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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와 불교윤리 ]
불교와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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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  2024 년 2 월 [통권 제130호]  /     /  작성일24-02-05 14:03  /   조회55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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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의 이선균 배우가 향년 48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보다 한 달 전에는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셨던 자승 큰스님이 스스로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 일이 발생해 불교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감히 그분들의 불행하거나 숭고한 죽음을 평가할 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불교 윤리의 관점에서 자살은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대한민국은 OECD 38개국 중 부동의 자살률 1위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 국가에서 10년 이상 반복되고 있는 불명예이자 오명의 기록이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22년에도 인구 10만 명 당 24.1명이 자살해서 OECD 평균값 11.1명을 두 배나 훌쩍 뛰어넘는 수치를 보였다. 상대적으로 노인들의 자살률이 높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청년 자살률도 가파른 상승곡선을 타고 있다. 

 

사진 1. OECD 회원국의 자살률. 이미지: 보건복지부.

 

통계청은 같은 해 우리나라의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었다고 발표했다. 다른 세대의 사망 원인 1위가 각종 암이었던 것에 비해 청년세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타깝지만 20대 사망자 가운데 절반인 50.6%는 자살로 인한 죽음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한때 신도 숫자가 1,000만 명이 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종교체계보다도 생명존중 사상이라는 이미지가 뚜렷한 불교가 자살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종교와 자살의 문제, 불교의 경우

 

관련 분야의 연구결과들에 의하면 개인의 종교성은 자살과 같은 충동적인 행위를 예방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간단하게 말해 자신의 신앙에 대한 믿음이 깊은 사람일수록 자살하는 비율이 그만큼 낮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전통들은 이론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차원에서도 자살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해왔다.

 

흥미로운 것은 개신교 신자들의 자살률이 가톨릭 신자들보다 높고, 가톨릭 신자들의 자살률이 유대교 신자들보다 높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대교 신자들의 자살률이 가장 낮다는 것을 말해 준다.(주1) 그 이유는 아마도 창조주 신에 대한 절대적 충성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불교 윤리에서는 자살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우선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생명윤리의 문제들은 오계의 으뜸인 ‘불살생계’의 취지에 비추어 포괄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알다시피 근본불교와 대승불교가 처음부터 공유해 온 한 가지 대원칙은 바로 비폭력의 원리, 즉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이거나 상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도덕 명제이다. 자살의 경우도 당연히 이러한 기준의 적용을 받아야 마땅하다. 누군가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고성제와 집성제)을 자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열반의 삶(멸성제와 팔정도)을 추구하는 대신, 고의로 자기 목숨을 빼앗음으로써 일상의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한다면, 이전보다 훨씬 낮은 단계의 비참한 삶을 업보로 받게 되는 것 외에 다른 어떠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범망경』과 『사분율』 등에는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방편으로 죽이거나, 찬탄하여 죽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으로 죽이는, 그 모든 짓을 하지 말지니 (중략) 산 생명을 죽이는 것은 바라이죄”라는 언급이 나온다. 그리고 “비구가 스스로 땅을 파거나 타인을 시켜서 파게 하면 바일제”라고도 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는 우선적인 도덕 감정은 무엇보다도 갖가지 종류의 크고 작은 생명체들을 가능하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땅을 함부로 파지 말라거나 물속의 미생물까지 죽이지 말라는 것은 장차 온전한 생명체가 될 어떤 생명의 ‘연속성(continuity)’과 ‘잠재성(potentiality)’을 고스란히 인정한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뭇 생명체들을 대하는 붓다의 정서가 이럴진대 깨달음을 얻어 열반을 성취할 가능성이 어떤 존재보다도 높은 인간이 한순간의 괴로움을 모면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은 불살생계의 의도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반불교적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자살 사례에 대한 붓다의 입장

 

붓다는 종종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의 자살과 미처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일반 재가자의 자살을 구분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탐진치貪瞋癡로 상징되는 모든 욕망을 끊은 가운데 말 그대로 허물없는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려는 갈망인 욕애欲愛(kāma-taṅhā)와 이를 계속 즐기며 살고 싶은 욕망인 유애有愛(bhava-taṅhā)로부터 결핍이나 환멸을 느낀 나머지 또 다른 욕망인 비유애非有愛(vibhava-taṅhā)에 집착한 결과의 죽음으로 보는 것 같다.

 

사진 2. 세계 자살 예방의 날 포스터.

 

여기서 비유애는 현재의 생명을 끊으려는 또 다른 삿된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가 왁깔리, 앗사지, 고디까 및 찬나 비구의 자살을 나무라지 않은 것은 그 비구들이 모두 아라한과를 얻은 다음, 깨달음의 경지에서 충분히 자율적 판단을 한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주2)

 

한편, 붓다가 설한 부정관의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수행자들의 집단자살과 사악한 무리의 꾐에 빠져 죽음을 선택한 재가 신자의 경우가 있다. 이는 또 다른 쾌락을 얻기 위한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힌 경우의 자살로 불살생계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했다. 이쯤에서 우리는 비구들의 자살 사례를 한 번 더 꼼꼼하게 읽어 볼 필요가 있겠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경전의 어느 구석에서도 붓다가 자살을 직접 권유하거나 유도하고 있지 않다는 정황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데미언 키온과 같은 불교 윤리학자는 바로 이런 지점을 콕 집어 상기시킨다. 

 

그에 따르면 붓다는 비구들의 자살을 적극적으로 ‘용인(condonation)’한 것이 아니라 단지 소극적으로 ‘면책(exoneration)’해 준 것에 불과했다. 영어권에서 면책과 용인은 엄연히 다른 뉘앙스를 가진 단어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면책은 죄의 부담을 (간접적으로) 덜어주는 것인 반면, 용인은 수행한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승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붓다의 반응은 노쇠한 비구들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자 공감이었을 뿐(면책) 그들의 행동을 교학적으로 추인한 것은(용인) 아니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재밌는 것은 키온이 붓다의 처신을 예수가 간음한 여자에 대해 보인 반응과 대비시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가 “나는 그대를 비난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간음을 승인해서가 아니라 죄를 지은 불쌍한 여인을 향해 그야말로 동정심을 베풀어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붓다가 자살한 아라한 비구들을 위로한 것은 자살 자체를 옹호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던 늙은 비구들의 마지막 요청을 자비심으로 감싸 안은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인식을 견지하고 있는 키온이 “불교는 죽음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높이 평가한다.”고 갈파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주3)

 

자살, 불살생계의 예외가 될 수 없다

 

자살 사례를 대했던 붓다의 태도가 함축하고 있는 현대적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것은 곧 불교가 활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자살 예방과 같은 대사회적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원은 붓다의 말씀, 출가자들의 수행 경험, 불교 관련 단체들의 활동, 일선 행정기관의 협조 등을 모두 망라하는 개념이다. 몇몇 비구들의 예외적 자살 사례는 특별한 경우 자살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에서도 붓다는 전혀 자살을 용인할 의도가 없었다는 점을, 반어법적으로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사진 3. 정부의 종교편향 정책에 항거하며 소신공양을 단행한 베트남의 틱쾅둑 스님.

 

우리는 종교윤리가 기본적으로 생명윤리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서구 종교학자들의 지적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사람일수록 자살과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할 확률이 낮아진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불자들이 지금까지의 신행 생활을 성찰적으로 뒤돌아볼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교가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검토, 고려하는 가운데 자살에 대한 확고한 반대 입장과 함께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효율적인 실천방안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어야 할 때라고 본다.

 

덧붙여서 사족 한마디를 더 보태 본다. 자기 손으로 자신의 생명을 잔인하게 중단시키는 반인륜적 파계 행위인 자살은 어떤 경우에도 미화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 아름다운 자살도 없고, 위대한 자살도 없다. 기껏해야 이 세상에 고통 하나를 더 추가하고 가는 것에 불과하다. 자살은 말 그대로 자살일 뿐이다. 하물며 불살생계를 엄격하게 준수해야 할 출·재가자들에게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 정부의 불교 탄압에 맞선 티베트 승려들의 분신자살이나 1963년 베트남에서 응오딘지엠 대통령의 가톨릭 편향적 종교정책에 항거하여 대로변에서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틱쾅둑 스님의 사례는 지극히 예외적인 자살에 속한다. 그들의 죽음을 가리켜 ‘소신공양’이라고 칭송하는 데는 그만한 시대적 대의명분이 있었다는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자살에 대한 붓다의 인식은 불살생계의 정신에 오롯이 그대로 담겨 있음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각주>

(주1) D. Lizardi, R. E. Gearing. “Religion and Suicide: Buddhism, Native American and African Religions, Atheism, and Agnosticism”, Journal of Religion and Health(2010), pp.377-379.

(주2) 안양규, “누가 허물없이 자살할 수 있는가”, 『불교평론』 17호(2003), pp.125-134.

(주3) Damien Keown, “Buddhism and Suicide: The Case of Channa”, Journal of Buddhist Ethics, vol.3(1996), pp.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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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동국대 국민윤리학과 졸업(문학박사). 영국 더럼 대학교 철학과 방문학자 및 동국대 문과대 윤리문화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있다. 역저서로는 『불교윤리학 입문』, 『자비결과
주의』, 『불교의 시각에서 본 AI와 로봇 윤리』 등이 있고, 공리주의와 불교윤리의 접점을 모색하는 다수의 논문이 있다.
hnk@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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