하면서 상황은 또다시 급변하였다. 전쟁에 참여한 의승병들은 도첩을 발급받았고, 전쟁 후에도 산성의 수축 등에 동원된 승려들은 도첩을 발급받았다. 광해군 대와 인조 대에 잠시 호패제도를 복구하여 시행할 때에 승려도 호패를 착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승려를 통제하는 국가 기구가 없어서 승려의 신분이 모호하였다. 그래서 숙종 대에 이르러 국역을 담당하는 백성의 일원으로 승려를 받아들이기 위해 사찰마다 승려의 호적을 만들도록 하였다.

윤휴가 아뢰기를, “전부터 승려들은 호적에 넣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땅히 그들의 본향本鄕으로 하여금 호적에 넣게 하여 대략이나마 통제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듯하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 『숙종실록』 1년(1675) 5월 9일.
승려를 호적에 등재함으로써 출가자로서 특권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고, 승려의 신분도 분명해져 국역의 의무를 져야 하는 일반 백성과 완벽히 같은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다만 승려의 거주지가 사찰이었을 뿐이다. 1681년(숙종 7) 대구 호적에 수록된 팔공산 동화사 승려 지인智仁의 호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화사. 양인승[良僧] 지인智仁. 나이 65세 정사생. 본관 성주. 부 정병正兵 이춘억李春億. 모 양녀良女 이소사李召史. 본관 전주. 솔상좌 양인[良] 무경(취흡으로 개명). 나이 20세 임인생.
위의 호적을 통해 승려의 소속 사찰, 출가 이전의 신분, 법명, 나이, 본관, 부모, 제자 등의 정보를 알 수 있다. 즉 동화사 소속의 승려 지인은 성주 이씨 춘억과 전주 이씨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며, 양인 신분으로서 출가하여 양인 신분의 무경을 제자로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승려들이 호적에 등재되었다는 것은 호패를 발급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승려들은 갑오개혁으로 호패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일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호패를 착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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