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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조선후기 자주적 역사서의 체제를 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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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2 년 4 월 [통권 제108호]  /     /  작성일22-04-04 09:54  /   조회3,07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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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사서史書 16 | 『대둔사지』의 찬술자와 정약용④ 

 

『대둔사지』의 체재는 17·8세기 역사 편찬의 일반적 경향인 강목체綱目體를 따르고 있다. 찬자들은 각 권에 실린 중요 사항을 체계적으로 1자씩 대두시키고, 그에 대한 세부 사항과 자료를 1자씩 낮춰 찬술하였다. 이설異說과 해설解說은 ‘모안某案’, ‘모운某云’으로 표시하여 관련자의 책임을 밝히고 있다. 

 

대둔자시의 체재와 구성

 

그것은 한 주제를 제시한 뒤 그에대한 관련 자료를 망라하여 자신의 논지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체재는 편찬 작업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다산의 저작에서도 나타난다. 1811년 찬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는 대체로 편찬자의 결론을 앞에다 제시하고 그 다음에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국내의 자료들을 넓게 망라하면서 그 자료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안설按說로써 비판하고 검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둔사지』의 전체적인 구성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사진 1. 서산대사의 진영. 

 

『대둔사지』는 전체 4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권1은 대둔사의 지리적 위치와 연혁, 그리고 건물 등을 정리했다. 그리고 창건주와 고려말의 태고보우太古普愚, 조선불교의 중흥조이자 대둔사를 선교禪敎의 종원宗院으로 격상시킨 서산대사와 그 문도, 대둔사의 12종사宗師와 12강사講師 등 대둔사를 중흥시킨 대표적 인물 등을 수록했다. 그러므로 권1은 우리나라 불교사와 『대둔사지』의 전체적인 개요를 정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대둔사의 지리적 위치는 곤륜산崑崙山에서부터 해남 대둔사에 이르기까지의 지형과 산세를 묘사했으며, 전우방료殿宇房寮의 사정 또한 상세하게 수록했다. 전우방료는 그 창건자와 중수자를 『죽미기竹迷記』와 다른 자료를 기초로 그 존폐 여부까지 정리했다.

 

권1의 주요 내용은 대둔사의 연혁으로 고대부터 고려까지는 창건과 중건의 기록이 중심을 이루었고, 조선시대는 임제종의 정맥正脈을 계승한 태고보우를 시작으로 청허휴정과 제자 편양언기(1581~1644)와 소요태능(1562~1649), 그들의 법손이기도 한 조선후기 대둔사의 12종사와 강사의 생애를 정리했다. 대둔사의 종사와 강사의 인적 계보는 대부분 편양언기의 제자나 법손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사진 2. 편양언기의 진영. 

 

12종사 가운데 취여삼우(1622~1684)·화악문신(1629~1707)·벽하대우·설봉회정(1677~1738)은 강진 만덕사萬德寺를 중심으로 한 소요태능의 제자와 법손들이다. 또한 12경사 가운데 나암승제·운담정일(1741~1804)·금주복혜·낭암시연·아암혜장(1772~1811)은 만덕사계이며, 벽담행인은 부휴선수의 후예다. 12경사는 그 절반이 소요태능의 후예인 만덕사 승려들이다. 이것은 조선후기에 만덕사와 대둔사의 승려들이 교류가 빈번했고, 만덕사의 승려들일지라도 교학에 탁월하면 대둔사에 머물면서 강사가 되었으며, 마침내 대둔사가 선교학의 종원으로 정착하는 데 기여한 12경사로 추대된 것이다. 강사들이 머물렀던 방장실方丈室에 대한 기록은 대둔사가 법맥의 구분 없이 실력 있는 강사를 초빙한 당시 화엄학 강의의 요람으로서의 역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권2는 대둔사의 창건과 중건, 각 건물의 사정·암자·암동巖洞과 임천林泉에 관한 내용을 권1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편찬자들은 중관의 『대둔사사적』의 내용을 분석하고 다양한 관계 자료를 기초로 고증을 시도하였으며, 그 오류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다. 채팽윤蔡彭胤이 지은 「대둔사사적비」 역시 『죽미기』를 기초로 찬술되었다 하여 내용에 대해 각 부분마다 구체적인 분석과 함께 비판이 이루어졌다. 

 

부속건물에 대해서는 찬자들이 파악한 것보다 『죽미기』에 기록된 것이 6전殿·4원院·7루樓·14당堂·15료寮가 더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색성은 대둔사의 남북2원南北二院의 터가 너무 좁아 중관이 정리한 전각이 모두 세워질 수 없다고 했다. 더욱이 “『대둔사사적』이 찬술된 지 200년도 되지 않았고, 그 흔적도 없으며, 건물의 위치를 아는 사람도 없으니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예컨대 편찬자들은 1635년 대법당을 중건했다는 『죽미기』 내용에 대해서 취여삼우가 1668년에 중건했음을 지적하여 중건한 지 불과 3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둔사사적』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았고, 팔상전은 『대둔사사적』이 언급한 것처럼 만력萬曆 말에 중창했다면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1737년에 거듭 중건할 정도로 폐허가 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권2는 이 밖에 1조祖 태고보우를 위시하여 6종宗 8노老 8사師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을 정리했고, 1조祖 8사師의 비와 부도, 1조祖 2노老 9사師와 제노諸老의 주골珠骨을 안치한 비원碑院을 묘사했다. 마지막에는 시인과 풍류객이 대둔사에 머물면서 문지방이나 기둥에 남긴 제영題詠을 수록하기도 했는데, 백호임제白湖林悌(1459~1587), 윤선도(1587~1671), 김상헌(1570~1652) 등이 대둔사와 그 자연풍광을 읊은 시가 보인다.

 

대둔사와 청허휴정의 인연

 

권3은 조선불교의 중흥조이자 대둔사를 조선후기 선교의 종원宗院으로 격상시킨 청허휴정의 생애와 행적을 정리했다. 청허가 입적한 후 그의 의발이 대둔사로 옮겨진 경위와 대둔사에서 기재忌齋를 지내고 영당影堂을 건립하여 해년마다 향화香火를 올린 일을 기술하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은 대둔사가 단순히 서산의 의발을 전수받았고, 매년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청허 문파의 종원임을 자부한다는 의미와 함께 대둔사가 침체된 조선불교의 종원이자 중흥지의 위상 또한 지니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기도 하다.  

 

사진 3. 대흥사 부도밭에 있는 서산대사 부도. 

 

장유張維가 지은 청허의 비碑가 대둔사에 세워지자 ‘종원의 동표銅標’라고 한 사실이나, “서산의 의발이 이곳(대둔사)에 있고, 영정도 이곳에 있는 것이 확실하며, 기일忌日에 제사를 올리는 것도 확실하며, 죽음에 이르러 부탁한 물품이 지금도 대둔사에 전해오니 8로路의 종원이 된다.”고 한 아암혜장의 언급에서도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권3은 이 밖에 1788년(정조 12) 왕명으로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게 된 경위와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문건과 비문의 내용, 심지어 청허의 유물 목록까지 상세하게 고증한 후에 수록했다. 이 가운데 청허의 행적을 정리한 「금자보장록金字寶藏錄」은 “청허의 친도親徒가 기록한 것이 아니고 뒷사람이 추가한 것”이어서 8가지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했다. 결국 『대둔사지』 찬자들의 청허의 행적과 사후의 평가에 대한 정리는 조선후기 불교계에서 청허와 함께 대둔사의 위상을 선양하여 격상시키고자 한 그들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다산의 『대동선교고大東禪敎考』

 

권4는 다산 정약용이 ‘다듬어서 엮은’ 『대동선교고大東禪敎考』다. 구성은 「고구려선교시말高句麗禪敎始末」·「백제선교시말百濟禪敎始末」·「신라선교시말新羅禪敎始末」과 신라 말까지의 승려에 대한 여러 사정을 정리했다. 우선 각 나라의 선교시말은 우리나라 고대 불교사 자료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서술 방식은 강목체 형식으로 각 사실의 요지를 강綱에 두고, 인용 자료와 함께 자신의 의견을 안설按說로 표기하여 서술하거나 내용에 대한 고증을 시도했다. 그 기초 자료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수록된 불교기사가 중심이 되었다. 권4는 또한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과 같은 중국의 불적佛籍에 수록된 신라의 스님을 적출하여 그들의 화두나 사승 관계, 스승과의 선문답을 정리했고,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이나 당시에 간행되어 주목받고 있었던 사암채영獅巖采永의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에서 홍척·혜철·무염·도의 등 신라 말 구산선문의 개창조를 위시한 승려들의 법맥을 정리하기도 했다. 

 

사진 4. 서산대사에게 내린 교지. 

 

다산의 이러한 고대불교사 정리 작업은 단순한 자료 정리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경덕전등록』에 수록된 신라 스님들을 소개할 때는 구체적으로 그 권수卷數까지 표기했고, 동일 인물은 『경덕전등록』과 『불조원류』를 비교 검토하는 세심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불조원류』를 이용하여 ‘신라의 명덕名德’ 가운데 참고할 인물이나 ‘성적가심자聲跡可尋者’·‘절무성적자絶無聲跡者’를 정리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에 간행된 『불조원류』가 신라의 명덕名德에 대한 사실을 잘못 기록하여 믿기 어렵다고는 했지만, 참고하도록 덧붙여 둔다고 전제했을 뿐만 아니라 성적聲跡이 끊기고 없는 사람은 이름이라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이 알아보게 할 만큼 인용 자료의 비교 검토와 후세의 연구를 염두해 둘 만큼 학자적 자세를 견지했던 것이다.

 

현재 다산의 「대동선교고」에 대한 평가는 “우리나라 고대불교사에 대한 연대나 지명 고증 등 불교사에 부수적인 사항들에 관한 견해의 제시에 그치고 스님의 저술을 도외시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부정적인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산의 찬술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탄압과 산일散逸로 얼룩진 우리나라 고대불교사를 복원하고 체계화하고자 한 노력에 대해서는 온전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더욱이 편찬의 과정에서 보여준 자료에 대한 정확한 고증과 안설按說을 통한 합리적인 해석은 당시 실학자의 역사인식과 연구방법론이 그대로 불교사 연구에 반영되어 있어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가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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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동국대 및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공부하고 「조선후기 사지寺誌편찬과 승전僧傳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 저서로 『조선후기 불교동향사』, 『사지와 승전을 통해 본 조선후기 불교사학사』, 『한국근대불교사론』, 『석전영호대종사』(공저), 『신흥사』(공저)등이 있다. 조선시대와 근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사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역임.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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