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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고운사의 창건 연기와 사세의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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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4 년 4 월 [통권 제132호]  /     /  작성일24-04-05 10:29  /   조회22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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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42 | 등운산 고운사 ①

 

가을날 고운사孤雲寺를 찾아가는 길은 황홀하다. 고즈넉한 산사로 가는 발걸음은 번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을 잊게 할 만큼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고운사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있다.  

 

외로운 구름 따라가는 황홀한 길

 

79번 국도로 가다가 고운사길로 접어들면 안망천을 따라 적벽赤壁이 나타나고, 구계2교 부근에서 다시 계류와 함께 달리는 높은 암산의 절벽을 만난다. 겨울에는 수직의 빙벽이 연출되곤 하는데, 절을 찾아가는 이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정념을 끊어 버리게 할 만큼 차갑고 냉정하다. 

 

사진 1. 안망천 적벽.

 

하천이 흐르는 옆으로 큰 바위 절벽이 있으면, 예부터 이런 곳에는 학자가 나올 만한 땅이라고 했다. 암벽은 벼루를 의미하고 절벽 아래에 흐르는 계류溪流는 먹을 가는 물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지역에도 뛰어난 문장가가 나왔던지 아니면 많은 저술들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일연一然(1206〜1289) 화상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집필한 군위의 인각사麟角寺 앞으로 흐르는 계류와 그에 접하여 높이 서 있는 적벽의 풍광도 하늘에 닿는 큰 벼루와 마르지 않는 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박문강지博聞强知한 유학자 노우魯宇 정충필鄭忠弼(1725〜1789) 선생도 어느 날 깊은 골짜기를 따라 난 길로 말을 몰아 인각사를 찾아들었을 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유학을 중심에 놓았지만 진리를 찾아가는 모습은 같은 이치이기에 불가의 서책을 접하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는 오의奧義도 잘 나타나 있다.

 

사진 2. 구계2교 석벽.

 

불관준위령 不慣遵危嶺

금인선승등 今因選勝登

풍계홍곡곡 楓溪紅曲曲

태벽녹층층 苔壁綠層層

협단영빈점 峽斷迎賓店

사여배불승 寺餘拜佛僧

신마수기숙 信馬愁羈宿

임간하처등 林間何處燈

 

깎아지른 고개 오르는 일은 익숙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절경 찾아 올라보았네.

단풍으로 물든 계곡은 골골이 붉게 타들어가고

이끼 낀 절벽은 겹겹으로 푸르네.

산골에 손님 맞는 주막은 보이지 않고

절간에는 부처님께 예불 올리는 스님만 남아있네.

말 가는 대로 가면서 잠잘 곳 걱정하노니

산속 그 어디에서 등불을 찾을 수 있을까.

 

사진 3. 인각사 앞 적벽.

 

늦은 가을날 고운사길을 따라 줄지어 선 은행나무 가로수의 노란 잎들이 인도를 덮는 시간에는 실로 황금카펫을 밟고 걸어가는 것 같아 황홀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가을 단풍 시즌에는 이 황금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거나 산보散步를 즐기는 이들이 많다. 행복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황금길을 텅 빈 마음으로 걸으며 그간 잊고 지낸 자신의 참모습을 확인하는 그 자리인지도 모른다.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그 모습 말이다.

 

고운사의 창건 연기

 

고운사는 신라시대인 문무왕文武王(재위 661〜681) 16년(676)에 의상義湘(625〜702) 대사가 교지를 받들어 옛 소문국召文國(=조문국, 후에 상주尙州의 문소군聞韶郡으로 개정, 현재 의성군 금성면 지역)의 북쪽에 봉우리와 골짜기가 모두 빼어난 등운산의 아름다운 자리를 찾아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 원년(681)에 절을 창건하고 고운사高雲寺라고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후 9세기 후반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 선생이 이곳으로 와 소요하며 우화루羽化樓와 가허루駕虛樓를 건립하면서 절의 이름도 선생의 자字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 때 도선道詵 화상이 약사여래석불과 석탑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자료는 찾기 어렵고, 늘 그러하듯 도선화상의 이야기는 황당할 따름이다. 

 

사진 4. 소문국 고분군.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의 <최치원崔致遠>편에는 고운 선생이 실의하여 관직을 버리고 전국을 방랑하던 시절에 경주의 남산, 강주剛州(지금의 경북 영주·의성 지역)의 빙산氷山(지금의 의성 빙계리), 합주陜州(지금의 합천)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 합포현合浦縣(지금의 마산 일대)의 별장 등을 주유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오늘날 의성의 빙산과 빙계동氷溪洞 일대에서 노닌 이야기가 고운사에 누각을 짓고 절의 이름도 ‘고운高雲’에서 ‘고운孤雲’으로 바뀐 것으로까지 나아갔거나 빙산 일대를 다닐 때 그 주변의 사찰이나 자연 속에서 소요했을 수도 있으니 그 시절 고운 선생이 지금의 고운사에 와서 머물렀을 가능성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유불도 삼교회통의 사유

 

누각의 이름을 우화루羽化樓와 가허루駕虛樓 등으로 지은 것을 보면 유불도儒佛道 삼교회통三敎會通의 사유 속에서 명명된 것 같기도 하다.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우화’나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는 ‘가허’라는 말은 도가적 개념이지만, 유불도 회통의 사상 속에서는 불교의 공간이더라도 세상 밖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이렇게 붙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온 후에는 황노黃老사상을 바탕으로 변형되었고, 중국 사상에서 유불도의 삼교는 간혹 서로 배척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삼교회통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최치원 선생의 사상도 삼교회통의 사유체계가 근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아무튼 이런 것도 고운 선생과 고운사와의 연관이 사실이어야 더 이야기할 수 있기에 이 정도만 생각해 본다.

 

사진 5. 빙계계곡의 빙계동

 

그건 그렇다 치고, 보현산普賢山 줄기 아래에 있는 빙산에는 옛날에 빙산사氷山寺라는 절이 있었다. 원래는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이 승니僧尼들을 위하여 창건한 영니사盈尼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고려 예종睿宗 15년(1119)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정극영鄭克永(1067〜1127)과 이지미李之美 등이 구해 온 붓다의 어금니를 왕실에서는 함에 넣어 소중하게 모셨는데,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는 혼란기에 심감心鑑 화상이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피해 이 함을 구해 나온 공로로 유명사찰인 빙산사에 주석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말에도 빙산사는 대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8〜1392) 선생이 빙산사 주지에게 지어 보낸 <기빙산주지寄氷山住持> 시도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407년(태종 7)에 국가와 고을의 안녕과 복을 기원해 온 전국의 대표적 고찰 88사를 자복사資福寺로 지정할 때 그에 포함되어 토지 20결, 노비 10인, 상주하는 승려 10인을 두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도 빙산사라고 불렸다. 자복사는 조선왕조의 출범 이후 태종 때인 1406년에 전국 사찰의 토지와 노비,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11개 종파 242개의 사찰만 허용하자 이에 불만이 생겨나 추가로 88개 사찰을 선정하여 국가 인정 사찰로 해준 것이다. 이를 보면 조선 초기에는 빙산사가 고운사보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대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6. 빙산사지와 오층모전석탑.

 

암괴들로 너덜지대를 이루고 있는 빙산 기슭에는 풍혈과 빙혈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데, 빙산사는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 권응수權應繡(1546〜1608)의 군대에 쫓긴 왜군이 상주로 퇴각하며 저지른 방화로 소실되었고, 그 터에는 천제天帝에게 제사를 지내는 태일전太一殿과 빙계서원氷溪書院이 들어섰다가 그 후에 없어졌다. 지금은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5층의 모전석탑模塼石塔만 옛 터를 지키고 있다. 

 

이런저런 사정을 보면, 빙산 지역에 있었던 이런 사찰에 최치원 선생의 발걸음이 닿았을 것 같기도 한데, 고운 선생이 영니사(빙산사)에 왔는지 고운사에 왔는지 아니면 둘 다에 왔는지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태조太祖(재위 918〜943) 31년(948)에 운주雲住 화상과 조통照通 화상이 절을 중창하였고, 1018년(현종 9)에 주지인 송천우宋天祐 화상이 대웅전大雄殿, 약사전, 극락전極樂殿, 적묵당寂默堂, 설선당說禪堂, 동별실東別室, 서별실西別室, 관음전, 금당金堂, 백련당白蓮堂, 회운당會雲堂, 청풍당淸風堂, 문수전文殊殿, 양로당養老堂, 백련암白蓮庵 등을 중창하였다. 극락전에는 관음상을 모셨는데, 이는 천해天海 화상이 꿈에 본 것과 똑같이 생긴 관음상을 송도 대흥산大興山 바위 꼭대기에서 발견하여 고운사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사진 7. 소영화상 부도.

 

조선시대에 들어와 1482년(성종 13)에는 안동 갈라산葛羅山 낙타사駱駝寺의 석가여래불상을 가져와 대웅전에 봉안하였고, 1646년(인조 24)에는 주지를 맡아 고운사의 사세를 일으킨 소영昭影 화상의 사리탑이 건립되었다. 

이러한 것은 1729년(영조 5)에 평해군수인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1681〜1752) 선생이 비문을 지은 「고운사사적비孤雲寺事蹟碑」와 1918년에 기록된 「등운산고운사사적騰雲山孤雲寺事蹟」과 그 해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오치승吳致昇과 조해수趙海壽가 세운 「등운산고운사사적비騰雲山孤雲寺事蹟碑」에 나오는 내용이다. 신유한 선생의 「고운사사적비」의 내용은 선생이 고증한 것이 아니라 사적을 적어온 주지 정월회한淨月會閑 화상의 부탁을 받고 그에 의존하여 지은 것이다. 여기에는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없는 것이 주목된다. 

 

구름 운자가 들어간 네 개의 사찰

 

신유한의 「고운사사적비」에는 그 당시 문소현에는 ‘운雲’자가 들어간 네 곳의 사찰, 즉 서쪽의 운람사雲嵐寺, 북쪽의 고운사孤雲寺, 서북쪽의 주운사住雲寺, 남쪽의 운곡사雲谷寺가 영남에서 빼어났는데, 그 가운데 고운사가 제일이라고 했다. 동시에 고운사에는 조선 현종顯宗(재위 1659〜1674) 시기에 극성克成 화상이 지은 가허루駕虛樓가 골짜기를 가로질러 공중에 지어져 있다고 한 것을 볼 때, 현재의 가운루駕雲樓를 그때에는 가허루라고 부른 것 같다.

 

그런데 1887년에 김시오金始五가 기록한 「고운사중수기孤雲寺重修記」에는 등운산에 신라 때 창건된 유명 사찰인 고운사가 있는데, 중간에 흥하고 폐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여 그 사정을 알 수 없다고 하였고, 당시 남아 있는 당우로는 모니전牟尼殿, 금당, 극락전, 승당, 동실, 팔상전, 명부전, 노전爐殿, 수령들과 70세 넘은 호장인 안일반安逸班의 기록을 봉안한 누각과 조사들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影閣이 있으며, 일주문, 천왕각, 우화루羽化樓가 아름다운 자태를 하고 있고, 무지개가 하늘을 가로질러 있듯이 계곡을 가로질러 양안에 걸쳐 있는 수광루水光樓가 있으며, 계곡을 중심으로 양편으로 백련암白蓮庵과 운수암雲水庵이 있고, 무너진 지 오래된 금당과 승당을 이번에 승려들과 신도들이 힘을 모아 고쳐지었다고 되어 있다. 그때에는 현재의 가운루를 수광루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현재의 가운루의 이름은 가허루 → 수광루 → 가운루로 변경된 것으로 추론된다.

 

신유한 선생은 「고운사사적비」의 비문을 짓기 그 이전인 1728년에 정월화상의 부탁을 받고 그해 중건한 운수암의 「운수암기雲水庵記」도 지었는데, 문소현聞韶縣 북쪽으로 40리 되는 곳에 등운산의 모습이 워낙 빼어나 절을 세웠다고 하고, 그 절 서남쪽에 있는 운수암의 풍광은 고운사보다 더 빼어나다고 했다. 그 후 이 운수암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강원을 지어 승려들의 공부 공간으로 사용하다가 근래에 신축한 화엄승가대학원이 터를 잡고 있다.

 

사진 8. 등운산고운사사적비.

 

아무튼 고운사에 관한 기록은 중종中宗(재위 1506〜1544) 때에 저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보이지 않고, 영조英祖(재위 1724〜1776)대인 1757년에서 1765년 기간에 출간된 전국 읍지를 종합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고운사는 임진왜란 이후 현종대인 1668년에 이르러 가허루駕虛樓와 봉황문鳳凰門, 천왕전天王殿이 지어지고, 1670년에 시왕전十王殿 등의 당우들이 세워지면서 사세가 살아나기 시작하였고, 현재의 가람배치의 기본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이 당시 고운사의 중창불사는 승려들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민간인이나 관의 참여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肅宗(재위 1674〜1720) 대인 1695년에 아미타불상과 대세지보살상을 조성한 일도 도청道淸 화상과 선조禪照화상이 자신의 재산을 희사하여 된 것이고, 대웅전의 중수도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724년(영조 원년)에 승려들이 모연募緣에 나서서 여러 당우들을 지었고, 1728년에 운수암雲水庵이 중건되었다. 숙종 이후에는 승려들이 개인적으로 전답을 소유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 절에 시주하였고, 법손에게 물려주기도 했다. 그 후 운수암은 승려들의 공부 공간이 되었고, 백련암은 염불수행의 공간이 되었는데, 운수암은 그 후 화재로 소실되고 함홍대사에 와서 다시 중건했다. 백련암이나 운수암에는 함홍대사가 지은 시판이 걸려 있었다. 지금은 신축한 식당 건물의 현판에만 백련암의 이름이 어색하게 남아 있다.

 

이러다가 고운사에 관이 적극 참여하여 당우를 짓는 일은 1744년(영조 20) 영조英祖(재위 1724〜1776)의 어첩御帖을 고운사에 봉안하고 기로소耆老所 봉안각奉安閣을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순조純祖(재위 1800〜1834) 대인 1803년에 적묵당과 서별실이 화재로 소실되자 의성 현령의 지원과 국가로부터 받은 공명첩空名帖으로 마련한 재원으로 중건하였고, 1835년(헌종 원년) 초에 화재로 불타 버린 대웅전과 관음전 등 여러 전각들의 중수도 현령이 주관하였다. 이 해 말에 운수암은 또 불타 버렸다. 고운사 당우들의 중건에 관이 적극 나선 것은 영조의 어첩과 기로소 봉안각이 들어선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1830년대에 엄격히 금지되었던 사찰에의 전답 기부행위가 이루어진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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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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