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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부처의 종자를 소멸시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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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3 년 10 월 [통권 제126호]  /     /  작성일23-10-05 11:58  /   조회1,41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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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이 곧 부처다. 이것은 선문의 제일 명제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중생으로 사는가? 중생이 곧 부처이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이 사실을 ‘바로 믿고, 바로 보고,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씨앗은 열매로 익어야 한다

 

열심히 하는 노력이 있어야 씨앗으로서의 불성이 열매로 제대로 익어 수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설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중간에 머물러 버린다면 그로 인해 정체하거나, 퇴보하거나, 외도의 길, 삿된 마구니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성불의 길이 넓게 열려 있는 만큼 부처의 종자를 소멸시키는 길도 그만큼 크게 열려 있는 것이다.

 

부처의 종자를 소멸시키는 위험은 대체로 남다른 앎을 성취했다는 자부심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스스로 부처와 같은 깨달음, 혹은 부처보다 더 나은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자부하여 그것을 자랑하는 말들을 하게 된다. 이것을 큰 거짓말[大妄語]이라고 한다. 보통의 작은 거짓말은 스스로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안다. 얼마든지 회개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가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자부심에는 회개의 가능성이 없다. 더구나 믿는 마음까지 실려 있으므로 그 하는 말들에 힘이 넘친다. 그래서 추앙하는 대중이 늘어나지 않을 수 없다. 회개가 일어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미치는 해악 또한 큰 것이다.

 

사진 1. 천안제일 아나율존자. 

 

부처의 종자가 소멸하는 일[銷滅佛種]은 4바라이죄와 5역죄를 저지를 때 일어난다. 4바라이죄는 보통 음행, 도둑질, 살생, 거짓말의 네 가지를 드는데 수행자의 ‘목이 끊어지는 죄[斷頭]’라고 번역된다. 5역죄는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일, 아라한을 죽이는 일,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는 일, 승가를 분열시키는 일의 다섯 가지로서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죄[五無間]라고 번역된다. 이 중 4바라이죄의 대표로는 선성[善星]비구가 꼽히고, 5역죄의 전형은 제바달다에게서 찾아진다.

 

선성비구는 부처님의 맏아들(부처님에게는 선성, 우마야, 라후라의 세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이었다. 그는 오랜 학습과 수행을 통해 12부경을 암송하고 4선정을 성취한 뛰어난 수행자였다. 그런 선성비구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법을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제바달다는 부처님의 사촌이고 아난존자의 친형으로서 교와 선에 두루 뛰어났다. 그리고 나중에는 뛰어난 신통력까지 갖추게 된다. 그런 제바달다가 스스로 붓다를 사칭하면서 부처님과 그 법을 훼손하는 악인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사진 2. 주리반특가존자.

 

아이러니한 일이다. 부처님의 가장 가까운 혈족인 친아들과 사촌 동생, 게다가 뛰어난 수행자로서 높은 선정을 성취한 이 두 사람이 어떻게 하여 악인의 대표가 되었던 것일까? 생각해 보자. 불교의 수행은 자기가 직면한 현재의 장애를 내려놓는 방식으로 실천된다. 예컨대 잠이 많았던 아나율은 부처님의 꾸짖음을 받고 나서 잠을 자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수행에 임했다. 그리하여 육체의 눈이 멀어버리고 말았지만 부처님의 교단에서 최고의 천안통天眼通을 성취한 아라한이 된다. 아나율은 ‘천안에 제일이어서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 발자국까지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 주리반특가라는 머리 나쁜 제자가 있었다. 하도 머리가 나빠서 한 구절의 게송조차 외울 수 없었다. 그런데 부처님이 시키는 대로 흰 천 하나를 가지고 ‘더러움을 없애자(라조할라낭=청소)’는 말을 반복하면서 더러운 때를 닦은 결과 무명을 벗고 ‘걸림 없는 통찰지[無礙解]’를 갖춘 아라한이 되었다. 성취해야 할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면한 장애를 내려놓는 일이 바로 불법을 성취하는 길임을 웅변하는 얘기들이다. 

 

선성비구의 부처 종자 소멸

 

그렇다면 선성비구와 제바달다가 직면한 장애는 무엇이었을까? 선성비구의 장애는 자기 지혜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그는 세속에 있을 때는 카필라국의 1순위 왕위 계승자였고, 출가 이후에는 부처님의 아들로서 뛰어난 수행자였다. 그는 24년간의 수행으로 12부경을 암송하고 4선정을 성취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부처님의 아들이지, 4선정을 성취했지, 그의 자부심은 여기에서 극에 달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까지 무시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그는 부처님의 설법이 밤늦게까지 계속되자 “밤에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에비(박구라)가 찾아옵니다.”라는 말로 설법을 끊을 만큼 막돼먹었다.

 

또 선성비구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발자국을 경배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겨 부처님의 발자국을 지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그는 인과와 해탈을 부정하는 자이나교 나체파 수행자였던 고득苦得과 같은 사람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고득이 그 업보로 복통으로 죽게 될 것이고, 죽은 뒤에는 아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선성비구는 그 예언을 거짓말로 만들기 위해 고득에게 7일 동안 식사를 하지 말라는 제안을 한다.

 

사진 3. 자이나교의 교주 마하비라. 

 

고득은 그 제안에 따라 단식을 한다. 그리고 6일이 지나도록 별일이 없는 것을 보고 안심하여 7일째 되는 날 흑밀 꿀을 먹었다. 꿀을 먹고 나니 목이 말랐다. 그래서 냉수를 마셨는데 그 일로 복통이 일어나 바로 죽고 말았다. 죽은 뒤 고득의 시체는 시다림의 공터에 버려졌고, 그 자리에서 그는 먹으면 바로 토하는 아귀로 환생하였다. 선성비구는 이 모든 일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을 부정하고 해탈열반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결국은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졌다. 

 

제바달다의 부처 종자 소멸

 

한편 5역죄의 대표인 제바달다가 빠진 함정은 성스러운 권력에 대한 꿈이었다. 일찍이 그는 부처님의 자리를 자기에게 물려달라고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이것이 통하지 않자 당시 마가다국의 태자였던 아사세를 만나 “당신은 새 왕이 되고 나는 새 부처가 되자.”고 모의한다. 아사세 태자는 부친 빔비사라 왕을 시해하여 왕위에 오른 뒤 제바달다에게 절대적인 후원을 보낸다.

 

이후 제바달다는 부처님을 해치기 위해 미친 코끼리를 풀거나 부처님을 향해 바위를 떨어뜨리는 등 갖은 악행을 다한다. 당시 바위에서 떨어진 돌 조각에 부처님은 발뒤꿈치를 다쳐서 부처님의 몸에서 피가 나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제바달다는 직접 자기의 손가락에 독을 발라 부처님을 할퀴어 독살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그 손가락에 난 작은 상처로 인해 스스로 독에 중독이 되었고, 고통에 시달리다가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사진 4. 제바달다와 아사세 태자.

 

제바달다는 자신의 법이 부처님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두타행頭陀行을 강조하는 새로운 계율을 세우고 별도의 교단을 운영하였다. 그만큼 경전 지식에 있어서나 두타행의 실천과 선정의 성취에 있어서 두루 뛰어났다. 특히 그의 신통력은 스스로 부처님의 두 배를 성취했다고 자신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부처님 재세시에 교단을 분열하여 독립한다. 현장법사가 인도에 유학하던 당시(627~645)까지도 제바달다 교단의 사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고 보면 제바달다 재세시의 세력이 상당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처님의 아들로서, 부처님의 조카로서, 그리고 남다른 선정의 성취자로서 어떻게 보아도 그들은 깨달음에 가장 근접한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둘은 모두 부처의 종자를 소멸하고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왜인가? ‘도가 한 척 높아지면 마가 한 길 높아진다[道高一尺 魔高一丈]’. 이것은 철칙이다. 그러니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바로 전이라면 그 마의 높

이가 어떠했겠는가?

 

우리는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했던 천마 파순波旬이 타화자재천의 천왕이었던 일을 기억해야 한다. 타화자재천은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의 하늘을 뛰어넘은 욕계 최상위 제6천의 하늘이다. 수행자가 타화자재천의 차원이 약속하는 권력과 쾌락의 유혹에 빠졌다는 뜻이다. 수행자가 이 유혹에 지는 순간 스스로 궁극의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선언하거나, 신통력을 자랑하거나, 새로운 교리를 설파한다. 인과를 부정하고, 윤회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계율을 창안한다.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부처님의 법을 훼손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본래 갖춘 부처의 종자를 소멸시켜 성불의 길을 끊어버리고 스스로 마구니가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4바라이, 5역죄를 저지르면서도 선정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바르지 못한 선정은 그 자체가 마구니의 일이다. 음행에 빠지면 선정이 있어도 마왕이 된다. 음행을 하면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고자 하는 일과 같다. 살생을 하면 선정이 있어도 귀신이 된다. 혹은 귀신의 왕이 되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야차, 땅을 기는 나찰이 되기도 한다. 도둑질을 하면 선정이 있어도 도깨비가 된다. 도둑질을 하면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구멍 뚫린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는 일과 같다. 거짓말을 하면 선정이 있어도 부처의 종자가 소멸한다. 거짓말을 하면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일과 같다.

 

그러니 수행자가 저지를 수 있는 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하는 큰 거짓말이다. 이로 인해 타인들의 귀의와 찬탄과 공양을 바라는 자기 애착의 마구니가 되고, 자신의 견해가 부처님과 같거나 더 뛰어나다는 견해의 마구니가 된다. 이러한 거짓에 한 번 노출되고 나면 칼질을 받은 패다라 종려나무가 고사하듯 불성이 소멸해 버리고 만다.

 

사진 5. 패다라 잎으로 만든 패엽경.

 

원래 패다라 나무는 무성한 잎을 자랑한다. 그 잎을 가공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데 썼으므로 패다라 잎은 경전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렇지만 한 번의 칼질에도 바로 고사해 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중생들이 불성을 갖춘 것이 패다라 나무가 패엽경이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여기에 큰 거짓말이라는 칼질이 가해지는 순간, 패다라가 고사하듯 불성이 소멸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부처 종자의 소멸

 

성철스님은 선성비구나 제바달다의 수준이 아니라도 수행의 모든 차원에서 아차! 하면 부처의 종자가 소멸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대망어는 물론, 명예의 추구에 빠지거나, 주지노릇에 골몰하거나, 수행의 공덕과 깨달음의 성취를 부정하거나, 무엇보다도 분별적 지해로 깨달음을 대신하고자 하는 일 등이 모두 본래 갖춘 불성을 소멸시키는 행위들이다. 

 

선문의 입장에서 보자면 깨달음이 유일한 기준이다. 깨닫지 못했다면 사리가 나오고, 천인들의 공양을 받고, 타심통을 하고, 환생을 예언한다 해도 모두 덧없는 일이다. 깨달음을 자처했던 송나라 때 보寶상좌 얘기가 있다.

 

파암조선破庵祖先 선사에게 보寶상좌라는 수행자가 법을 두고 도전을 였다. 스스로 부처의 지견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파암선사와의 선문답에서 보상좌는 일패도지하고 만다. 이에 보상좌는 자신이 부당하게 꺾였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불 속에 들어가 몸을 태워 버렸다. 사람들이 그 일을 성스럽게 여겨 사리를 수습하여 파암선사에게 바쳤다. 파암선사가 사리를 들고 말하였다. “보상좌여! 설사 사리가 부처님처럼 여덟 섬 네 말[八斛四斗]이 나왔다 해도 결코 인정해 줄 수 없다. 오로지 부모미생전의 한마디를 내놓아 봐라.” 그리고는 사리를 땅에 던졌더니 피고름으로 변해 버렸다. 보상좌의 영혼은 결국 피고름 차원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고, ‘허망한 명리의 노예가 되어서 생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회한悔恨’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멸불종銷滅佛種’은 『선문정로』의 마지막 장이다. 일반적 글쓰기로 보자면 결론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성철스님이 가리켜 보이고자 하는 ‘선문의 바른 길’은 ‘소멸불종’의 장에 남김없이 드러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법문에 의하면 모든 잘못은 앎과 이해로 깨달음을 대신하려는 데서 일어난다. 그러니 앎과 지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야말로 부처의 종자를 소멸하는 길이다.

 

이 길에서 일체의 앎과 견해와 이해와 알아차림[知見解會]은 모두 삿되고 악하다. 그래서 모든 견해들에는 삿됨[邪]과 악함[惡]함이라는 모자가 씌워진다. 사해악견邪解惡見, 사지악견邪知惡見, 사지악해邪知惡解와 같은 용어들이 전체 법문에 깔려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앎과 견해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선문에서는 남김없이 떼어내야 할 혹이다. 그렇게 일체의 견해를 내려놓고 진여법계와 한 몸이 될 때 비로소 법신의 정수리[毘盧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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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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