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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그 숲을 걷다]
성철 스님과 <종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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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  2015 년 11 월 [통권 제31호]  /     /  작성일20-07-30 11:38  /   조회4,96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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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2학기에 필자는 연세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서 강좌 하나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도교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이다. 강좌 제목이 ‘<종경록> 강독’이어서 지금 6명의 대학원생들과 같이 <종경록>을 읽는 중이다. 9월 개강 이후 여섯 번의 수업을 진행했는데, 이제 겨우 <종경록> 제1권의 「표종장」 부분까지 읽을 수 있었다. 대장경(大藏經)에 실린 분량으로 보면 3페이지 정도이지만, 「표종장」에 나오는 질문과 대답의 의도를 파악하고 인용된 경론의 전거를 확인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다. 

 

이번에 번역된 <명추회요>의 774쪽을 보면 <종경록> 100권을 <명추회요> 3권으로 추려낸 장본인인 영원 유청(?-1115) 스님의 발문(跋文)이 나온다. 발문이란 책의 끝부분에서 그 책을 간행하게 된 경위 등을 짧게 적은 글을 가리킨다. <명추회요> 겉표지를 보면 이 책을 엮은이가 회당 조심 스님으로 되어 있지만, 발문을 보면 실제로는 스님의 제자인 유청 스님이 이 작업을 주로 진행해서 마무리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유청 스님의 스승인 조심(1025-1100) 스님은 <종경록> 읽기를 무척 좋아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요긴한 부분을 뽑아 정리하려는 마음을 내셨다. 그러나 조심 스님은 노년의 건강 때문에 이 일을 바로 끝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제자인 유청 스님이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이 작업을 완수했는데, 여름 이후 시작한 작업을 그 다음 해 봄에 다 마쳤다고 하니, 1년이 채 안 걸린 셈이다. 한문을 모국어로 삼아 사유하던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종경록>의 「표종장」은 분량이 그리 많지 않지만, 그곳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몇 사람에게 뽑아내보라고 한다면, 그 내용이 어느 정도 일치할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다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명추회요>를 보면, 유청 스님은 <종경록>의 「표종장」에서 세 부분을 발췌해낸 것을 볼 수 있고, 성철 스님은 <선문정로>의 제1장에서 「표종장」의 마지막 부분을 집중 인용한 뒤 이를 셋으로 나누어 각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각자 다르게 인용한 내용을 통해 거꾸로 그 문장을 인용한 사람의 의도를 파악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성철 스님께서 <선문정로>의 맨 앞에 인용한 부분은 아래와 같은데, 스님께서 직접 번역하신 내용을 적어보자.

 

견성(見性)을 하면 즉시(卽時)에 구경무심경(究竟無心境)이 현전(現前)하여 약과 병이 전부 소멸되고 교(敎)와 관(觀)을 다 휴식(休息)하느니라. (<종경록> 1 「표종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문 원문의 ‘재득견성(纔得見性) 당하무심(當下無心)’ 가운데 ‘무심’을 스님께서 ‘구경무심경’으로 풀어 놓은 점이다. 이는 ‘아주 궁극적인 무심의 경계’라고 새겨볼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삼세(三細)의 극미망념(極微妄念)까지 멸진무여(滅盡無餘)”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아주 어려운 개념이 등장한다. 삼세란 아주 미세한 세 가지 망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미세한 망념까지도 남김없이 소멸되어야 ‘무념(無念)’ 혹은 ‘무심(無心)’이라 부를 수 있다는 말씀이다.  

 

스님께서 교종(敎宗)의 권위라고 칭한 신라의 원효와 당의 법장 두 사람은 모두 <대승기신론>에 대한 해설서를 남겼다. 원효의 해설서인 <기신론소>가 먼저 성립되었고, 이후 법장이 원효의 책을 참조해서 자신의 <대승기신론의기>를 집필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중에서 중국 화엄종의 대가인 법장 역시 이 삼세 개념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에 무척 어려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개념일수록 적절한 ‘비유’가 요청되는데, 삼세, 곧 세 가지 미세한 망념에 대해 법장이 든 비유는 아주 가깝고 친절하다. 이를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선 법장은 ‘멀쩡한 눈’을 ‘본래 깨달은 상태’에 비유하고, ‘열병’을 ‘무명’에 비유하였다. 그래서 가장 최초로 열병이 눈에 들어와서 멀쩡한 눈을 건드리는 것을 세 가지 미세한 망념 가운데 첫 번째인 ‘업상(業相)’으로 보았다. 여기서 ‘업’은 아주 미세한 움직임을 의미한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본래 깨끗한 세계에 문득 무명의 바람이 불어 본래의 상태가 살짝 움직였다고 표현한다. 법장은 멀쩡한 눈에 열병이 생겨 ‘병든 눈’이 생기는 것을 세 가지 미세한 망념 가운데 두 번째인 ‘능견상(能見相)’으로 보았다. ‘능견상’이란 ‘보는 주체’를 가리킨다. 다음으로 병든 눈으로 인해 눈 앞에 실체가 없는 허공 꽃이 나타나는 것을 세 가지 미세한 망념 가운데 마지막인 ‘경계상(境界相)’으로 보았다. ‘경계상’이란 보는 주체에 대응해서 나타나는 ‘보이는 대상’을 가리킨다.  

 

여기서 ‘허공 꽃’이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고 오인하는 것을 가리키는 오래된 불교 용어이다. 이처럼 눈병에 걸린 사람에게 보이는 허공 꽃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세 가지 미세한 마음 이후에 여섯 가지 보다 거친 마음이 나타난다. 여섯 가지 가운데 첫 번째가 지상(智相)인데, 이는 허공 꽃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좋은 꽃이라거나 싫은 꽃이라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후 좋은 마음이나 싫은 마음을 쭉 이어가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잡으려고 하고 싫은 것은 피하려고 하는 마음이 연속해서 생겨나는 등 분별과 망상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법장이 ‘멀쩡한 눈’과 ‘열병’의 비유로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병든 눈과 그에 대응해서 보이는 허공 꽃은 둘 다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병든 눈만 나으면 그것에 보이는 허공 꽃이 다 사라지는 것처럼, 이 세계가 나의 마음과 따로 있는 실체라는 생각 역시 그러한 마음에 대응하여 생겨나므로, 그 마음이 사라지면 그에 대응하는 망념의 세계 역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구름이 다 사라지면 맑은 하늘에 해가 분명히 나타나듯이, 성철 스님께서는 망념이 사라진 자리에 진여의 해가 무한한 광명을 비춘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성철 스님께서 왜 <종경록>의 ‘무심’을 ‘구경무심경’으로 풀어서 해석하셨는지가 조금은 더 가깝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약은 그에 대응하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므로, 병이 다 나으면 약은 소용이 없다. 가령 감기가 다 나았음에도 감기약의 효능이 좋다고 자꾸 그것을 복용하는 것은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병에 따라 적절한 가르침을 처방하셨으니, 이를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칭한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교법을 약과 같은 것이라고 설하셨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평생 다양하게 설법하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중생들의 병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의 목적이 병을 고치는 데 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중생들이 처한 고(苦)의 정체를 바로 보고 그것을 해소하는 데 있으므로, 약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방편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므로 병이 다 나으면 약이 소용없어지고,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면 교(敎)와 관(觀)을 모두 쉬게 된다는 말씀이다.  

 

성철 스님께서 <종경록>의 「표종장」에서 가장 먼저 이 구절을 인용하신 것은 아마도 이 구절이야말로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과 ‘무심’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또한 이 구절은 깨달음과 닦음의 관계에서 본다면, 돈오돈수의 관점으로 곧장 연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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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영명연수 『종경록』의 일심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불교전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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