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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성철스님 계시는 곳 사불산 대승사를 향해 / 묘엄스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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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4 년 1 월 [통권 제129호]  /     /  작성일24-01-05 11:23  /   조회59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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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적  

선리연구원 상임연구원

 

이번 호부터 전 봉녕사 승가대학장이자 금강율원 율주였던 묘엄스님의 생애사를 구술로 풀어보고자 한다. 본 원고의 모본이 된 기록물은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고영섭 교수가 면담하였고, 안적(최동순) 스님이 촬영하고 기록하여 영구 보존되고 있는 국가자료이다. 묘엄스님께서 입적하시기 1년 전(2010년 3월~4월)에 구술한 기록물이다.

 

사진 1. 묘엄스님 구술 장면(2010년 3월 28일), 고영섭 교수(가운데), 적연스님(오른쪽).

 

정신대 차출을 피해 대승사로 피난

 

묘엄스님은 14세의 세납으로 윤필암에 출가하였으며, 당시 주위의 상황들을 매우 상세하게 기억한다. 불교계의 시대적 분위기는 물론 대승사에 주석했던 성철스님 등의 활동들도 전달한다. 봉녕사 가람불사와 함께 비구니 교육기관을 일으킨 묘엄 명사, 때로는 위트 넘치는 모습으로 자신의 과거를 술회한다.

 

▶ 출가하시게 된 배경을 말씀해 주시지요.

 

내가 출가할 때는 출가해서 스님이 된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일제시대였어요. 중학교 입학시험을 쳐서 떨어지는 사람은 일본 군수공장으로 보낸다고 그랬는데, 그게 지금 생각하면 정신대로 보낸다는 그런 방침이었었어요. 중학 입학시험을 치니까 그 담당 선생님이 말하기를 “너는 왜 아버지가 없느냐?” 그래요. 청담스님과 어머니는 이혼했거든요. 스님이 “중노릇 잘하게 나와 이혼해 달라.” 하니까, 어머니는 진주시청에 가서 도장 찍고 이혼을 해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혼하신 지 8년 후에 우리 할머니가 청담스님께 부탁하기를 “아들 하나만 낳아주고 가라.” 그래서 제가 태어났습니다.

 

사진 2. 1930년대 진주시 전경.

 

당시는 일제시대인데 이혼했기 때문에 호적은 어머니 앞으로 즉 외가로 올려졌습니다. 학교는 진주여고인데 그때는 일신여학교라고 했습니다. 일신여학교에서는 나를 아버지 없는 사생아라고 여학교에 들어올 수 없다고 그랬어요.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아버지가 있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있다고 내가 들었기 때문이에요. 어린 마음에 이혼이라는 말을 못하고, 선생님께 아버지는 분명히 있다고 했지요. 아버지가 스님이라고 하니까 그 선생님이 “아, 이혼을 했구나!” 그러더라구요. 그러나 나는 그 일신학교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어른들이 그러시는데, 학교에 떨어지고 했으니까 “인순이를 피난시켜야 되겠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잘 알고 지내던 방거사님이라는 분에게 편지를 주면서 나를 대승사 청담스님한테 데려가도록 했어요. 그래서 나는 잠깐 한 1년 피난 가는 줄 알았습니다. 대승사에 갔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섯 살 때 청담스님을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14살에 뵈었으니 세월이 많이 지났지요. 대승사 마당의 쌍련선원에 들어가니까 청담스님하고 성철스님하고 두 분이 화장실에 갔다가 나란히 걸어오는 것 같았어요. 청담스님이 나를 보시더니 “네가 인순이가?” 이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예!” 그러니까, 스님은 “많이 컸다.” 그러시면서 대승사 쌍련선원으로 들어갔습니다.

 

▶ 부친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묵실이라는 데가 있거든요. 성철스님 사시던 묵실(산청군 성철로 125번길)에서 우리집에 오는 분이 있는데 그게 바로 불필스님의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진주에도 중이 되어 가 버린 남자가 있고 혼자 사는 사람이 있다고, 그 불필스님의 어머니가 수소문을 해서 우리집을 찾아오셨어요. 우리 어머니하고 울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10년만 중노릇하고 오겠다고 하더니, 이렇게 안 온다.”고 했는데, 내가 그걸 들어 알고서 대승사를 갔지요.

 

사진 3. 겁외사(묵실)에 세워진 사면불(2021.11.06)은 사불산 대승사에 주석했던 성철스님의 결사정신과 연결된다.

 

그 두 분이 울던 이야기를 스님들께 했습니다. 나는 성철스님이 불필스님 아버지인 줄 몰랐습니다. 묵실에서 여자 한 분이 오셔서 자기 남편도 스님이 됐는데 어디 있는지 10년 되면 온다고 하더니 도를 통해 가지고 온다고 하더니 소식이 없다고 그래요. 두 분이 울고 그러는 걸 봤어요. 내가 “그 스님은 대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때 성철스님이 “내다!” 이러시더라고요. 성철스님이 “내다” 하였고, 두 분이 큰소리로 웃으시더라고요.

 

사진 4. 사불산 대승사의 사면석불.

 

성철스님에게 한글과 한국의 역사를 배우다

 

어머니가 편지를 써 주셨는데, 그건 한글이지요. 그래 갖다가 청담스님께 드리니까 읽어보시고는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도로 접어서 넣으시더라고요. 그리고는 나한테 “편지를 보라.”고 해서 주시는데 나는 그때 한글을 몰랐습니다. 일본글밖에 몰랐거든요. 그래서 “나는 한글을, 조선말을 모릅니다.” 이랬어요. 한문도 전부 일본 발음으로 읽지 우리말로는 못 하거든요. 그래서 한 이틀 대승사 쌍련선원 선방 뒤에서 묵었는데, 그 편지 내용은 “이 아이를 어떻게 하든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달래서 승려를 만들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세속에 안 나오도록 해 달라는 부탁의 내용인데, 어머니가 청담스님한테 쓴 편지입니다. 

 

사진 5. 진주공립농업고등학교 시절 청담순호 스님.

 

▶ 대승사로 이동할 때 속세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나는 한글로 된 편지를 읽을 줄 모르고 또 세속에 살아도 인생관이 확립되지 않은 14살이었어요. 그 편지를 두 분이 읽고 또 부처님의 불교적인 인생관을 알려주면 내가 압니까 듣기만 했지요. 그런데 어마어마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생사가 어떻고 열반이 어떻고 이러시는데, 그런 문제가 내 귀에는 하나도 모르는 소리였어요.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아니라고, 나는 세속에 있으면서 비록 구걸을 하더라도 공부를 해서 박사가 되어 스님께 원수를 갚겠다고 했어요. 우리 다 내버리고 간 원수를 갚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여태까지 살았는데 중이 도대체 뭐냐고요. “나는 중이 안 될 거다.”라고 그러니까 성철스님이 큰소리로 웃으시더라고요.

 

성철스님은 “원수를 푸는 법이 있다.” 그러시면서 모든 것, 세속의 문학적으로 본 거 이런 것들을 가지고 쭉 이야기 했습니다. 한 1주일간 거기에 있으면서 스님한테서 들었는데, 그 모든 걸 알아야 뭣을 하지, 알지 못하는데 승려가 될 수 없고 또 나는 배우는 것이 소원이라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우선 한국 역사, 말하자면 조선 역사지요. 조선 역사부터 배워야겠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조선 역사를 쭉 배우기 시작했어요. 

 

사진 6. 절친한 도반이었던 청담스님과 성철스님.

 

신라, 삼국시대 이런 것을 쭉 하다가 기자조선 무슨 조선 하면서, 당신의 원고지에 칠판 쓰듯이 써 가면서 하시는데 평양, 평양이라는 말이 나와 가지고, 선죽교에서 그 누굽니까, 정몽주, 그분이 피를 흘리고 선죽교에서 죽었는데 그 흔적이, 피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평양이라는 말을 진주에서는 사투리로 ‘피양’이라 하거든요. 그래서 “평양이 뭡니까?” 하니까 “평양이란 소리는 개성에 있는 한양이다.”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일제 때 우리 역사를 안 배웠으니까 통 모르거든요. 그래서 성철스님이 한문으로 쓰시더라고요. 평양平壤이라고. 그래서 내가 “아! 헤이죠へいじょう.” 이랬어요. 일본 사람들은 평양을 헤이죠라고 읽거든요. 그러니까 성철스님이 “왜놈들이 애를 말짱 병신 만들어 놨다.”라고 한탄했어요. 스님은 날 보고 “헤이죠는 알고 평양은 모르나?” 그러시더라고요. 그때 나는 성철스님께 한글과 한국의 역사를 저 신라 때부터 시작해서 다 배웠습니다. 스님이 글씨를 쓴 것이 내게 있어요 지금. 그래서 그걸 스님이 글을 써 주시면서 배웠지요.

 

아는 것을 다 가르쳐 주면 중이 되겠다

 

▶ 진주 집에서 또 다른 기억이 있으신가요?

 

내 생각에, 내가 집을 버리고 중이 된 것은 그때 어린 생각에 ‘일본군이 되지 않으려고 그랬나’ 하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내가 한국 역사를 배우고 하니까 조선인들이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이 사람들 말을 들어도 되겠다.” 그런 생각이 나서 성철스님이 나한테 중이 되라 그러시는데, 내가 “스님 아시는 걸 나를 다~ 가르쳐 주면 중이 되겠다.” 그랬지요. 스님은 “그래, 내가 아는 것 니한테 다 가르쳐 줄게.” 하시는데 말하자면 “가르쳐 주는 것 다 받아들일 아량이 있나?” 이런 뜻으로 이야기 하시더라고요. 나는 “한 번 들으면 기억을 다 하니까 알려만 주시면 다 배우겠다.”고 그랬습니다. 스님은 “그러면 중이 될래?” 하시더라고요. 

 

사진 7. 성철스님의 친필 한국사 정리 노트 일부.

 

그래서 많이 아는 중이 되어야지, 내가 진주 포교당에서 법문하는 거 보니까 잘 못 알아듣겠더라구요. 그 남자 스님 대처승이 법문을 하는데, 여자 스님은 법문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어머니 따라서 여자 스님 절에 갔는데, 그 스님이 상좌를 불 때는 부지깽이로 두드려 패고 욕을 해요. 애가 달아나니까 쫓아가서 또 패고. 그렇게 하는 걸 봐서 그렇게 천한 것이 여자 중이더라구요. 그걸 보고 나는 성철스님한테 “중 안 할란다.” 그랬어요. “많이 배워도 그렇게 해서 천덕꾸러기로 중노릇을 해서 뭣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스님은 “그래 많이 배워 가지고 너가 여자 가운데서 법사가 되면 되지 않겠나? 그러니까 하라, 우리가 가르쳐 준다. 내가 가르쳐 줄테니까 출가를 하라. 중이 되라.”고 하셨지요.

 

며칠 더 있다가, 보름인가 20일인가 대승사 쌍련선원에서 법문을 듣다가 성철스님이 가까운 윤필암에 데려다 주시더라고요. 나는 그때 생각에 큰절에서 스님하고 같이 사는 줄 알았어요. 머리를 깎고 같이 사는 줄 알았는데, 아무 소리를 안 하시고 “가자!” 이래서, 내가 “어디로 갑니까?” 그러자 여자 스님들 사는 데로 간다고 해요. 나는 여기 살지 여자 스님들 사는 데는 안 간다고 그랬어요. 그래도 여자 스님은 여자 스님이 사는 데로 가야 되고 또 우리는 우리대로 살아야 되지 남자와 여자가 같이 안 산다고 그래요. 그래서 또 그런 것인가 보다 하고 그때는 애라서 고집을 세울 줄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거든요. 

 

▶ 성철스님이 스승인데, 비구니 스승도 그때 정하셨던가요?

 

청담스님, 성철스님 두 분이 나를 데리고 윤필암에 데려다 주시고는 거기서 저녁 공양 한 후 다시 큰절로 돌아가셨어요. 그러고 나니까 나는 끈 떨어진 두레박처럼 너무 허전하더라고요. 그동안 그래도 두 분스님이 한 20일간 딱 내 마음의 의지처가 되었거든요. 그런데 나를 윤필암에 데려다 주고 가시니까 마음이 너무 허전하고 그랬는데, 그 이튿날도 안 오시고, 그 다음날도 안 오시고, 한 달이 되어도 안 오시더라구요. 그런데 또 내가 출가를 하면 날마다 달라지는 줄 알았어요.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해서 변화가 날마다 오는 줄 알았지요. 그래서 스님이 되는 줄로 알았는데, 오늘도 내일도 그날이 그날로 날마다 지나가요. 한 달쯤 되니까 머슴이 와서 나를 큰절로 오라고 해요.

 

아무것도 없는 입승 스님을 스승으로 삼다

 

그래서 가니까 성철스님은 “정했나?” 그러시더라고요. 내가 정하는 게 뭔지를 몰랐거든요. “스님, 정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상좌가 되고, 스승을 모시고 하는 그런 걸 정한다.”고 그러대요. 그때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들이 윤필암에 많이 살았어요. 그 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논이 아홉 마지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열 마지기 있고 해요. 그 사람들은 나이가 한 서른하나 서른둘 이런 젊은이들이고 우리 스님은 그때 마흔여섯인가 일곱 살인가 그랬어요. 재산이 아무것도 없는 스님이라 그래요. 그래서 젊은 스님들이 나를 살짝 부르더니 “앞으로 네가 공부 많이 하고 싶다고 했는데, 너에게 공부 가르칠 수 있는 스님을 찾아가야 한다. 그러면 돈이 있는 스님을 찾아야 된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스님을 정해 놓으면은 공부를 할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돈 있는 스님을 정하라고 그러더라고요. 

 

사진 8. 사불산 윤필암 법당.

 

▶ 은사를 정했는데, 성철스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그 스님 이름도 다 기억나는데 그것은 말 안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다는 그 입승스님, 우리 스님이 입승이셨거든요. 요샛말로 규율부장입니다. 큰방의 스님들을 다스리는 법을 세우는 스님이지요. 그 입승스님이 나이도 많고 또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러면 “내가 그 스님(월혜) 상좌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대중스님들 모두가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나는 “그 스님을 스승으로 할란다!”고 했는데, 나는 ‘입승’스님이 이름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입승스님 상좌를 하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큰절 대승사 성철스님한테 가니까 스님은 “스승은 정했나?” 물으시길래, 내가 “입승스님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그러니까 “잘 됐다!”고 했어요. 우리 스님이 공부를 잘하니까 입승이 됐어요. 그것을 다 알아주는 스님이거든요. 그래 잘했다고 하시는데 나는 뭣도 모르는데, 성철스님은 “스님 잘 정했다, 됐다.” 하면서 너무 좋아하시더라구요.

 

사진 9. 구술하는 묘엄스님.

 

그래서 스님을 정했는데 내가 그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날마다 달라지는 줄 알았어요. 공부를 해서 진도가 날마다 달라지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더라고요. 오늘도 고만, 내일도 고만해서 몇 달이 지나니까 계를 받아야 된다고 해요. 그래서 사미니계를 받는데 성철스님이 ‘묘엄妙嚴’이라고 이름을 붓글씨로 이만한 쪽지에 써서 주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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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역임. 현재 불교무형문화연구소(인도철학불교학연구소) 초빙교수. 저서로는 『원묘요세의 백련결사 연구』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호암당 채인환 회고록의 구술사적 가치」, 「보운진조집의 성립과 그 위상 연구」 등 다수.
obuddh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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