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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동방대보살 낭혜무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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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  2024 년 4 월 [통권 제132호]  /     /  작성일24-04-05 10:12  /   조회22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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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 이야기 4 | 남종선 전래와 나말여초 구산선문의 형성 ② 

 

구산선문을 대표하는 선사로 도의道義와 홍척洪陟을 떠올리겠지만 신라 땅에 남종선을 확고하게 정착시킨 선사는 성주산문의 개산조 낭혜무염朗慧無染(801~888)과 사굴산문의 개산조 범일梵日(810~889)이다. 무염과 범일은 당 무종의 회창법난으로 인하여 끊어질 위기에 처한 조사선의 선법을 신라 땅에 들여와 찬란히 꽃피웠다. 특히 경문왕과 헌강왕 두 왕의 국사를 지냈던 무염은 중국인들로부터 ‘동방대보살’로 추앙받았고, 귀국하여 산문을 열자 문성왕(재위 839~857)은 그가 머무는 절을 ‘성주사聖住寺’라 이름하였다. 이는 마치 중국인들이 혜능의 법설을 ‘단경壇經’이라 이름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출가와 입당구법의 서원

 

무염의 비문은 최치원이 찬한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이외에도 김입지金立之가 찬한 「성주사비」와 헌강왕이 직접 찬술한 「심원사비」가 있다. 김입지의 비문은 약간만 남아 있고, 헌강왕의 비문은 전하지 않는다. 또 『조당집』 17권 「숭엄산 성주사 고 양조국사」 조에 무염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무염은 속성은 김씨이고 태종무열왕의 8대 손으로 할아버지 때까지 진골이었지만 아버지 김범청金範淸은 득난 즉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 어머니는 화씨華氏로 긴 팔을 지닌 호법천인이 연꽃을 내려주는 꿈을 꾸고서 무염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9세 때에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눈으로 한 번 본 것은 모두 암기하여 사람들이 해동의 신동으로 칭송하였다.

 

사진 1. 낭혜무념국사 진영, 창원 성주사 소장.

 

12세에 강원도 양양군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로 출가하여 법성法性의 제자가 되었다. 오색석사는 도의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이때는 도의가 귀국하기 이전이어서 도의와 관련짓는 것은 무리이다. 수년간 스승으로 모신 법성은 일찍이 당에 들어가 능가의 선법(혹은 소승불교)을 배워왔는데, 무염의 재주를 아껴 당나라 유학을 권한다. 이후 무염은 스승 법성을 떠나 부석사에 가서 석징石澄(혹은 석등石登)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821년에 배를 타고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배는 풍랑을 만나 흑산도로 되돌아 옴으로 말미암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부석사는 화엄의 중심 도량이었을 뿐만 아니라 의상의 스승인 지엄이 주석한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동리산문의 혜철, 희양산문의 도헌, 사자산문의 절중 등이 부석사를 거쳐 입당하였다. 822년 무염은 드디어 당 목종에게 조공을 바치러 가는 김흔金昕의 배를 타고서 당은포를 출발하여 산동의 지부산에 도착한다.

 

마곡으로부터 인가

 

무염이 당나라에 머문 기간은 무려 23년이다. 당시 중국의 불교계는 마조와 석두의 제자들에 의해 혜능의 남종선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갔던 무염은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화엄에서 선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지상사를 떠난 무염은 광활한 대륙을 누비며 선사들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무염이 마조 제자인 불광사 여만如滿을 찾아 도를 물었을 때, 여만은 부끄러운 낯빛을 띠며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이 신라인과 같은 이는 드물다. 뒷날 중국이 선禪을 잃는다면 장차 동이(신라)에 가서 묻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뒤 무염은 다시 마조의 제자인 마곡산麻谷山 보철寶徹을 찾아가서 인가를 받았다. 최치원은 마곡이 무염에게 인가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진 2. 종남산 지상사.

 

“보철화상이 대사(무염)의 고생스러운 수행을 갸륵하게 여기고 일찍이 어느 날 대사에게 이르기를, 「옛날 나의 스승 마조화상께서 나와 헤어질 때 말씀하시기를, 봄꽃이 번성하면 가을 열매가 적은 것인데 이는 보리수에 오르려는 자들이 슬퍼하고 탄식하는 바이다. 이제 너에게 심인心印을 주니, 훗날 제자 가운데 뛰어난 공로가 있어 봉封할 만한 자를 봉하여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셨다.

 

또 「대법大法이 동으로 흐른다는 말은 대개 예언에서 나왔으므로, 즉 해 뜨는 곳인 신라 선남자들의 근기가 거의 무르익은 듯하니 네가 만약 동방 사람으로 가히 눈으로 말할 만한 자를 얻으면 잘 지도하라. 지혜의 물이 바다 건너 구석진 곳에까지 크게 뒤덮도록 한다면 덕이 얕지 않을 것이다.」라고 당부하였다. 스승의 말씀이 귀에 쟁쟁한데 네가 왔으니 기쁘구나. 이제 인가하여 너로 하여금 신라에서 선사로 으뜸가게 할 것이니 가서 삼가 실행하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지금 강서 마조의 수제자이고 훗날에는 해동의 할아버지가 될 것이니 스승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으리라.”(주1)

 

사진 3.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 탑비.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마곡에서 무염으로 이어지는 선법은 단순한 인가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선법이 신라 땅에서 꽃을 피울 것이라’고 혜능과 마조가 예견하였는데, 그 예견이 무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곡의 열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 무종의 회창법난이 일어났으니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조당집』 17권에는 마곡의 법을 이은 이로 무염의 이름만이 수록되어있다. 또 『전등록』 9권에는 마곡의 법을 이은 이로 수주壽州의 양수良遂만이 보이고 있어서 마곡에게 있어 무염이 수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마곡이 열반에 들자 무염은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고독한 사람, 병고를 겪고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폈다. 20여 년 동안 이와 같은 보살행을 실천하자 그의 이름이 중국 전역에 퍼졌고, 사람들은 그를 ‘동방대보살’이라고 추앙하였다.

 

성주산문의 개산과 교화

 

무염은 845년(회창 5, 문성왕 7년)에 당 무종의 명에 의하여 신라에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 인연이 있었던 김흔이 조상이 봉지로 받은 보령의 오합사烏合寺에 와서 머물기를 청한다. 김흔은 태종무열왕의 9세손으로 김양金陽과 동일 인물로 소개된 곳이 더러 있지만, 김양의 사촌형이다. 김양의 자가 위흔魏昕여서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민애왕 당시 김우징(신무왕)의 군대를 김양이 지휘할 때 김흔은 이에 맞서 싸우다가 실패하여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당나라에서 무종이 죽고 선종이 즉위한 847년에 무염은 성주산문을 개산한다. 문성왕은 오합사의 이름을 ‘성주사聖住寺’로 바꾸고 대흥륜사에 예속시켰다. 이후 성주산문은 이름을 꼽을 만한 제자가 2천 명에 이르렀고, 따로 자리를 잡아 도량을 연 제자로 승량僧亮·보신普愼·순예詢乂·심광心光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무염은 성주사를 본산으로 삼아 42년을 교화하였는데, 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 등 여섯 왕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법을 물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였다. 

 

사진 4. 광활한 성주사지.

 

헌강왕이 몸이 아파 사신을 파견하여 궁중으로 모시고자 하였을 때 무염은 “산승의 발이 대궐에 닿는 것이 한 번만 되어도 지나치다 할 것인데, 나를 아는 자는 ‘성주’를 ‘무주無住라’ 하고, 나를 모르는 자는 ‘무염’을 ‘유염有染’이라고 할 것이다.” 하면서 사양하였다. 이처럼 무염은 성격이 공손하고 자애로웠으며 손님을 대할 때에는 귀천을 가리지 않았고, 언제나 다른 승려들과 함께 똑같이 거친 밥을 먹었다. 절에 큰 불사가 있을 때에는 앞장서서 일을 하였고, 평소에도 물을 긷고 나무를 하였다. 또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는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몸이 마음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여 실천을 강조하였다.

 

‘무설토론無舌土論’의 문제

 

1293년(충렬왕 19)에 천책天頙이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는 무염의 ‘무설토론無舌土論’이 수록되어 있다. ‘선교대변문禪敎對辨門·제강귀복문諸講歸伏門·군신숭신문君臣崇信門’ 등 3장으로 구성된 『선문보장록』 가운데 무설토론은 범일의 ‘진귀조사설’과 함께 ‘선교대변문’에 실려 있다. 천책은 무염의 무설토론의 출처를 『해동무염국사무설토론』이라 밝히고 있고 또 『조당집』 ‘숭엄사 성주사 고 양조국사’조에서도 ‘무설토’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무염이 무설토론을 주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최치원의 비문에는 ‘무설토론’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무염이 과연 무설토론을 주장하였는가?’ 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진 5. 고려 천책의 『선문보장록』,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치원은 낭혜의 비문에서 “어떤 이는 교와 선이 같지 않다고 하나, 나는 그러한 종지를 보지 못하였다. 말은 본래 많은 것이라 내가 알 바 아니다. 대략 같다고 해도 허락할 만한 것이 아니요, 다르다 해도 그른 것이 아니다. 고요히 앉아 참선하고 교묘하고 삿된 마음을 버리는 것이 성인에 가까운 것이다.”(주2)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천책이 『선문보장록』에서 선은 무설토에, 교는 유설토에 배대하고서 선이 교보다 우수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과는 분명 그 결이 다르다.

『조당집』에는 무설토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무염)선사에게 질문하였다. 「무설토에는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는데, 어찌 서천의 28조에서 당대 6조에 이르기까지 법의 등불이 전하여 지금까지 법등이 끊이지 않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세상에 유포된 모든 것은 올바른 전법은 아닌 것이다.」 또 질문하였다. 「한 조사에게 무설토와 유설토의 두 가지가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그렇다. 그러므로 앙산이 말하기를 ‘두 입에서 한결같이 무설이니 이것이 곧 나의 종지이다[兩口一無舌 卽是吾宗旨].’라고 한 것이다.」 또 물었다. 「한 조사에게 두 가지 국토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선법을 올바로 전하는 근기[正傳禪根]는 법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스승 또한 가르칠 필요가 없으니 무설토인 것이다. 실지에 응하여 법을 구하는 사람은 이름과 말을 빌려서 설명하기 때문에 유설토라 하는 것이다.」”(주3)

 

앙산은 위산의 제자로 위앙종을 창시한 인물이다. 사제 향엄지한과의 선문답을 통하여 조사선과 여래선을 구별하여 ‘조사선’을 확고하게 정착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한 앙산의 말은 『앙산어록』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사진 6. 앙산혜적 선사.

 

“앙산이 장차 입적하려 할 때 여러 제자들이 시립侍立하고 서 있자 앙산은 게송을 지어 그들에게 보였다. 「여러 제자들은 두 눈으로 다시 잘 보아라. 두 입에서 한결같이 무설이니, 이것이 곧 나의 종지이다.」라고 하였다.”(주4)

 

무염과 앙산은 동시대를 살다 갔다. 『앙산어록』에 수록된 말을 무염이 보았을 리 없다. 더군다나 『선문보장록』에 수록된 ‘무설토론’의 내용은 선과 교의 차별을 논하고 있어서 마조의 선사상이나 조사선의 도리와도 어긋난다. 그러기에 성본스님은 “『선문보장록』의 무설토론은 무염의 선사상을 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말여초의 선교의 대립적인 시대에 전통적인 교학불교에 대한 선불교의 우월한 입장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무염국사의 유명한 무설토론과 그의 권위를 빌린 선종의 교판적 견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주5)라고 밝히고 있다.

 

성주산문의 쇠퇴 

 

최치원의 비문만이 홀로 남아 있는 성주사지는 그 찬란한 모습을 감춘 채 고요 속에 잠들어 있다. 신라 땅에 남종선을 본격적으로 정착시킨 성주산문의 전통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무염의 생활 태도는 중국 선종의 ‘청규’를 바탕으로 한 교단 정비와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건강한 노동관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성주산문의 흥망성쇠는 무염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신라 왕실과의 관련성이 짙다. ‘동방대보살’로 추앙받았던 무염의 소박하고 건전한 실천행을 가지고 선문을 유지하는 정신적 바탕으로 삼아 ‘청규’ 같은 규범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채 정치세력의 후원에 의존하여 사세를 유지하려 했던 점이 결국 쇠망의 길로 이끈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각주>

(주1) 최치원 찬, 『대낭혜화상 백월보광지탑비명』

(주2) 최치원 찬, 『대낭혜화상 백월보광지탑비명』.

(주3) 『조당집』 권17, ‘숭엄사 성주사 고 양조국사조’.

(주4) 『앙산어록』, 『卍속장경』 권 119.

(주5) 정성본, 『나말선종의 연구』, 민족사, 1995,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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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전북대 철학과 학부, 석사 졸업, 원광대 박사 졸업. 중국 북경대, 절강대, 연변대 방문학자. 한국선학회장과 보조사상연구원장 역임. 『보조지눌의 사상과 영향』, 『언어, 진실을 전달하는가 왜곡하는가』(공저)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brkim1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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