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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번뇌심소 4 | 해침害과 질투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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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21 년 7 월 [통권 제99호]  /     /  작성일21-07-05 10:48  /   조회4,27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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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해코지하거나 질투심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들은 작은 것을 꼬투리 잡아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질투심 때문에 남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있어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하게 대조되기 때문에 초점은 해코지하고, 질투하는 사람에게 맞춰진다. 물론 당하는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지만 좀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런 심성을 가진 당사자 역시 고통받고 있다. 이번 호에 살펴볼 번뇌심소는 바로 ‘해害’와 ‘질嫉’이다. 이 두 가지 심소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사회적 번뇌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시달리는 번뇌이기 때문이다. 

 

해, 스스로를 갉아먹는 번뇌

 

‘해(害, vihiṃsā)’ 심소는 글자 그대로 다른 사람이나 생명을 해치거나 피해를 입히는 ‘해코지’를 뜻한다. 부처님은 다른 생명을 대할 때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가지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야 당장 내 마음이 평화로워지며 그 대상도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고 다른 생명을 미워하고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상대가 고초를 겪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마음 때문에 가해자도 번뇌로 신음하게 된다. 해심소는 기본적으로 남을 해치는 것이므로 분노에 해당하는 ‘진瞋’ 심소의 일부분이다. 『성유식론』에서는 해심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엇을 ‘해害심소’라고 하는가? 모든 유정의 아픔에 대해 함께 슬퍼하고 연민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心無悲愍] 손해를 입히고 해코지하는 것을 본성으로 한다[損惱為性].”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보통 ‘해害’라고 하면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의 고통이 훨씬 크고 그 상처가 깊고 오래가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연민의 마음과 자비심을 갖지 못하고, 남을 핍박하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런 마음 때문에 그 당사자 역시 번뇌에 시달리게 된다.

 

반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자비심을 가진 사람의 내면에는 늘 평화가 흘러넘치기 마련이다. 설사 다른 사람이 잘못을 범해도 너그럽게 이해할 줄 아는 넓은 아량이 있고, 잘못을 용서하는 마음 씀씀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늘 고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남의 잘못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거나, 작은 허물을 꼬투리 삼아 상대를 괴롭히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사람의 마음에는 분노의 에너지로 넘치게 된다. 분노의 에너지는 마치 녹이 쇠를 갉아 먹듯이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부터 먼저 갉아먹는 법이다. 시쳇말로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잠자지만 때린 사람은 잠 못 든다.’는 말이 있다.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은 괴롭힘을 당하는 순간에 고통이 시작되지만 괴롭히는 사람은 괴롭히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이미 내면에 분노의 에너지가 이글거리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마음은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의 심리를 보면 상대가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에는 항상 분노의 에너지가 끓고 있고, 그것 때문에 스스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공감과 자비심을 갖지 못하면 마음에 여유가 사라지고, 여유가 사라지면 타인의 작은 행동 하나 말 한 마디에도 발끈하여 불같이 화를 낸다. 그런 과정 자체가 자신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행동이 된다.

 

따라서 마음이 평화로우려면 내면에 불쑥불쑥 솟아나는 미움의 감정을 버려야 하고, 타인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관대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피해자를 평화롭게 해주는 것인 동시에 자기 스스로 내면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다른 유정에 대해 자비심을 갖는 것이다. 마음에 자비심을 담고 있으면 상대보다 먼저 내가 그 혜택을 누리고, 그 다음 나로 인해 피해 받던 사람이 평화를 누리게 된다. 결국 해심소를 다스려 관대함과 자비심을 갖는 것은 나를 위한 길인 동시에 남을 위한 길임을 알 수 있다.

 

질투, 스스로 초라하게 만드는 번뇌

 

‘질(嫉, īrṣyā)’ 심소는 말 그대로 질투심을 말한다. 질이라는 한자를 파자해 보면 계집녀 변[女]에 질병 질[疾] 자가 조합된 글자이다. 이를테면 ‘여성의 병’이라는 의미가 된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질투심이 더 많은지는 알 수 없지만 질투심은 성별을 초월한 보편적 심리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과 명예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면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에 대해 시샘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이런 감정에 시달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질심소 역시 해심소와 같이 타인에 대한 관대함과 자비심의 결여로 생기는 것이므로 분노 즉, 진瞋심소의 일부분으로 분류된다. 『성유식론』에서는 질 심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여[徇自名利], 남의 영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不耐他榮] 시기하는 것을 본성으로 한다[妒忌為性]. … 질투하는 사람은 남의 영화를 보고 듣고[聞見他榮] 가슴 깊이 근심을 품어[深懷憂慼]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다[不安隱].”

 

우리 속담에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우리들이 가진 시기와 질투심을 나타낸 말이다. 시기와 질투의 마음은 남보다 자신이 더 잘 나고, 더 뛰어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과도한 자기 사랑이 상대방의 성공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나타나는 법이다. 질투의 근본은 자신이 남보다 이로워야 하고, 자신이 남보다 돋보여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우월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남들이 자신보다 더 이득을 보거나 뛰어나면 그의 광채가 나의 존재를 가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보다 잘 되는 것을 보면 질투심이 발동된다.

 

 



팔공산 거조암 영산전. 국보제14호. 사진: 서재영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괴로워지는 것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관련이 깊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결핍되면 부질없는 것들에 목매달게 되고, 타인이 무엇을 성취하면 자신이 못난 사람처럼 느껴지게 된다. 따라서 질투심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자존감이 결여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타인의 평판에 목매달게 되고, 남들로부터 칭송받는 사람을 질투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질투심이 많으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욕망에 시달리게 되고, 타인의 평가에 목매다는 타자 지향적으로 변하게 된다.

 

요즘 문제가 되는 상대적 박탈감이나 상대적 빈곤감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질심소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 분수에 맞게 살면 될 인인데 항상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기계적 평균이 지켜지지 않으면 박탈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상업 자본은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소비를 부추키기도 한다. 명품이니 브랜드니 하는 기호소비는 그 실상을 들려다 보면 제품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모두 자신이 더 돋보이고 싶은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질투심을 갖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자존감이 결여 되면 부질없는 것들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하찮은 것들 때문에 질투심이 발동한다. 스스로 열등감에 시달리기 때문에 부질없는 타인의 인정에 매달리게 되고, 내가 더 잘났다고 스스로 강변하게 된다. 이처럼 질투심이 깊으면 스스로 내적 공허에 시달리게 되고, 자신이 못난 것 같아서 견디기 어려운 박탈감에 시달리게 된다. 따라서 질투심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마음의 평화를 좀먹는다.

 

이런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이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수희공덕隨喜功德’이다. 수희공덕은 남이 좋은 일 하는 것, 남이 공덕 짓는 것을 보면 마치 내가 한 것처럼 기뻐하라는 것이다. 질투심은 남이 잘되는 일, 남이 칭찬받으면 기분 나쁘고, 우울해지지만 수희공덕은 남이 잘되면 마치 내가 잘된 것처럼 기뻐하고, 남이 칭찬 들으면 내가 칭찬 듣는 것처럼 행복해하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나와 남을 구분 짓는 분별의 경계가 해체되고, 동체대비라는 드넓은 평등의 바다로 들어가게 된다.

 

기본적으로 질투심은 나와 너는 다르다는 차별적이고 경쟁적 인식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너와 내가 한 뿌리이고, 한 몸이라면 네가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일이고, 네가 칭찬받는 것이 곧 내가 칭찬받는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연기적 관계성, 모두가 한 몸이라는 동체대비의 지혜를 체득하면 질투심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다. 질투심이 사라지면 그만큼 마음은 넓어지고, 넓어진 만큼 마음에는 평화가 머문다. 남이 잘되어야 그들이 나를 해치지 않고 나도 행복해지는 법이다. 질투심을 내려놓고 남 잘되는 일, 남이 칭송받는 일을 함께 기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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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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