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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분파분증分破分證 전파원증全破圓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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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3 년 8 월 [통권 제124호]  /     /  작성일23-08-04 23:46  /   조회1,22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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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일반화는 곤란하겠지만 중국에는 남북 간의 기후 및 지리적 차이에 의한 문화적 차별성이 뚜렷하다. 그래서 북방이 집체주의적이라면 남방은 개인주의적이다. 북방이 유가적이라면 남방은 도가적이다. 북방이 현실지향적이라면 남방은 초월지향적이다. 

 

분파분증론에 대한 비판

 

불교적으로 보아도 남북 간의 차별성이 뚜렷하다. 북방이 교학을 중시했다면 남방은 선 수행을 중시했다. 같은 선이라 해도 남방은 돈오적 초월을 중시했고 북방은 점수적 실천을 중시했다. 선종에 남돈북점南頓北漸이라는 말이 있게 된 배경이다.

 

또 북방이 친 정치적이라면 남방은 탈 정치적이다. 예컨대 신수스님은 낙양과 장안의 법주法主이자 세 황제(측천무후, 중종, 예종)의 스승을 역임하며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친 정치적이다. 이에 비해 남방 돈오의 길을 열었던 혜능스님은 동행을 요구하는 사신 설간에게 목까지 내놓으며 황제의 부름을 거절하였다. 인연으로 만난 교화의 현장을 떠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탈 정치적이다.

 

사진 1. 규봉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러한 남북 간의 차별성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돈오와 점수는 상호 간의 활발한 교섭 작용으로 그 모양을 다변화해 나갔기 때문이다. 규봉스님의 돈오점수설 같은 것이 그 전형에 해당한다. 그것은 남방의 돈오적 특성과 북방의 점수적 특성을 결합한 노력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교학에도 돈오와 점수를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엿보인다. 특히 원교圓敎, 즉 완전한 불교를 자처하는 천태나 화엄이 그렇다. 천태나 화엄에서는 보살의 지위가 시작되는 10주 초주에 돈오견성이 일어난 뒤 10주, 10행, 10회향, 10지, 등각의 지위를 차례로 밟아 묘각에 이른다는 초주 견성론을 주장한다. 교종의 돈오점수설이라 할 수 있다. 성철스님은 이것을 분파분증이라고 표현한다. 부분적으로 무명을 타파하여[分破] 그만큼 법신을 증득한다[分證]는 뜻이다.

 

성철스님은 분파분증론에서 주로 천태와 화엄의 돈오점수적 지위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번뇌의 일부, 혹은 덩어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초주의 차원을 견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점, 지적 이해에 바탕하여 점차적 지위를 밟아간다면 그러한 수행으로는 강력한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비판의 요지이다. 그런데 천태나 화엄이 동일하게 10주 초주에 견성한 뒤 본격적 수행에 들어간다고 주장하지만 그 차원이 천지현격으로 다르다. 견성이 일어난다는 10주 초주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태의 지위론

 

천태의 경우, 10신의 차원에서 견사혹과 진사혹을 모두 타파함으로써 10주의 초주에 견성하게 된다고 규정한다. 그런 뒤 10주에서 10행, 10회향, 10지, 등각을 거쳐 묘각에 이르기까지 42품의 무명을 하나씩 타파하여 그만큼의 진여법신을 증득한다는 것이다. 이때 10주 초주에 진입하기 전에 타파한다는 견사혹과 진사혹은 거친 번뇌의 총합이다. 이것을 타파하면 장교藏敎의 아라한에 해당한다. 그래서 천태에서는 다른 그룹의 궁극적 도달점이 자기네 그룹의 본격적 시작점이라고 자부하는 것이다. 이 초주의 견성을 시작점으로 하여 무명을 조각조각 타파해 나가 그만큼의 진여를 증득하는 여정이 시작된다. 그 차원이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천태스님 스스로도 ‘자신은 아직 초주의 지위에 진입하지 못한’ 범부라고 밝혔을 정도이다. 석가의 화신으로 불렸던 천태스님조차 그렇다면 보통의 수행자에게 초주의 지위는 까마득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사진 2. 천태종조 천태지의대사.

 

이 어마어마한 여정 앞에서 수행의 용기가 꺾일 수도 있다. 천태스님은 그래서 이와 별도로 6즉불의 지위론을 제시한다. 이치적으로 부처인 지위[理卽]에서 출발하여 가르침을 듣는 차원 이대로 부처인 명자즉名字卽, 관조의 수행을 진행하는 차원 이대로 부처인 관행즉觀行卽, 견사혹과 진사혹을 모두 끊어 부처와 닮게 되는 상사즉相似卽, 근본무명을 한 조각씩 타파하며 그만큼의 진여를 증득하는 분증즉分證卽, 그리고 궁극적 깨달음의 지위인 구경즉究竟卽에 이른다는 6단계 지위론이 그것이다.

 

이중 분파분증이 시작되는 초주의 지위는 궁극의 깨달음이 일어나기 직전인 분증즉에 해당한다. 이에 의하면 어느 지위나 그대로 곧[卽] 부처이므로 그 자체로 완전하다. 그러니 성불이 까마득하다는 생각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 또한 6단계의 지위가 분명하므로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고서 스스로 부처가 되었다고 자처하는 넘침을 차단할 수 있다. 각각의 지위가 그대로 부처이므로 돈오이고 6단계를 밟아 나가므로 점수다.

 

이처럼 천태의 지위론에는 돈오적 초월주의와 점수적 현실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견사혹, 진사혹이 소멸한 자리에서 본격적 수행이 시작된다고 규정하여 깨닫지 못한 현재의 상황을 인정하고 들어가므로 현실적이다. 이에 비해 무명혹이 온전히 남아 있는 지점인 초주에 견성을 한다고 규정하므로 초월적이다.

 

성철스님은 이 분파분증론을 비판한다. 자아에 대한 집착(견사혹)은 물론 공에 대한 집착(진사혹)에서 벗어난 10주 초주가 굉장한 차원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아도 앞으로 통과해야 할 지위가 무려 41개나 된다. 아무리 본격적인 차원이라 해도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돈오, 견성, 무생법인의 성취가 곧 구경각임을 주장하는 성철스님의 입장에서 이것을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간지점에 견성이 일어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 끊어야 할 무명이 남아 있는 차원을 견성이라고 인정한다면 이치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천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견성은 참선수행의 궁극적 도달점이다. 만약 이것이 초주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떤 중간지점에서 견성을 인정받는다면 많은 수행자가 거기에 머물러버릴 수 있다. 10주 초 견성론을 비판하는 이유이다.

 

화엄의 지위론

 

한편 화엄의 주장은 천태에 비해 훨씬 더 초월적이고 낭만적이다. 이에 의하면 10주 초에 견성하여 부처가 된 뒤 지위를 밟아가며 동체대지(10주), 동체대행(10행), 회향대원(10회향)를 성취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나아가 10지에 진입한 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따르는 길을 걸어(초지~7지) 무생법인을 증득하는(8지) 성취에 이른다.

 

10주 초, 초발심에 앞당겨 깨닫고 나중에 닦아 나간다는 분수분득分修分得의 논리이다. 번뇌의 타파에 방점을 찍는 천태와 달리 법신의 성취에 방점을 찍는 것이 화엄의 특징이다. 그럼에도 천태와 비교하면 견성이 일어나는 지점인 10주 초주의 내용이 판연히 다르다. 천태에서는 10주에 진입하기 전, 그러니까 10신에 견사혹과 진사혹이 끊는다고 말한다.

 

사진 3. 화엄종조 현수법장 대사.

 

이에 비해 화엄에서 견성이 일어난다는 10주 초는 문자 그대로의 초발심에 가깝다. 견사혹과 진사혹의 타파가 초주 견성 이후에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화엄의 이치 자체가 그렇다. 전체 법계를 하나의 진여로 보는 화엄의 입장에서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 모든 것이 부처의 성품에서 일어난 것[性起]이므로 원인과 결과가 둘이 아니다.

 

파도 그대로 바다라서 파도를 모두 잠재워야 바다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바닷물을 한 모금 먹어 보면 전체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알기 위해 그것을 전부 먹어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바닷물을 한 모금 먹어 보는 체험이 10주 초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의 여정은 부처의 차원에서 진행된다고 말한다. 미혹을 깨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화엄에서는 이것을 결과로서의 수행[果行], 혹은 완성된 원인[圓因]이라고 표현한다. 이에 성철스님은 묻는다. 그렇다면 42단계의 지위가 왜 필요한가?

 

“이치는 그러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각 지위의 지혜와 능력에 차이가 있는 법이다. 만일 10주 초에서 완전히 성불했다면 다시 42위를 밟으며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더 닦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불과라 할 수 없다.”

 

성철스님에 의하면 더 닦을 것이 남아 있다면 구경각이 아니다. 10주 초에서 10행, 10회향을 거쳐 10지 제7지에 이르기까지 견사혹과 진사혹을 타파하기 위해, 그리고 무생법인을 성취하기 위해 유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7지까지의 어떤 지위에도 견성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

 

나아가 무생법인을 성취하여 무공용의 수행이 이루어진다는 8지 역시 견성이라 할 수 없다. 진정한 무생법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9지, 10지, 등각의 지위를 거치며 미세한 무명을 끊어가는 숙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마당에 황금이 묻혀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은 황금을 직접 드러내는 일과 다르다. 또한 황금을 일부 드러내는 일은 황금 전체를 드러내는 일과 전혀 다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부처가 체화되는 지위인 8지의 무생법인을 가무생假無生이라고 부른다. 가짜 무생법인이라는 뜻이다. 구경각을 성취한 이후라야 진정한 무생법인이라고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견성과 성불이 일어난다는 초주는 물론 7지에 이르기까지는 애쓰는 수행이 필요하므로 저절로 공부가 되는 8지와 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8지 이후의 무공용행 역시 구경각과 질적으로 다르다. 9지, 10지, 등각을 거쳐 구경각에 이르는 승진의 여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부가 완전히 끝나는 절학무위絶學無爲의 견성이 아니다. 황금이 드러났지만 거기에 끼어 있는 잡석을 걷어내는 작업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초주의 견성을 1차 완성, 8지 무생법인의 성취를 2차 완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3차 완성인 구경각이 진정한 결과라면 앞의 1차, 2차 완성은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돈오, 견성, 무생법인이라는 궁극의 결과를 가리키는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철스님의 주장이다. 

 

전파원증全破圓證만이 견성

 

화엄의 표어인 ‘초발심을 할 때 그대로 무상정각을 성취한다[初發心時便正覺]’는 말은 인과가 원융하다는 이치에서는 지당하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원인은 원인이고 결과는 결과다. 그래서 같은 화엄이라 해도 학자들 간에 견성이 일어나는 지점을 달리 말하게 된다. 이에 대해 성철스님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통현장자는 초주에서 견성해 제8지에 이르러 무생법인을 증득한다 하였다. 청량국사는 부처님께서 8지에 이르러 무생법인을 증득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에 있어 미세망상이 남아 있으므로 진정한 무생법인은 아니고 불지라야 진정한 무생이라 하였다. 현수스님은 보살지를 넘어 10지 종심에 이르러 일체 망상습기를 다 제거하고 견성한다고 하셨다.”

 

성철스님은 그 어떤 것이라 해도 완전한 깨달음, 즉 전파원증全破圓證이 아니라면 견성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성철스님은 일찍이 법정스님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는 팻말이 걸린 쇠말뚝을 박아놓고 살았다. 타파해야 할 번뇌가 남아 있다면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닦아야 할 도가 남아 있다면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일체의 중간적 경계를 말끔히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다. 문수보살의 뺨을 때린 무착스님의 폭거가 선문의 찬양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 4. 무착문희선사.

 

“무착스님은 문수보살을 친견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희구한 결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났다. 그렇지만 무착스님은 알아채지 못했다. 이후 앙산스님을 만나 눈을 떠 공양주 소임[典座]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죽 솥에서 방울을 타고 문수보살이 나타났다. 이에 무착이 주걱으로 때리며 말했다. “문수는 네 문수고, 무착은 내 무착이다.” 이에 문수가 하늘로 올라가며 노래했다. “쓴 박[苦瓠]은 뿌리까지 쓰고, 단 외[甛瓜]는 꼭지까지 단 법! 3아승지겁을 공부했건만 늙은 중에게 쫓겨나는구나.” 

 

그토록 소원했던 문수보살의 친견이 이루어졌음에도 주걱으로 보살의 뺨을 때린 무착스님은 집착없음[無著]의 끝을 보여준다. 일체의 경계는 머무는 순간 집착이 된다. 눈을 뜬 무착스님은 문수보살의 현현조차 집착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문수보살의 뺨에 서슴없이 주걱을 날릴 수 있었다. 그것은 천태와 화엄의 초주견성론을 비판하는 성철스님의 입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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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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