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와 사상]
퀘이커교의 창시자 조지 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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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5 년 5 월 [통권 제145호] / / 작성일25-05-04 23:15 / 조회87회 / 댓글0건본문
심층 종교의 길을 밝혀준 사람들 5
서양 종교 전통 중에서 선불교에 가장 가까운 종교를 하나 꼽는다면 많은 사람이 주저하지 않고 퀘이커교Quakers를 지목할 것입니다. 속칭 퀘이커교는 본래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로서 한국에서는 ‘종교 친우회’ 혹은 ‘친우회’라 칭합니다. 퀘이커(친우회)에서는 내 속에 ‘신의 일부’가 내재해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내 속에 있는 신을 직접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 수 있다고 믿고 이런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힘씁니다.
침묵 예배
퀘이커 내에도 일반 교회와 비슷한 예배형식으로 예배하는 ‘프로그램으로 하는 예배(programmed worship)’가 있기는 하지만 퀘이커 예배의 주종을 이루는 ‘프로그램 없는 예배(unprogrammed worship)’는 기본적으로 침묵 예배로서 ‘친우들(Friends)’이 한자리에 모여 한 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 내 속에 빛으로 계신 신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보냅니다. 그러다가 누구든지 내면의 빛이 비쳤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그 빛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하여 짧게 몇 마디씩 발언을 합니다.

그러기에 이들에게는 직업적인 목사(minister)가 없고 모두가 모두에게 ‘봉사’하는 ‘봉사자(ministers)’만 있을 뿐입니다. 십일조 등 전통적인 예배 의식을 배격하고 특정한 교리에 구애됨이 없이 오로지 신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깁니다.
퀘이커 교도들의 깊은 영성과 이런 영성을 통한 열성적인 사회봉사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의 종교학 대가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그의 유명한 책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일반 개신교에서도 퀘이커교에서 실행하는 이런 침묵의 예배가 널리 채택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또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와 영국 퀘이커 봉사위원회는 194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내가 만일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나는 퀘이커 교도가 되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퀘이커 운동은 미국 역사 초창기에 독립운동, 흑인 해방운동, 평화운동, 여성운동 등에도 지극히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주는 그 별명 ‘퀘이커 스테이트(Quaker State)’가 말하는 것처럼 퀘이커 지도자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이 1681년 영국 왕 찰스 2세로부터 얻은 땅에 평화와 관용이라는 퀘이커 이상을 실험하기 위해 세운 주입니다.

그 주에 있는 가장 큰 도시 필라델피아(Philadelphia)는 ‘형제 우애’라는 뜻으로, 시청 꼭대기에는 윌리엄 펜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2017년 기준으로 전 세계 교인이 37만 7천 정도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평화운동이나 사회개혁 운동에서의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종교사상가 함석헌(1901~1989년) 선생님이 퀘이커 지도자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필자도 1975년 이후 지금까지 부정기적이나마 캐나다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고 그들의 활동에 이런저런 형태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조지 폭스
퀘이커교를 창시한 사람은 영국인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입니다. 마침 한국 친우회 홈페이지에 폭스에 관해 자세한 글이 올라와 있기에 이를 간추려 봅니다.
17세기 영국 사회는 그야말로 격랑의 시기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공화정에서 다시 왕정으로 뒤바뀌는 정치적 격변은 물론 지금까지 내려오던 가톨릭과 종교개혁으로 새로 등장한 개신교 간의 갈등으로 사람들은 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가톨릭이나 개신교 어느 파에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구도자(Seekers)’라 불렀는데, 그들은 주로 신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새로운 안목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조지 폭스도 이런 ‘구도자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사람들 중 일부를 모아 일종의 신앙운동을 전개하고 이것이 오늘날 퀘이커라 불리는 종교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조지 폭스는 영국 중부의 지금 페니 드레이튼이라는 곳에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불리던 방직공紡織工 아버지와 뛰어난 교양을 지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지 폭스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공식 교육을 얼마나 받았는지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나이에 비해 신앙심이 깊고, 생각하기를 좋아했으며, 침착하고 분별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또한 사려가 깊어 그가 어떤 사실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면 모두들 깜짝 놀랐는데, 특히 영적인 일들에 관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십대 시절, 폭스는 신부神父가 될 것을 바라는 친척들의 희망을 뒤로 한 채 어느 구두 제조업자 밑에서 일하며 양털 장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직할 정도로 정직하고 성실해서, 물건을 속여 팔던 시대에 사람들은 그의 성실과 정직성을 비웃었지만, 결국은 그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업도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사업에서 손을 떼고 신앙 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는 가난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피디아.
윌리엄 펜에 의하면 폭스는 양 치는 일을 아주 좋아해서 양 치는 솜씨가 훌륭했는데, 양 치는 일은 깨끗하고 고독했던 폭스의 성격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일로서 후에 신의 종으로 사역하고 봉사하는 일의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1644년 20세가 되던 해에 그는 심각한 고뇌에 휩싸였습니다. 친척들이나 여러 목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위로와 해결을 구해보았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사는가, 그들이 가진 신앙의 실상이 어떤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폭스는 번민과 좌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그를 두고 친척들은 결혼을 시키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정치에 입문하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영적 진리에 민감한 젊은이에게는 그러한 제안이 슬프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이즈음의 심경을 자신의 일기(Journal)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몸은 그야말로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으로 메말라 있었고, 그러한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벙어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게 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았다.
내면의 빛
고뇌하던 폭스는 하나둘 깨달음을 얻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일이 “주께서 내 마음을 여시어 된 일”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그에게 열어 보이신 깨달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개신교도이건 가톨릭교도이건 모두가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신의 자녀로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들이어야 한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자격을 온전히 갖추는 것은 아니다.”, “신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신다.”, “여자들은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남녀는 평등하다.” 등등이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들이 있긴 했지만 폭스의 고뇌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이 ‘아브라함의 가슴 속에 있었노라’고 생각할 정도로 큰 기쁨을 맛보면서도, 번민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번민을 씻기 위해서 ‘열림’의 경험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만났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도달한 결론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의에 빠져 있던 바로 그때, 그에게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 분,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분만이 네 처지를 말해 줄 수 있다.”
폭스는 이 음성에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이 음성은 영적 문제로 고민하고 진리를 고대하던 그에게 이전의 다른 어떤 깨달음보다도 더욱 크고 뚜렷한 것이었습니다. 폭스가 들었던 그 음성이 후에 ‘내면의 빛’이라 불리게 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빛은 또한 ‘속에 계신 그리스도’, ‘각 사람 안에 있는 신의 그것’, ‘신의 능력’, ‘신의 증거’ 등으로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 빛은 모든 사람에게 있고, 또 그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음성은 이후 폭스 자신의 생애와 퀘이커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의 무한한 사랑과 위대함을 깨닫고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러한 모든 체험들을 계기로 그는 자신이 ‘마치 새로이 만들어져 바뀐 것처럼 용모와 사람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변화된 폭스에게 이제 세상은 온통 거두어들여야 할 신의 씨앗들이 널려 있는 곳으로 보였습니다.
우리는 종교의 심층에 접하므로 변화된 한 영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조지 폭스의 경우에서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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