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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남종선 전래 이전의 한국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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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  2024 년 2 월 [통권 제130호]  /     /  작성일24-02-05 09:45  /   조회47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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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선 이야기 2 |

 

과거 역사적 사실과 현재 우리들의 인식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패자의 기록은 사라지거나 혹은 왜곡된다. 중국 선종사에 있어서 육조혜능의 헌창에 크게 공헌했던 하택신회가 ‘지해종도知解宗徒’로 폄하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한국선의 시원에 대한 재고

 

“한국선은 나말여초 구산선문에서 시작되었고, 명적도의가 마조의 제자인 서당지장으로부터 남종선을 전래하였다.”라는 한국선의 시원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과연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남종선 전래 이전의 한국선의 다양한 모습에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사진 1. 희양산 봉암사 태고선원.

 

경북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는 1947년 성철, 청담, 자운, 우봉 등이 ‘봉암사 결사’를 일으킨 사찰로 한국선의 성지聖地라 할 수 있다. 이 절은 879년(신라 헌강왕 5) 지증대사智證大師도헌道憲이 창건하였으며, 그가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희양산문의 개산조로 추앙된다. 최치원은 「지증대사적조탑비명」을 지었는데, 여기에서 도헌의 법계를 ‘쌍봉도신→법랑→신행→준범→혜은→도헌’으로 밝히고 있고, 이어 도헌의 법이 양부楊孚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법랑法朗’이 중국선의 실질적인 개창자인 사조 도신道信의 선법을 이어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서, 중국선과 한국선의 시원이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도헌의 사후 봉암사는 쇠락하였고 이후 봉암사를 다시 중창한 인물은 양부의 제자인 정진국사靜眞國師 긍양兢讓이며, 그가 희양산문의 실질적인 개산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 이몽유李夢遊가 찬술한 「정진국사원오지탑비명」에는 긍양의 법맥이 마조계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몽유는 긍양의 법계를 ‘조계혜능→남악회양→마조도일→창주신감→진감혜소(혜명)→도헌→양부→긍양’으로 밝히고 있다. 이는 법맥의 인위적인 조작이다.

 

사진 2.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최치원이 찬술한 「쌍계사진감선사비명」에는 혜소의 제자로 ‘법량法諒’의 이름만 보일 뿐 도헌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혜소의 법을 도헌이 이었다면 도헌과 혜소의 비문을 동시에 찬술한 최치원이 그러한 사실을 분명 기록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혜소의 법이 도헌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즉 고려 초에 이르러 북종선의 법맥은 고려 선종 내부에서 의도적으로 지웠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중국 선종이 남종선 일색으로 변한 것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종선 전래 이전의 한국선의 모습과 사상적 특징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는 원효의 『금강삼매경론』과 법랑-신행 그리고 정중무상 등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이들이 활약한 시기는 통일신라 초기 7세기 말에서 8세기 전반이다. 원효(617~686)와 법랑은 동시대의 인물이며, 신행(704~779)과 무상 또한 동시대의 인물이다. 중국에서는 법상종의 현장(602~664)과 제자들, 화엄의 현수법장(643~712), 조계혜능(638~713) 등이 활약하고 있었고, 신라의 수많은 승려들이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던 시기였다.

 

원효와 한국 선사상의 시원

 

한국 선사상의 시원 역시 원효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원효가 찬술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 바로 ‘삼매三昧’ 즉 선과 관련된 경전이기 때문이다. 『송고승전』을 찬술한 찬녕贊寧은 「당 신라국 원효 전기」에서 원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일찍이 의상 법사와 당에 들어가서 현장 삼장과 자은의 문하에 들어갈 것을 생각했는데, 인연이 어그러져 마음을 그치고 돌아갔다. 내뱉는 말이 거칠고 보이는 행적이 괴팍하였으니 어찌하겠는가. 거사처럼 술집이나 기방에 들어갔고, 지공誌公처럼 칼을 매단 쇠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때로는 소疏를 지어 『화엄경』을 강의하고, 때로는 금琴을 연주하며 사우祠宇에서 즐겼다. 때로는 민가에서 자고, 때로는 산수에서 ‘좌선坐禪’하였다. 마음 가는 대로 근기에 따를 뿐 아무런 정해진 법칙이 없었다.”

 

사진 3.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원효가 ‘좌선’을 즐겨 행했음을 알 수 있는데, 찬녕은 원효 전기에서 『금강삼매경론』의 찬술 경위에 대하여 주로 밝히고 있다. 원효의 수많은 저술 가운데 왜 『금강삼매경론』을 통해 찬녕은 원효의 전기를 기술한 것일까? 이는 『금강삼매경』과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이 10세기 후반 송나라에서 대표적인 선서禪書의 하나로 널리 유통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금강삼매경론』에 나타난 선사상은 한마디로 대승선大乘禪이라 할 수 있는데, 원효는 여기에서 일심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미관행一味觀行의 선 수행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이 책에는 달마의 『이입사행론』의 내용인 이입二入으로서 이입理入과 행입行入, 그리고 실천법인 행입의 내용인 보원행報怨行, 수연행隨緣行, 무소구행無所求行, 칭법행稱法行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입실제품」에는 사조 도신道信의 수일불이守一不移를 연상케 하는 ‘존삼수일存三守一’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 4. 원효대사 진영. 일본 고잔지高山寺 소장.

 

대력보살이 말했다. “셋을 보존하게 하고 하나를 지키게 하여[存三守一] 여래선에 들어가도록 격려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셋을 보존한다는 것은 세 가지 해탈을 보존하는 것을 뜻하며, 하나를 지킨다는 것은 일심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양을 지킨다는 것을 뜻한다. 여래선如來禪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양을 관찰하는 것을 뜻한다.”(주1)

 

『금강삼매경론』의 내용 속에 달마의 『이입사행론』의 내용이 수록된 것을 통해 보면 도선道宣이 645년 집필을 마친 『속고승전』을 원효가 숙지하고 있었으며, 도신의 선사상 또한 이해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 『금강삼매경』의 유포와 『금강삼매경론』의 저술이 원효 당시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한국선의 시원이 중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전래된 것이 아니라 입당 구법승을 매개로 하여 달마와 도신의 선사상 형성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말해 준다.

 

법랑과 신행에 관한 자료

 

법랑과 신행神行(愼行)에 대한 내용은 최치원이 찬술한 「지증대사적조탑비명」과 김헌정金獻貞이 찬술한 「단속사신행선사비명」에 수록되어 있다. 「신행선사비명』에 의하면 신행은 성은 김씨이고 경주 출신이다. 장성한 나이에 출가하여 운정율사運精律師를 스승으로 삼아 2년 동안 수행하였고, 도신의 선법을 이은 법랑이 호거산에서 선지禪旨를 편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3년 동안 선법을 구하였다.

 

법랑이 입적하자 구법을 위하여 당나라 창주滄州로 갔으나 흉년이 들어 도둑이 횡행하고 있었고, 그도 도적 혐의를 받고 옥에 갇혔다가 4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 후 북종 신수의 제자인 보적普寂의 문인 지공志空에게 가서 3년 동안 공부하였고, 지공이 죽기 직전에 관정수기灌頂授記를 받았다. 그 후 귀국하여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다가 779년(혜공왕 15) 76세로 지리산 단속사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제자로 삼륜三輪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 5. 단속사 신행선사비명 탁본.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원.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보면 신행의 선사상은 도신→홍인→신수→보적으로 이어진 북종선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수는 『대승무생방편문』에서 “간심看心하여 청정하게 되면 이를 ‘정심지淨心地’라고 하니, 몸과 마음을 웅크리거나 펴지 말 것이며, 넓고 멀리 놓아서 평등하게 허공이 다하도록 간하라.”(주2)라고 말하고 있다. 「신행선사비명」에는 “신행이 교화를 할 때에는 도의 근기가 있는 사람에게는 간심看心이란 한마디로 가르치고, 그릇이 좀 덜 익은 사람에게는 방편方便으로 여러 가지 문을 제시하여 깨닫게 했다.”(주3)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 “스승을 만날 적마다 눈빛으로 서로 만나고 정신을 벽관壁觀에 집중함에는 당나라에서 홀로 뛰어났다.”(주4)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신행은 북종선의 최초 전래자라 할 수 있다.

 

「지증대사적조탑비명」에는 “중원에서 득도하고는 돌아오지 않거나 혹 득법한 뒤 돌아왔는데, 거두가 된 사람은 손꼽아 셀 만하다. 중국에 귀화한 사람으로는 정중사의 무상無相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이니, 곧 『선보禪譜』에서 익주김益州金, 진주김鎭州金이라 한 사람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정중무상에 대한 기록은 이 외에도 『송고승전』과 『신승전』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정중무상의 선사상

 

구체적인 법계와 행적을 가장 잘 밝히고 있는 것은 돈황본의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라 하겠다. 『역대법보기』에 의하면 무상은 신라의 군남사群南寺에서 출가하였으며, 개원開元 16년(728)에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선정사禪定寺에서 현종玄宗을 알현하였다. 무상의 법계는 ‘도신→홍인→지선→처적→무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홍인의 문하에서 혜능과 신수와 더불어 있는 지선의 법맥을 계승한 것이다. 무상의 교화방식과 선사상에 대하여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김화상金和上은 매년 12월에서 정월에 이르도록 사부대중, 백천만인에게 수계授戒하였다. 엄숙하게 도량을 시설하여 고좌高座에서 설법하였다. 먼저 ‘소리를 끌어 염불[引聲念佛]’하게 하여 숨이 다하도록 하고, 생각이 끊어지고 소리가 멈추어 생각이 그칠 때 다음과 같이 설한다. “기억을 없게 하고[無憶], 생각을 없게 하고[無念], 망령되지 않게 하라[莫妄]. ‘무억’이 계戒이고, ‘무념’이 정定이며, ‘막망’이 혜惠(慧)이다. 이 삼구어三句語는 바로 총지문總持門이다.”(주5)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무상은 ‘인성염불引聲念佛’로부터 시작하여 ‘무억·무념·막망’을 통하여 의 ‘삼구어’가 중심이 되는 설법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상의 사상은 혜능의 돈오법보다는 신수의 점수법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선사상은 남종선이 전래하기 이전 시기부터 수많은 입당구법승을 통하여 중국의 습선자들이나 북종선의 선승들과 교류하면서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마조계의 선사상이 통일신라에 정착하게 된 것은 회창법난 이후의 일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호에서 다루기로 한다.

 

<각주>

(주1) 원효, 『금강삼매경론』, 「입실제품」, “大力菩薩言 何謂存三守一 入如來禪. 佛言 存三者 存三解脫. 守一者 守一心如. 入如來禪者 理觀心如.”

(주2) 『大乘無生方便門』, 大正藏 85. “看心若淨名淨心地, 莫卷縮身心舒展身心, 放曠遠看平等盡虛空看.”

(주3) 金憲貞, 『斷俗寺 神行禪師碑銘』. “倡導群蒙 爲道根者 誨以看心一言 爲熟器者 示以方便多門.” 

(주4) 위의 글. “師資每遇 目擊相逢 凝神壁觀 獨步唐中.”

(주5) 『歷代法寶記』, (大正藏 51), “金和上每年十二月正月, 與四衆百千萬人受緣. 嚴設道場處, 高座說法. 先敎引聲念佛盡一氣, 念絶聲停念訖云: 無憶 無念 莫妄. 無憶是戒, 無念是定, 莫妄是惠. 此三句語卽是總持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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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전북대 철학과 학부, 석사 졸업, 원광대 박사 졸업. 중국 북경대, 절강대, 연변대 방문학자. 한국선학회장과 보조사상연구원장 역임. 『보조지눌의 사상과 영향』, 『언어, 진실을 전달하는가 왜곡하는가』(공저)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brkim1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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