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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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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3 년 7 월 [통권 제123호]  /     /  작성일23-07-04 13:27  /   조회1,45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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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 부잣집 젊은이가 아내와 행복한 신혼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아내에게 술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아내가 창고에 가서 술독을 열어보니 젊고 예쁜 여자가 그 안에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였지만 아내는 그것을 모르고 남편에게 화를 냈다. “어디에서 젊은 여자를 데려다가 술독에 감춰 두었느냐?”는 것이었다. 

 

시끄러움과 고요함, 착각과 바른 인식

 

남편이 술독을 열어보았다. 남편 역시 자기 그림자를 보고는 아내에게 화를 냈다. “외간남자를 숨겨 두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싸우는 중인데 친한 친구가 지나가다가 그 사연을 듣고 술독을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화를 냈다. “하나밖에 없는 절친이라고 하더니 다른 친구를 숨겨 두었다.”는 것이었다.

 

마침 그 집의 시주를 받고 복을 빌어주는 스님이 찾아왔다가 술독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는 역시 화를 냈다. “자신만을 시봉한다더니 다른 스님을 숨겨 두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꼬리를 물고 싸움이 커지는 중인데 한 선지식이 지나다가 그 상황을 알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술독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모두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술독을 깨뜨렸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잡비유경』의 얘기다. 

 

사진 1. 『잡비유경』.

 

우리의 삶은 이 술독 얘기보다 더 난장판이다. 이 난장판은 끝나야 한다. 허망한 그림자를 실제로 착각한 데서 일어난 근거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독은 깨져야 한다. 그 순간 사람들은 그림자의 실체 없음을 보고 다툼을 멈추게 된다. 조용함이 찾아온다.

 

그런데 편안해졌으니 된 것일까? 조용해졌으니 그만일 것일까? 우리는 이 이야기의 후일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술독이 깨진 자리에 공허만이 남는 것은 아니다. 착각과 집착의 대상이 사라지면 우리의 마음은 본래의 자성으로 귀환한다. 그리하여 자성의 자리에 발을 딛고 서서 아내와 남편, 친구와 친구, 스님과 신도라는 인연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통찰하는 일이 일어난다. 착각이 깨진 그만큼 인연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새롭게 재인식된다. 이미 모든 차별적 모양이 자성의 구현임을 알게 된 입장이므로 그 재인식은 평등성을 기초로 이루어진다.

 

고요함과 비춤의 동시실천

 

착각이 없으므로 밝은 알아차림이 있고, 분쟁이 없으므로 고요함이 현전한다. 분쟁이 사라진 뒤의 고요함[寂]과 고요함 속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차별상의 비춤[照]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것이 바른 수행의 길이고, 바른 깨달음의 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동시적이라야 한다. 만약 고요함에 머문다면 이기적 초월을 지향하는 작은 불교가 될 것이고, 차별적 모양에 치우친다면 힘이 부족한 보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은 그 치우침의 오류를 지적한다.

 

“고요하기만 하고 비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돌멩이나 나무토막과 같고, 비추기만 하고 고요하지 못하다면 들뜬 상념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 2. 상적상조의 부처님인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해인사 대적광전.

 

고요함과 밝음을 동시에 실천하여 그것을 함께 구현하는 길을 걷는 것이 ‘큰 불교[大乘]’의 길이고 상적상조의 교리이다. 상적상조는 다양한 표현법을 갖는다. 법계의 이치로 보자면 현상과 본질의 통일[法性圓融]이 된다. 원리에 따라 수행하는 차원에서는 멈춤과 통찰의 동시실천[止觀雙運]이 된다. 수행이 성숙하여 자연스러운 실천의 차원으로 진입하면 이것을 선정과 지혜의 동시실천[定慧等持]이라 말하고, 견성하여 성불하면 열반보리涅槃菩提라고 표현한다. 성철스님이 자주 썼던 ‘쌍으로 막고, 쌍으로 비춘다[雙遮雙照]’는 말도 그 동의어에 해당한다. 결국 상적상조는 이치적 차원, 수행의 차원, 깨달음의 증득이라는 각 차원에 있어서 공히 그 진실성을 담보하는 표준이 된다.

 

그런데 다시 비유담으로 돌아가 보자. 어떻게 하면 술독이 깨지는가? 선지식이 문득 찾아와 그것을 깨뜨려 주는가? 물론 선지식을 잘 만나면 그 순간 착각의 술독이 깨지고 실상을 여실하게 보는 눈뜸이 일어나게 된다. 실제로 불교의 역사에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내려지는 순간 망상의 술독을 깨뜨리고 확실하게 눈을 떴던 견성의 사례들이 드물지 않게 남아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눈을 뜨지 못하는가? 선지식이 없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우주에 충만한 불보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하면서도 멋진 방편으로 술독을 깨뜨려 주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준비가 미흡한 우리들에게 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문을 두드리는 선지식을 우리는 헛걸음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무심의 선정은 깨달음의 전제조건

 

어떻게 생각해 봐도 선지식의 두드림에 호응하여 바로 깨쳤던 사람들은 이미 준비가 된 이들이었다. 부처님의 첫 제자였던 교진여 등의 다섯 비구만 해도 그렇다. 그들은 부처님을 따라 모든 수행을 함께 하던 당대 최고의 수행자들이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다만 이들은 일종의 공적주의에 빠져 있었다. 부처님의 중도 가르침은 한쪽으로 치우쳤던 이들의 관점을 교정하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즉시 깨침을 얻어 ‘집제集諦가 그대로 멸제滅諦’라는 중도의 선언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경우라고 안 그럴까? 조주선사를 찾아왔던 엄양존자嚴陽尊者는 이미 무심의 고요함을 확보한 수준 높은 수행자였다. 그래서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 어떻느냐?”고 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조주선사는 “내려 놓으라[放下著]”고 대답한다. 그 무심의 고요함을 자부하는 마지막 마음까지 내려놓으라는 뜻이었다.

 

엄양존자는 다시 질문을 한다. “모두 내려놓아 한 물건도 없는데 다시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조주선사는 다시 두드린다. “그렇다면 다시 메고 가라.” 그에게 고요함을 자부하는 마음이 남아 있음을 재차 지적한 것이다. 이에 엄양존자는 크게 깨닫는다. 같은 차원에서 운문선사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허물이 없지 않겠느냐?”고 질문한 수행자에게 “수미산”이라고 대답했다. 무심의 고요를 지키는 허물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사진 3. 만년설에 덮여 있는 수미산(카일라스).

 

이러한 해석과 이해에 큰 문제는 없다. 다만 공안을 이렇게 해석하고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깨달음의 지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이란 무심에 안주하는 마음마저 내려놓을 때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선사의 한마디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무심에 도달한 수행자를 내몰아 마지막 관문을 뚫고 나가도록 하는 채찍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차원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다.

 

물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이러한 드문 경계는 오랜 수행의 결과일 수도 있고 순간적 몰입의 결과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라 해도 그것이 앎과 이해의 차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달마스님은 말한다. “마음이 있으면 무수한 겁을 거쳐도 범부로 남을 것이고, 마음이 없으면 찰나 간에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소멸해야 하는 마음에는 시비분별을 내용으로 하는 일체의 마음이 포함된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저열한 마음도 소멸해야 하는 마음이고, 보리를 추구하는 마음과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고상한 마음도 결국은 내려놓아야 하는 마음이다. 나아가 제8아뢰야식의 미세한 흐름조차 끊어내야 하는 마음의 잔재이다.

 

성철스님은 생각의 파도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아뢰야식 차원의 무심을 ‘가짜 무심[假無心]’이라고 부른다. 납에 금을 입히면 빛과 무게가 모두 진짜 금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시커먼 속내가 드러난다. 아뢰야식 차원의 무심이 바로 그러해서 캄캄한 무지각의 지배를 받는다. 고요함은 성취되었지만 밝은 관찰이 없다. 

 

만약 이 고요함에 만족하여 머물러 버린다면 그것은 바른 수행도 아니고 더더구나 바른 깨달음도 아니다. 이것이 성철스님의 강조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뢰야식 차원의 무심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쇠를 황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신비한 영약이 한 방울 떨어지는 순간 무쇠가 황금으로 변하듯이 선지식의 한마디 말에 궁극의 깨침이 일어나게 되는 지점이다. 선정의 고요함에 집착하는 선정주의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심의 선정이 필요 없다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상적상조의 참선, 어떻게 할 것인가

 

청량국사에게 황제가 질문을 한다. “불교에서는 지혜가 최고다. 6바라밀도 결국은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것이다. 굳이 선정을 함께 닦을 필요가 있는가?” 이에 청량국사가 대답한다. “수행의 현장에서 고요함은 밝은 통찰을 심화시키고, 밝은 통찰은 고요함을 완전하게 한다. 고요함과 지혜가 함께 흘러야 비로소 부처의 열매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 고요함과 비춤은 순차적인 것처럼 보인다. 논리적으로도 고요함이 먼저 있어야 밝은 비춤이 찾아오게 될 것 같다. 파도가 고요해져야 천지만물이 분명하게 비춰지는 일이 있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실천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시적이다. 청량국사가 밝힌 것처럼 선정과 지혜, 고요함과 비춤은 서로를 증장시키고 완성해 주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선문에 전하는 옛날이야기가 하나 있다.

 

“한 동자승이 주방장 스님의 심부름으로 기름을 사러 나갔다. 주방장 스님은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도록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동자승은 기름을 사가지고 돌아오면서 기름에만 신경을 쓰느라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돌부리에 걸리고 구덩이를 헛디뎌 기름을 태반이나 쏟고 말았다. 동자승은 주방장 스님의 호된 꾸중을 들어야 했다. 

 

동자승이 두 번째 기름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노스님이 나와서 주방장과 다른 당부를 했다. 기름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주변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을 자신에게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동자승은 돌아오면서 들고 있는 기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노스님이 당부한 대로 시야를 열어 풍경도 보고, 농부가 밭가는 것도 보고, 아이들이 노는 것도 보고, 노인들이 바둑을 두는 것도 보았다. 그렇게 해서 사찰에 돌아왔는데 기름이 쏟아지지 않았다.”

 

운전을 할 때도 앞만 뚫어지게 주시하면 위험하다. 앞을 주시하되 시선을 나누어 양 옆과 뒤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래야 급정거, 급가속 없이 물 흐르듯 안전하게 차를 운전할 수 있다. 고요함과 비춤의 동시 실천, 상적상조의 원리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이 상적상조의 법문에서 그 고요함과 비춤의 불이성에 주목해야 한다. 고요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밝은 비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등불과 등불의 빛이 둘이 아닌 것에 비유되기도 하고, 거울과 거울의 비춤이 둘이 아닌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적상조를 발심에서 견성성불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동시에 실천하는 것이 참선이다. 무엇보다 화두참구는 구조적으로 그것을 가능케 한다. 이와 관련하여 성철스님은 특히 화두참구를 할 때 꼭 “어째서”를 붙이도록 가르쳤다.

 

“그냥 ‘무’ 하면 그만이지 어디 딴 거 뭐 있나 하는 그런 소리 더러 들었는데 예전 스님들이 다 말씀하시기를 ‘조주인심도무趙州因甚道無?’ 조주는 어째서 ‘무’라 했나? 조주가 어째서? 하는 식으로 ‘어째서’를 넣으라고 했어. 화두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니 마삼근麻三斤이니 무슨무슨 화두, 화두가 안 많나? 하지만 어떤 화두를 하던지, 어째서 어째서 이걸 늘 붙여서 해야 된다 말이야. ‘어째서’를 넣지 않으면 깊이 못 들어가. 절대 깊이 못 들어가!” 

 

사진 4. 『성철스님 화두참선법』(장경각, 2016).

 

성철스님은 ‘어째서’를 붙이지 않으면 공부가 깊이 못 들어간다고 거듭 강조한다. ‘무’, ‘마삼근’이라고 화두를 들면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이르러 고요함을 성취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면밀한 관찰이 없다. ‘어째서’를 붙이면 무심의 고요함은 더 완전해지고 밝은 관찰은 더 깊어진다. 이것이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고요함과 비춤을 심화시키는 동력이 된다. 그러니까 성철스님의 화두참선법은 상적상조의 실천과 구현을 위한 효과적인 길에 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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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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