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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禪, 禪과 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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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4 년 2 월 [통권 제130호]  /     /  작성일24-02-05 09:55  /   조회1,17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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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선禪 선과 시 33 

 

한파가 예보되어 산행 출발 시간을 9시 30분에서 11시로 늦추었습니다. 아래위로 오리털 패딩을 입고 단단히 채비했는데 의외로 그렇게 춥지 않습니다. 11시 정각, 20명이 출발합니다.

 

옻골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대암봉과 감덕봉 사이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동남 사면만 열려 있습니다. 경주 최씨 백불암 종가의 자손 20여 호가 살고 있는 집성촌입니다. 

 

우리는 뒷동산 무덤가에 앉아서 잠시 쉬어 갑니다. 이곳에서 갖고 온 간식들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삶은 청계란, 커피, 견과류, 초코파이, 삶은 옥수수, 귤 등 다양합니다. 덕분에 당과 카페인을 충전하고 다시 힘을 내어 산으로 올라갑니다. 

 

옻골재 산행

 

마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옻골재로 올라가는 산길 입구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입니다. 왼쪽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늘어서 있고, 멀리 대암봉(465)이 보입니다. 대암봉을 오르려면 저 능선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수월합니다. 탱자나무 가시를 보면 고디(다슬기)의 나선형 녹색 알맹이가 생각납니다. 알맹이를 탱자나무 가시로 빼먹고 나면 필름처럼 얇은 뚜껑을 툭, 뱉어내곤 했습니다.

 

사진 1. 전형적인 집성촌, 옻골재마을.

 

덤불 속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머리 위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습니다. 계곡물은 며칠 계속된 한파로 얼어붙었습니다. 꽁꽁 언 얼음 밑으로 얼지 않은 물이 흘러갑니다. 얼핏 보면 얼어붙은 것 같아도 놀랍게도 그 밑으로 투명한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단번에 환해집니다.

 

본격적으로 옻골재로 올라가는 계곡 길은 상당히 험하군요. 개울 옆으로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일부 구간은 로프를 잡고 올라갑니다. 아까 길을 잘못 들어 산악자전거를 들고 내려가던 친구는 아마도 이 구간에서 식겁했을 겁니다. 좁은 계곡을 끼고 돌 비탈을 깎아 길을 만들었습니다. 

 

사진 2. 옛날 생각 나는 탱자나무 올타리.

 

산에는 참나무가 많아서 새들도 많고 아마도 다른 짐승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며칠 계속된 한파로 언 땅에서 서릿발 밟히는 소리가 경쾌합니다. 뽀드득, 뽀드득. 오늘은 이 소리를 들으러 옻골재에 왔는가 봅니다. 산길을 걸을 때는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뺨에 닿는 공기를 느끼며 풍경과 소통합니다. 서릿발을 밟을 때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일종의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런 길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조심해야 합니다. 노년에는 균형감, 순발력, 골밀도 등이 떨어지므로 넘어지면 다치거든요. 옻골재를 바로 앞에 두고 우리는 돌아섭니다. 우리 나이에는 산에 오르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이지 정상에 오르는 것은 목표가 아닙니다.

 

사진 3. 험한 오르막길도 돌아서면 내리막길.

 

오르기만 하다가 내려가기 위해 뒤돌아섰을 뿐인데 산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올라갈 때는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중력에 역행하여 올라가다가 중력에 순응하며 내려오기 때문일까요? 산을 바라보는 경계가 이처럼 달라져도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려면 아무리 노력해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언어가 없으면 생각할 수 없고,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닫힌 세계를 열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철학자, 종교인, 과학자, 시인은 물론 많은 사람이 새로운 경지를 표현할 새로운 언어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벅찬 감동은 말로 표현하는 순간 보잘것없어지기 일쑤입니다. 불가에서는 범부의 마음과 깨달은 마음 사이의 거리를 무너뜨리는 언어를 공안이라고 부릅니다. 공안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는 새로운 언어입니다. 산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주는 공안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라는 선어禪語이고, 처음 말한 사람은 황벽(?~850)입니다.

 

누가 물었다. 

“지금 바로 깨달았을 때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황벽이 말했다.

“어묵동정과 모든 소리와 색깔이 전부 부처의 일이다.

달리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는가?

머리 위에 머리를 얹고 부리 위에 부리를 더하지 말라.

다만 다른 견해를 내지 않는다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승려는 승려고 속인은 속인이다.”(주1)

 

일체중생이 모두 지금 있는 그대로 깨달음의 모습이며 따로 얻을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분별하고 차별하는 견해를 일으키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황벽은 자신의 깨달음을 산과 물로 상징하여 펼쳐 보인 것입니다. 황벽의 이 한마디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사진 4. 성철(1912-1993) 대종사.

 

황벽의 설법을 이어받아 300년 동안 운문문언(864~949), 운봉문열(998~1062), 청원유신(1067~1120)(주2), 불지단유(1085~1150), 야보도천(1127~?)의 ‘산시산 수시수’ 설법이 이어졌습니다. 황벽의 최초 설법 이후 250년이 흐른 다음 12세기 초에 청원유신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의 전형이 되는 상당 법문을 합니다. 

 

“노승이 30년 전 참선하지 않았을 때,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선지식을 만나 자그만 깨달음을 얻은 다음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깨달음이 점점 깊어져 안심의 경지休歇處에 들어가게 된 지금에는 다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주3)

 

오랜 수행 끝에 마침내 하나의 휴식처를 얻은 청원유신이 선 수행자로서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고 이것을 세 가지 경계로 나눈 것입니다. 경계가 나타나는 곳은 항상 인간의 의식입니다.

 

첫째 경계는 보통 사람의 평범한 경계이며 삼라만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산을 산으로 보고 물을 물로 보는 상대적 차별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표층에 나타난 것으로 분별망상이라고 하는 것이고, 허공꽃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둘째 경계는 본격적으로 세상을 탐색하기 위해 실재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철학자의 경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자아와 이전에 알고 있던 세계는 모두 꿈이며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표층에서 심층의 세계로 내려가면 무無인 세계, 공空의 세계가 나타납니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도 또한 물이 아닙니다.

 

셋째 경계는 깨달은 존재의 경계입니다. 의심과 비판을 거쳐 다시 삼라만상이 나타나지만, 주체로서의 나도 없고 객체로서의 사물도 없이 주객의 대립을 넘어선 순수존재가 나타납니다. 모든 사물은 전체 그 자체의 현현으로 나타납니다. 표층의 속박을 벗어난 존재는 심층의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셋째 경계의 ‘산시산 수시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심층의 산입니다.

 

이 새로운 언어는 빠르게 해외에도 전해져서 13세기에는 진각혜심(1178~1234), 백운경한(1298~1374) 등에 의해서 우리나라에도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절집 안의 이야기였습니다. 오늘날 모든 국민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를 알게 된 것은 1981년 1월 20일 조계종 종정에 추대된 성철(1912~1993)의 법어입니다.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示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주4)

 

이 짧은 법어는 단번에 전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성철을 대표하는 법어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이 법어를 처음 들었을 때 내 안의 창문이 하나 열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꽉 막힌 일상에 잠시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머리로는 이해해도 그 경지가 어떤 경지인지 알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언어가 없으면 생각조차 할 수 없지만 깨달은 경계는 언어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자를 벗고서 시를 읽어보자

 

가장 깊은 비밀, 말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은 항상 언어의 경계 바깥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깨달음의 경계는 ‘절대적인 것’이라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비록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언어를 통해서 그 극한까지 추구해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진 5. <사공도의 24시품 서화첩> 중 15 소야(경재 정선 그림. 이광사 글씨).

 

“내가 여기에서 쓴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나의 문장을 꿰뚫고 나의 문장에 올라타고 나의 문장을 넘어서서 타오른 후에야 마지막으로 내 문장이 난센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분명 사다리를 타고 난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릴 것이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이들 문장을 극복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세계를 올바르게 보게 된다.”(주5)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의 사다리를 아무리 올라가도 범부는 언어를 넘어 사다리를 던져 버리는 경지까지 올라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 칸 한 칸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사다리도 없지 않겠어요. 우리는 자신의 머리로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언어가 없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으니 우선 모자를 벗고 언어의 사다리를 끝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소나무 아래 오두막을 지어 보자

모자를 벗고서 시를 읽어보자

해 뜨고 해 지는 것을 잊어버리고”(주6)

 

<각주>

(주1) 『宛陵錄』 : 云 今正悟時 佛在何處. 師云 語默動靜一切聲色 盡是佛事 何處覓佛. 不可更頭上安頭 嘴上加嘴 但莫生異見 山是山 水是水 僧是僧 俗是俗.

(주2) 청원유신의 생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오등회원』 권17에 의하면 그의 스승은 황용조심黃龍祖心(1025~1100)이라 명기되어 이를 기준으로 미루어 추정할 뿐이었는데. 최근 번역된 『새로 보는 선불교』 (베르나르 포르, 운주사, 2023)에 생몰 연대가 명기되어 이를 인용하였다.

(주3) 『五燈會元』 卷 第十七, 「靑原惟信章」, 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 見山是山 見水是水 及至後來親見知識 有箇入處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而今得箇休歇處 依前見山祇是山 見水祇是水.

(주4) 「동아일보」 1981년 1월 21일자 10면 기사 (『고경』 2017년 12월호 : 최원섭, 「종정 추대식,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주5)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1922.

(주6) 司空圖, 『二十四詩品』 15 疎野, 築屋松下 脫帽看詩 但知旦暮 不辨何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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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1976년 시). 전 대구시인협회 회장. 대구대학교 사범대 겸임교수, 전 영신중학교 교장.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저서로 『보물찾기』(시와시학사, 2000), 『납작바위』(시와반시사, 2012), 『글쓰기 노트』(집현전, 2018) 등이 있다.
jtsu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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