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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의 사회적 공헌을 위해 노력한 불교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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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3 년 7 월 [통권 제123호]  /     /  작성일23-07-04 09:30  /   조회1,13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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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30 | 미지마 카이운

 

대중이 기억하는 미지마 카이운三島海雲(1878~1974)은 일본의 국민 음료인 카루피스[쿨피스와 유사]를 개발한 대기업의 창업자일 것이다. 그가 정토진종 본원사파 쿄가쿠지敎學寺에서 태어나 정토종계 학교를 거쳐 불교에 몸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드물다. 카이운이 몽골에서 발견한 유산균을 일본에 가져와 음료로 만들고 기업화한 배경에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의 정신이 깔려 있다. 이번 호에서는 미지마 카이운이 생애를 걸었던 기술개발과 사회적 공헌을 위해 다진 초석에 관해 소개하겠다. 

 

사진 1. 미지마 카이운(28세). 사진: 카루피스 주식회사.

 

인생의 스승들과 조우, 중국도항

 

미지마 카이운은 근대의 불교학자들이 걸었던 길과는 다른 길을 간 인물이지만, 그 시작점은 동일하다. 16세에 교토의 서본원사 분가쿠료文学寮에 입학해 진종 교학을 배우고 승려 자격을 취득했다. 

 

1899년(21세), 분가쿠료를 졸업한 후 서본원사 계열의 개도중학開導中學에서 1년간 영어교사 생활을 했다. 이후 도쿄로 건너가 다카나와 불교대학高輪仏教大学(류고쿠대학龍谷大學 전신)에 입학했다. 다카나와 대학은 서본원사가 메이지정부의 제도 개편 요구에 응해 교토와 도쿄에 불교전문대학과 다카나와 불교대학을 분리해 설립한 학교이다. 당시 다카나와대학은 새로운 신입생을 충당하기 위해 분가쿠료 졸업생들은 무시험으로 입학을 허용했는데, 카이운은 이 기회를 얻어 입학할 수 있었다.

 

사진 2. 류고쿠대학龍谷大學. 다카나와대학과 교토 불교전문대학은 1904년에 병합돼 류고쿠대학으로 바뀌었다.

 

카이운의 학창시절 최고의 성과는 좋은 스승들 밑에서 수학한 것이다. 분가쿠료 시절에는 교토대학 교수가 된 사카키료 사부로榊亮三郎[산스크리트어 담당]나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최고의 기자가 된 스기무라 소진칸杉村楚人冠[영어 담당]을 만났다. 이외에도 중앙공론中央公論을 창간한 우메하라 토오루梅原融, 인도학자이자 도쿄 제국대학 교수가 된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郎 등이 포진해 있었다. 이 중 카이운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친 스기무라 소진칸과 우메하라 토오루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카이운의 인생관인 국리민복國利民福[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 역시 분가쿠료 시절에 형성된 것이다.

 

“스기무라 선생님은 원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지만, 나에게는 마치 부모님처럼 행동하셨다. 후에 아사히 신문사로 이직해 저명한 기자가 되었고, 근대 저널리즘의 개척

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내가 중국이나 몽골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도, 일본에 귀국해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시종일관 나를 이끌어 주셨다. 그가 나를 위해 소개해 준 일류의 전문가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스기무라 선생님은 내 인생의 스승이다.”

- 미지마 카이운 『나의 이력서』(1980) 중에서

 

사진 3. 스기무라 소진칸(1872~1945).

 

불교대학에 진학한 카이운은 결론적으로 졸업을 하지 못했다. 우메하라 토오루의 소개로 나카지마 타츠유키中島裁之가 중국 북경에 설립한 동문학사東文學社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5세). 나카지마 역시 분가쿠료 출신으로 동문학사 운영에는 서본원사가 관련되어 있었다. 카이운은 중국 도항에 대해 “중국대륙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좁은 일본과는 달리, 중국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전승의 기쁨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고, 중국으로 건너가면 막대한 돈을 벌 수 있다는 낭만과 희망과 넘쳐났다. 카이운 역시 이러한 시대적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지만, 중국 도항은 쉽게 진행되지 못했다. 나카지마가 카이운의 교사 부임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꼬인 상황에서 우메하라가 나카지마를 설득해 카이운은 어렵사리 중국 도항의 기회를 잡았다.

 

동문학사 생활과 상업활동의 새 출발

 

나카지마에 따르면 동문학사의 설립은 중국의 문화를 세계적 문화 수준에 맞춰 진보시키기 위함이었다. 중국 문화에 능통한 일본인들이 중국을 교도하기 위해 동문학사를 설립했다고 밝혔다. 좀 더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북청사변 이후 북경의 참상을 접하자, 일본은 유교와 불교를 전해 준 중국에게 현재 일본이 가진 신문명으로 보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중국인 교육을 진흥시킨다는 내용이 기저에 깔려 있다. 이러한 시각은 오구루스 코쵸로부터 시작한 서본원사의 아시아 포교와 맥락이 닿아 있다. 

 

사진 4. 북경 동문학사 생도들. 사진: 『청국사진첩』(1906).

 

“동문학사는 청운의 꿈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간 일본의 청년들이 중국의 진짜 모습을 확인한 곳이다. 중국어를 연구하고 동시에 중국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중학교 정도의 교육을 통해 일본을 알리고자 했다. 더해서 동문학사 개설을 통해 중국의 모든 관官과 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배치하는 것이 목표였다.”

- 미지마 카이운 『나의 이력서』(1980) 중에서

 

동문학사의 교육과정은 전문반과 보통반으로 나뉘었다. 전문반의 교과내용은 아세아지리, 영국사, 청국근세총지, 정치, 경제 등을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보통반은 중등교육 수준의 지리, 역사를 가르쳤다. 카이운은 1902년 2월부터 다음해 11월까지 약 1년 9개월간 동문학사에서 재직했다.

 

사진 5. 자서전 『초련오십년初恋五十年』(1965).

 

모친의 병환으로 인해 조주학당趙州學堂으로 옮겨 반년 정도 교사생활을 한 후, 다시 동문학사에 재부임했다. 동문학사에서의 마지막 활동은 그의 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된 일화양행日華洋行에서의 활동이었다. 일화양행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문학사의 경영난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동문학사는 원대한 포부와는 달리 경영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나카지마는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사업을 시작했다. 동문학사 내에서 희망자를 모집해 처음 행상사行商社를 설립했다. 나카지마는 행상사를 통해 통신교육을 개설하고 강의록을 팔아 그 이윤으로 동문학사를 유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첫 사업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이후 1903년 동화양행東華洋行을 개업했고, 카이운을 담당자로 내세운 일화양행이 연이어 문을 열었다. 카이운은 나카지마가 중국의 풍속을 개발하는 사업에 보조자로서 참여하면서 몽골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카이운이 몽골을 방문한 데에는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과 관련이 있다. 일본은 전선 확대를 위해 군용 말이 필요했고, 미츠이물산三井物産과 오쿠라조大倉組가 만주까지 건너가 말을 사입仕入했다. 일화양행 역시 말을 구하기 위해 몽골에 인력을 파견했는데, 카이운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 말 사입을 계기로 그는 몽골의 왕족과 유력인사들과의 친분을 넓혔고, 추후 몽골에 총기 판매와 면양 개선 등 사업을 확대시켰다.

 

사진 6. 일화양행 시절. 앞줄 왼쪽이 미지마 카이운, 오른쪽이 도쿠라 고로.

 

카이운은 일화양행을 퇴직한 후, 나카지마의 추천에 따라 동문학사에서 함께 일한 도쿠라 고로土倉五郞와 사업을 시작했다. 이들이 한 첫 사업은 일본 내지의 물건을 들여와 북경에 공급하는 일종의 보따리 행상이었다. 물건의 품목 결정과 사업 수완은 나카지마의 조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사업은 족족 정상가도를 달리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카이운의 사업도 파산했다. 3년 후, 그는 일본에 남은 부인이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에 남은 모든 사업을 접고 귀국했다(38세).

 

귀국 후의 카이운의 생활은 부인의 병원비와 생활비로 인해 곤궁해졌다. 재기의 꿈조차 꾸지 못할 때, 지인들이 손을 내밀었다. 교토시의회 부회장이 된 일화양행 시절의 동료와 은사 스기무라가 자금을 마련해 주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음 호에서는 카이운의 인생 역작인 카루피스 음료 개발과, 불교적 기반 아래 사회적 환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

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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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현재 아시아 종교문화 교류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ikemir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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