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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론학 강설]
신삼론新三論과 고삼론古三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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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  2019 년 7 월 [통권 제7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9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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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 불교학자 · 번역저술가

 

삼론학에 신삼론新三論과 고삼론古三論이라는 신고의 구분이 있다는 설說이 예로부터 있었는데, 대략 네 가지로 정리되어 논의되었다. 이러한 구분 역시 삼론학파의 계보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행해진 것이다. 그 타당성을 검토한 결과, 승랑 이전을 고삼론, 그 이후를 신삼론이라 보는 설이 가장 타당하다는 견해가 학계에서 승인되는 추세이다.

 

신삼론新三論·고삼론古三論의 네 가지 설

 

삼론학에 신고의 구분이 있다는 것을 네 가지 설로 정리하여 1936년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다카오 기켄高雄義堅 박사라 보고 있다. 그 4설은 다음과 같다. 

 

1) 지나(支那=중국)에서 제1전傳인 구마라집 이하를 고전삼론古傳三論, 제2전인 당唐의 일조日照 이하를 신삼론으로 한다.

2) 가상대사嘉祥大師가 삼론종을 대성한 것을 가지고 전후前後로 구분하여 신고新古를 수립한다.  

3) 승전僧詮 이전을 고삼론, 그 이후를 신삼론으로 한다.

 

4) 승랑僧朗 이전을 고삼론, 그 이후를 신삼론으로 한다. 계속하여 이상의 4설에 대하여 각각 촌평을 덧붙이고 아울러 그 타당성을 해명하였다. (제1설에서) 일조日照가 가져온 삼론의 영향은, 단지 현수賢首의 화엄교학에 의지한 데가 있어, 현수로 하여금 『십이문론소十二門論疏』를 제작하게 한 정도에 머물렀다. 구마라집 계통의 삼론교설 이외에 특별히 발휘한 바가 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신삼론이라 칭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제2설은 가상嘉祥(길장吉藏)을 가지고 삼론종을 수립한 주체로 보는 입장에서 그 이전을 고삼론이라 칭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학파와 종파라고 하는 정도의 구별이라, 특별히 신고를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타당성을 결여하였다고 보았다.

 

 제3설은 일본 진언종의 학자 산성山城 해인사海印寺의 의연방宜然房 명도明道의 설이다. 그가 저술한 『해인현담海印玄談』에 의하면, 승전僧詮에 이르러 법상法相에 변화를 가져왔는데, 예를 들면 이제론二諦論의 경우, 승전 이전에는 약리이제約理二諦였지만 승전에 이르러 약교이제約敎二諦를 시설한 것과 같은 이것이 신삼론이라 말하는 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론의 교학적으로도 교세 발전적으로도 가장 현저한 변화를 본 것은 오히려 승랑의 전후이다. 때문에 제4설을 한층 합리적이라고 고려하였다. 그 이유는, 승랑에 이르러 종래 관내關內 (장안의) 삼론학이 강남에서 비약하였기 때문이다. 곧 당시 양나라의 삼대법사 등에 의하여 남지에서 성실학이 전성기를 구가하였는데, 승랑이 분기하여 성실학은 소승小乘의 사상이라고 압도하여, 삼론학을 다시 예전의 성황으로 재현시켰다. 종래 성실학을 학습하는 이는 반드시 삼론도 겸학하는 상태였지만, 승랑에 이르러 삼론을 성실에 대립시켜 삼론의 특색을 발휘하였던 것이다.(주1)

 

유래由來와 논의

 

그러면 이러한 네 가지 설은 누구에 의해 언제 설해진 것이고, 학계에서는 어떤 설을 타당한 것으로 수용하고 있는가? 논란의 와중에 있던 제1설과 제3설의 유래와 논의를 중심으로 요약 정리해 본다.

 

1) 제1설의 유래와 논의

 

① 제1설의 유래

4설 중에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제1설이라고 한다. 제1설을 최초로 주창한 것은 마에다 에운前田彗雲 박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1909년에 간행한 『삼론종강요三論宗綱要』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삼론종의 전래에 2류流가 있는데, 첬째로 요진姚秦 시대에 구마라집에 의하여 전해진 것을 고삼론古三論이라고 한다. 둘째로는 신삼론新三論인데, 이것은 청변淸辯논사의 계통에 관한 것으로서, 일조삼장日照三藏에 의하여 당唐의 고종高宗 의봉儀鳳 연간에 처음 전해졌다.”(주2)

 

이 설은 인도 중관학자 청변(Bhāvaviveka, 490-570무렵)논사의 저술을 한역漢譯하여 소개한 것에 초점을 둔 구분으로, 학계에서 제4설과 함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수 십년 전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유력한 『불교대사전佛敎大辭典』도 제1설에 기초하여 신삼론과 고삼론의 구별을 결정하였다.(주3) 또 근년에 발표된 한 논고에서는 일본불교사의 입장에서 이 청변의 학통이 전래된 것을 신삼론이라 하였다고 결론지었다. 곧 남도南都 6종宗의 성립을 논의하다가 대안사大安寺의 자료에서 ‘삼론중三論衆’ 외에 청변 계통의 삼론을 연구하는 집단이라는 ‘별삼론중別三論衆’의 존재가 실증되었는데, 이 청변의 학통이 현장과 일조에 의하여 중국에 전해져 법장法藏과 신라의 원효元曉에게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신삼론이라는 것이다.(주4)

 

② 제1설에 대한 반론

제1설에 대하여 앞서 정리한 4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먼저 다카오 기켄이 반론을 제기하였다. 곧 일조日照가 가져온 삼론의 영향은, 단지 중국 화엄종의 제3조 현수賢首 법장法藏으로 하여금 『십이문론十二門論』의 주석서인 『십이문론소十二門論疏』를 제작하게 한 정도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것을 신삼론이라 칭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 제1설에 대하여 교학적 분석을 통하여 보다 심층적으로 반론을 제기한 것은 전 고마자와대駒澤大 히라이 슌에이平井俊榮교수로, 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주5) 당의 현수 법장(643-712)은 『십이문론』의 주석서에서 중천축中天竺 출신의 번역 삼장 일조(日照, 地婆訶羅 Divākāra)가 전한 인도 나란다Nālandā사원의 학장 지광(智光, Jñānaprabha)논사가 청변의 학설을 계승하여 『반야경』과 『중관론』 등에 의하여 무상대승無相大乘(곧 중관사상)을 설한 것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 의도는 당시 인도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현장玄奘(600-664) 삼장에 의하여 성행한 유식唯識의 법상학法相學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견제였다고 본다.

 

당나라 의봉儀鳳 초년(676)에 중국에 와서 이후 약 10냔간 일조 삼장이 번역한 경론은 18部 34권으로, 번역된 경론을 보면 주술에 관한 밀교 경전과 법상에 대한 유식 분야가 돋보이고, 중관 계통은 하나도 없다. 일조가 중국에서 인도 중관 계통의 불교를 번역 소개한 사실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조가 인도 중관파의 불교를 가져와 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허구라고 하였다. 청변의 주요 저술 중에 『중론』의 주석서인 『반야등론석般若燈論釋』이 있다. 이 저술의 중국 번역은 일조 이전 프라바-카라미트라((Prabh karamitra, 波羅頗蜜多羅)가 당의 정관貞觀 4년(630)부터 6년(632)에 역출하였다. 그러나 이 논서가 연구된 흔적도 없고, 이에 대한 중국불교인의 주석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밖에 한역된 청변의 저술에 『장진론掌珍論』이 있다. 한역된 청변의 저술은 이 두 가지 논서 뿐이다. 이 『장진론』도 중관 계통의 논서이지만, 현장이 번역하였고, 주석서도 몇 가지 제작되었다. 그러나 대개 현장 문하에서 이루어진 『장진론』의 연구는, 전해지는 청변과 호법護法의 공유空宥 논쟁을 통하여 호법이 정의正義라는 것를 현양하는 데에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래서 만약 청변의 『장진론』에 대한 번역과 연구를 가지고 신삼론의 의미를 별도로 수립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일조가 아니라 모름지기 현장을 기준으로 구분해야 마땅할 것이라고 보았다. 법장이 『십이문론』에 주석한 것은 일조가 전한 인도 불교의 사정에 자극 받았는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현장에 의하여 주도된 유식 법상학을 의도하여, 원융무애한 화엄의 입장에서 중관 계통의 논서를 해석한 것이라고 보았다. 일조가 번역한 것에 의하여 분석하여도, 청변의 저술을 번역한 것에 의하여 결정하여도, 중국에서 허망한 속설에 불과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허상에 비추어 일본 남도에서 청변의 연구를 별도로 수립하여 신삼론을 말하는 것은 학적 근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2) 제3설의 유래와 신삼론·고삼론의 제창 

 

삼론학에 대하여 신삼론과 고삼론이라 구별하여 호칭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제3설에서 찾아보고 있다. 곧 일본 산성국山城國 해인사海印寺의 명도明道가 저술한 『해인현담海印玄談』(=『삼론현담三論玄談』)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술하였다. “도생부터 승랑僧朗(도랑道朗이라는 표기는 승랑의 오기임)까지 무소득종無所得宗을 구설舊說, 섭령攝嶺의 승전 이후부터 길장에 이르기까지 무소득종을 신설新說이라 한다. 구설은 일음교一音敎를 수립하고, 신설은 이장삼전법륜二藏三轉法輪을 수립하여 신구新舊의 교판이 같지 않다”(주6) 명도는 에도江戶 시대 말기 문화문정文化文政(1804~1830) 무렵에 활약한 진언종의 학승으로, 삼론학에 대하여 신설과 구설을 설정한 최초의 인물로 생각되고 있다. 그 이전에는 달리 신구의 구분설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신설과 구설이 이후에 신삼론과 구삼론으로 재구성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3) 제4설의 등장과 타당성

그러나 승전을 기준으로 삼아 신구를 구분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그 이후 불교학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우선 앞에서 정리한 신고의 4설 중 제4설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론의 교학적으로도 교세 발전적으로도 가장 현저한 변화를 본 것은 오히려 승전이 아니라 승랑의 전후이기 때문에, 승랑을 기준해야 한다는 제4설을 주장하였다. 그 이후 제3설의 근원이 된 명도의 저술에 근거하여 또 다른 비판이 제기되었다. 곧 명도가 거론한 이장삼전법륜二藏三轉法輪이 길장의 독특한 일종의 교판론이라는 것을 인정하여도, 이 학설이 이미 승전에게 있었는지 알지 못하며, 그것을 가지고 삼론의 신구를 구별하는 것은 학적 근거가 결여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승랑이 남지에서 전법한 사실 등을 고려할 때, 승랑을 기준으로 신구를 구분하는 제4설의 다카오설高雄說이 보다 합리적인 구분 방법이라고 평가하였다.(주7)

 

소결


이러한 과정을 지나 중국 삼론에 관한 한, 승랑 이전을 고삼론, 그 이후를 신삼론이라 구분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구별 방법이라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신삼론과 고삼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처음으로 승랑 이후를 신삼론이라 구분한 다카오설高雄說도 승랑이 삼론학의 발전 과정에서 이룩한 업적에 입각하여 승랑을 기준으로 신구설을 주장하였다. 현재 승랑의 삼론 교학에 대한 연구는 아직 개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기도 하고, 또한 학계에 많이 알려지지도 수용되지도 않은 상태이다. 그 승랑의 삼론교학이 더 깊이 발굴되고 더 많이 확인된다면, 그래서 이전의 삼론교학과 다른 점이 입증된다면, 그 때는 신고 삼론학의 구분이 더욱 불가피해질 것이다. 

 

주)

(주1) 高雄義堅, 『三論玄義解說』, 興敎書院, 1936, pp.12-13.. 

(주2) 前田彗雲, 『三論宗綱要』, 大正9년, 東京丙午出版社, p.48. 

(주3) 望月信亨編 『望月佛敎大辭典』 제2권, 世界聖典刊行協會, 1931, pp.1702-1703 「三論宗」 항목 참조.

(주4) 井上光貞, 「南都六宗の成立」, (『日本歷史』 156号 참조)

(주5) 平井俊榮, 『中國般若思想史硏究』, 1976, pp.235-239. 趣意 요약. 

(주6) “ 從竺道生至河西道朗 用羅什法相 成無所得宗. 從攝嶺僧詮至大師 別立法相 成無所得宗. 初云舊說 後云新說. 舊說敎判立一音敎 新說立二藏三轉法輪 是新舊敎判不同也” 明道가 저술한 『三論玄談』은 사본寫本으로만 전승되고, 여기의 인용문은 앞의 책 前田彗雲의 『三論宗綱要』 p.96에 인용되어 있다. 

(주7) 平井俊榮, 『中國般若思想史硏究』, 1976,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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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동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용수龍樹의 화엄사상華嚴思想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 동국대 불교학과 강사 역임. 동국대에서 『한국불교전서』 제13권과 제14권(『유가사지론기』) 공동 교정 편찬. 고려대장경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돈황불교문헌 공동 연구. 번역서로 『삼론현의三論玄義』와 고려대장경의 한글 번역본 몇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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