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주인공, 서암의 연극과 현사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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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3 년 11 월 [통권 제7호] / / 작성일20-08-12 14:26 / 조회10,033회 / 댓글0건본문
주인공이라고 하면, 보통 영화나 소설에서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을 말한다.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인생의 무대에서 조연이나 엑스트라 급의 배역을 받은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인생을 드라마로 만든다. 그것이 비극이 되었건 희극이 되었건 일단 주인공이기만 하면 된다. 나도 상상 속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엄마를 계모로 만들었던 흑역사가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완전 코미디인데 아직도 그 증상을 반복하면서 늙어간다. 그런데 일등을 하고 사장이 되어 상대적으로 중요한 배역을 따낸다한들 그것은 남에게 발탁되는, 남의 눈을 의식하는 주인공일 뿐이다. 진짜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 그걸 찾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는가. 아니, 진짜 주인공이 있기는 한 것인가. 세간에서나 출세간에서나 ‘주인공’은 평생을 달라붙는 골치 아픈 문제다. 그런데 제자들을 위해서 일부러 주인공이라는 환(幻)을 만들어낸 작가들이 있다. 당나라 말기 중국 절강성에 살았던 스님들 이야기다.
현사(玄沙) 스님에게 어느 날 학인 하나가 찾아왔다. 현사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서암원(瑞巖院)에서 왔습니다.”
“그래, 서암(師彦) 스님은 어떤 법문을 하더냐?”
“매일같이 혼자서 ‘주인공~’하고 길게 부르고는, ‘네~’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정신 바짝 차려라! 뒤에 가서 남의 말에 속지 말고…’ 하십니다.”
“그래? 일종의 심력(心力) 낭비로구나. 참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이번에는 거꾸로 물었다.
“근데 너는 왜 거기 있지 않고 떠나 왔느냐?”
“서암 스님께서 돌아가셔서요.”
“지금 불러서 대답하게 해볼까?”
그 학인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마침 현사 스님을 찾아온 도반이 하나 있었는데 이 대화를 다 듣고 있다가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곡을 하였다. 그리고는 “주인공~”하고 불렀다. 현사 스님이 “네~”하고 대답하자 그 도반이 “정신 바짝 차려라! 뒤에 가서 남의 말에 속지 말고…” 그러면서 현사 스님과 그 도반은 허리를 잡고 웃었다고 한다.
서암 스님은 누가 봐도 좀 이상한 사람이다. 그는 하루 종일 그저 판판한 돌 위에 바보처럼 앉아 있었다고 한다. 밥 먹고 하는 말이라고는 “주인공~” 하는, 이상한 자문자답뿐이었다. 그 밑에서 스승의 알 수 없는 행동을 지켜보며 수행하던 제자는 의아했을 것이다. 인생을 걸고 출가해서 훌륭한 스승을 찾아와 진지하게 정진했을 이 젊은이는 스승이 죽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마음도 복잡한 것이고 인생도 복잡한 것인데 스승의 이 수상한 퍼포먼스는 너무나 단순해서 오히려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몰랐다가 이제는 물어볼 기회조차 없어졌다. 그는 도대체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은 채 길을 떠났다. 당시 명성을 날리던 현사 스님께 가면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서.

서암 스님은 사대와 오온으로 된 이 몸 바깥에, 부르고 대답하는 그 사이에 신령한 주인공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려는 의도였을까. 하루 종일 바깥으로 나가 있는 정신을 순간순간 환기시키려는 의도였을까. 그런 거라면 이런 식으로 심력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서암은 헛것으로 보고 있다. 그 헛것을 눈앞에 띄워놓고 가지고 놀면서 제자가 알아차리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그러게 남의 말에 속지 말라는 말을 친절하게 덧붙였던 것이다. “심력을 낭비했다”는 현사 스님의 말은, 서암이 괜한 짓을 했다는 표면적인 뜻 속에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환(幻)으로서의 주인공을 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서암과 현사는 이미 한 패였다. “너의 스승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너는 왜 거기 그냥 있지 않고 떠나왔느냐”고 반문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읽힌다.
그러나 제자에게 주인공은, 마음 또는 도를 표상하는 개념이다. 깨달아야할 대상으로서 평생의 숙제였을 이것을 짊어지고 현사에게 갔을 것이다. 몇 번의 문답을 주고받는 동안 현사가 던진 질문을 덥석 물고 스승의 말을 되풀이하면서 꼬박꼬박 대답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스승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성성한 주인공을 죽였다. 현사에게 서암은 주인공으로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 불러볼까” 한 것인데 제자가 여기서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곁에 있던 구경꾼이 보다 못해 “아이고! 아이고!”하며 곡을 해서 죽은 주인공에 대해 삼가 조의를 표하고는 현사와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배역만 바꿔서 똑같은 대사를 읊었다. 제자에게는 이미 물신화된 주인공을 두 분이 희극으로 연출해냄으로써 다시 살려낸 것이다. 이런 유희의 세계는 그 맛을 본 사람들끼리만 그 안에서 그것을 가지고 놀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선승들은 학문과 종교를 넘어서 독창적으로 표현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것 같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제자가 두 분의 연극을 보고 깨달았다는 소리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아마 더 헛갈렸을지 모른다. 선문(禪門)에는 남 따라하다가 망했다는 전설이 유난히 많이 내려오는데 두 분은 서암과 똑같은 대사를 읊고도 망하기는커녕 어째서 독창성을 인정받는 선지식으로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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