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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인과因果가 있을 뿐 운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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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1 년 7 월 [통권 제99호]  /     /  작성일21-07-05 08:57  /   조회3,65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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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올라가는 가야산은 안개가 끼어서인지 골이 더 깊어 보였다. 간혹 다람쥐가 빠끔히 내다보는 산길에는 진달래 꽃망울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10시, 다시 백련암. 염화실의 미닫이에 스님의 그림자가 비치는가 싶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밝은 얼굴빛 때문일까. 깊은 소沼를 연상케 하는 스님의 눈에서는 청솔바람이 이는 듯했다.

 

▷ 스님이 지금 느끼시고 계시는 것은 무엇인지요?

 

“따스하니까 다니기에 좋네.”

 

▷ 봄이면 젊은이들한테 봄바람이 난다고 합니다만.

 

“꽃 필 때 춤도 춰 보는 게 좋지.”

 

▷ 불란서의 작가 마르그리뜨 유르스나르(주2) 여사는 현대 문명사회의 미美는 사물의 경우 자연의 원리에 충실할 때라고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자연을 바로 보는 것이 참다운 미입니다. 화가는 자기가 보는 대로 그리지요. 그러나 눈을 뜨고 보는 사람하고 눈을 감고 보는 사람의 작품은 천지 차이가 있는 겁니다. 내가 자꾸 눈을 뜨면 광명이고 눈을 감으면 캄캄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눈을 뜨고 사는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감고 사는 거예요. 

눈을 바로 떴을 때라야 ‘아, 내가 이제껏 눈을 감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지요. 꿈을 꾸면서 꿈이라고 어디 생각합니까? 꿈을 깨서야 아, 꿈을 꿨었구나 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자연, 자연 해도 보는 사람마다 다 달라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나 그것을 바로 보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 스님께서 조금 전에 말씀해 주신 ‘바로 보는 경지’를 일반적으로 도道라고들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도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그리고 도를 깨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도는 우주의 근본이며 만물의 자체이니 시공을 초월하고 시공을 포함한 절대체絶對體입니다. 따라서 만물 하나하나가 모두 도이며 현실이 곧 절대입니다. 이 도는 인간의 마음속에 완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로 보면 도를 아는 것이니, 이것을 깨쳤다고 하지요.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이니, 구름이 해를 가리면 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해를 보려면 구름이 걷혀야 함과 같이 마음을 보려면 망상을 없애야 해요. 망상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으면 마음을 보지 못합니다.”

 

 

백련암 가는 길. 5월8일 박우현 거사 촬영. 

 


 

▷ 그러면 스님, 도를 깨치면 어떻게 됩니까?

 

“도를 깨치면 망상이 영영 소멸되어 소멸된 그 자취도 없게 되니 이것을 무심無心이라고 합니다. 망상이 소멸되어 무심이 되면 어떠한가. 목석木石과 같으냐, 그게 아니지요. 큰 지혜광명이 나타나서 항상, 한결같이, 영영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일여一如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깊이 잠이 들면 정신이 캄캄하게 어둡지만 깨친 사람은 광명이 항상 일여하므로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마음은 밝아 있으니, 이것이 깨친 제일의 증거이지요.”

 

▷ 운명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것을 바꿀 수 있는지요? 있다면 그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인과因果가 있을 뿐이지 결정적인 운명은 없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우주의 근본 법칙 그대로이지요. 모든 결과는 노력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결과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힘써 노력하면 좋은 결과는 자연히 따라옵니다. 여기에 큰 자유의 원리가 깔려 있어요. 어떤 분은 결과가 원인에 반비례하는 일도 있다고 할지 모르나 이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지 운명 때문은 아닙니다. 자력自力을 다했을 때 타력他力이 나타나는 거예요.

 

선은 행복을 낳고 악은 불행을 부르는 원리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즉 남을 돕는 선행만 하면 바라지 않아도 선과善果는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유의할 것은 남을 도울 때는 다만 남을 돕는다는 생각만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남을 이만큼 도우면 나에게 그만한 대가가 올 것이라는 상업심리로 하면 이는 장사이지 남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남을 돕는 사람은 남을 돕고 또 돕고 하여 이것을 끝없이 반복하여 나아갑니다. 여기에서 참다운 운명을 알게 되어 영원한 인격자가 되는 것이지요.”

 

▷ 좀 엉뚱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지금 용돈을 얼마나 가지고 계신지요?

 

“내 손에는 한 푼 없으나 천하 돈이 다 내 돈이지요.”

 

▷ 지금도 기운 누더기 옷을 입고 계시는데, 그 옷을 입으시면 특별히 마음이 편하신지요?

 

“똑같애요.”

 

▷ 가톨릭의 프란체스코 성인도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천을 한 조각씩 얻어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하더군요.

 

“나는 오래 입으면서 자꾸 깁다 보니 자연 이렇게 된 것이에요.”

 

▷ 얼마 전에 펴낸 스님의 법어집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보니 우리 전체가 그대로 광명이라고 말씀하셨더군요. 그렇다면 부정한 사람 자체도 광명에 포함되는지요?

 

“영원하고 무한한 광명은 절대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우주 만물에 평등하여 차별이 없습니다. 가장 위대한 인격자나 극악무도한 살인강도, 아름다운 꽃이나 더러운 오물 전체가 평등하게 광명인 것이지요. 가까운 예를 들어 말하면 사람이 각각 다른 옷을 입었다고 사람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순금으로 천태만상의 기물을 만들었다 해도 전체가 순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새 돈, 헌 돈, 성한 돈, 찢어진 돈의 차별 없이 돈의 가치가 같음과 같습니다.”

 

▷ 그렇다면 세상에 무엇이 나쁜 것입니까?

 

“망상을 제거하지 않는 것이 나쁜 것이지요.”

 

▷ 그러나 스님, 현실은 물질과 과학 만능이어서 사람다운 삶을 살기란 점점 어려워진다고들 합니다.

 

“그러니까 눈을 뜨고 바로 보란 말입니다. 자기의 본모습은 광대무변한 바다와 같고, 물질은 바다 위에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인 자신의 가치를 알면 거품인 물질에 따라가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한없이 큰 것 같지만 허공 속에서 볼 때는 보잘것없는 미소한 존재입니다. 지구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지구상의 물질 따위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바로 살려면 자기의 근본 가치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순금인 줄 알면 순금을 버리고 먼지인 물질을 따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하고 무한한 자기를 목표로 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먼지인 물질에 이끌리지 않을 것이며, 미소한 지구 위해서 저 잘났다고 소리치지 않을 것입니다.”

 


 

 

▷ 행복의 길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여 주십시오.

 

“행복은 인격에 있고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물질이 풍부하더라도 인격이 부족하면 불행하고, 물질이 궁핍하더라도 인격이 훌륭하면 행복합니다. 보살도菩薩道는 인간 생활의 근본이며 행복의 극치이니, 자기를 아주 버리고 오직 남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고생이 되더라도 남의 안락에 대해서만 노력해 보세요. 남을 위한 나의 노력과 고생이 커짐에 따라 남이 더욱 안락해지면 나의 행복은 더 커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한 욕심의 노예가 되므로 모든 죄악과 불행이 옵니다. 나를 잊어버리고 남을 이익케 하는 생활을 계속하면 자연히 인격이 순화되어 영원하고 무한한 자기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탁월한 행동과 언설은 생전과 사후를 통하여 항상 남을 이익케 하는 것이니, 이것이 영원하고 진정한 행복입니다. 또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신명까지 바친 사람은 아무리 비참한 최후를 가졌어도 참으로 행복하다고 아니 할 수 없지요.”

 

▷ 그것은 희생이 아닌지요?

 

“행복입니다.”

 

▷ 일반적으로 잘 살고 높이 되는 것을 행복이라 합니다.

 

“그거야 어린애들 놀이지.”

 

▷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여야겠군요. 그러나 스님, 악에 대한 용서로 악이 더 커진다면 용서 자체도 악의 편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끝없이 용서해야 합니까?

 

“선과 악은 헛된 분별이어서 악마와 부처가 이름은 달라도 몸은 한 몸입니다. 그러하니 악인을 보면 부처님으로 존경하여야지, 용서를 베푼다면 악인의 참모습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악인은 때 묻은 옷을 입은 사람, 부처님은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과 같습니다. 때 묻은 옷을 입었다고 사람을 차별 대우하면, 이는 옷만 보고 사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여 물러가라’고 외치지 말고 ‘사탄이여, 거룩합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라고 정성을 다하여 섬기십시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사탄은 찾아볼 수 없게 되고,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살게 될 것입니다.”

 

▷ 일본의 스즈끼 다이세쓰鈴木大拙(주2)라는 선禪 학자는 눈이 먼저 있었던 게 아니고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 했더군요. 그렇다면 마음도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인지요?

 

“마음은 천지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천지가 다 무너져도 마음은 그대로 있는 것이에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우주에 꽉 차 있는 것이 곧 마음입니다.”

 

▷ 지금도 사진 기자가 사진을 찍는 중입니다만 스님의 마음을 찍으려면 어디를 찍어야 마음이 나타날는지요?

 

“내 마음은 우주 전체에 퍼져 있으니 아무 데나 찍어도 내 마음은 다 나타나.”

 

▷ 곧 부처님께서 오신 초파일입니다.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초파일이 주는 뜻을 듣고 싶습니다.

 

“눈길을 돌려 밖을 내다보지 말고 자기 속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모든 보배가 자기 속에 가득 차 있으니까요.”

 

▷ ‘샘터’와의 만남은 언제부터입니까?

 

“창간부터이지요. 특히 ‘샘터가족실’ 난에서 고마운 공양供養을 받고 있습니다.”

 

▷ ‘샘터’ 독자들에게 한 말씀만 더 해주십시오.

 

“나는 본래 푸른 산이나 바라보고 흰 구름이나 쳐다보며 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산山사람입니다. ‘샘터’의 요청에 못 이겨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군요. 독자들에게 부디 나의 말에 속지 말라 하십시오.”

 

▷ 종정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특별히 ‘샘터’ 가족들에게 법어를 주셨다.

 

허허

첩첩 산중 깊은 골을 홀로 거니니

인기척에 놀란 토끼 황급히 달아나네.

 

잣새와 바위종다리 울음소리가 그득한 뜰에서는 마악 목련이 터지고 있었다. 낮 예불이 시작되었다.

 

 │1983년 5월호 『샘터』, 정채봉 기획부장과의 대담│

 

주)

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Marguerite Yourcenar, 1903~1987)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이다.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고, 가장 존경받는 프랑스어 작가들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 근대 일본의 선학자. 가마쿠라의 임제종 사찰 원각사(圓覺寺)에서 불교에 처음 입문했다. 스승 샤큐 소엔으로 부터 참선 지도를 받고, 스즈키라는 거사호를 받았다. 27세에 동경제국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출판사 오픈 코트사에 입사했다. 1921년 정토진종 종립대 오오타니 대학 교수가 되었다. 미국과 유럽 등 서구에 선(禪)을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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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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