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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책의 향기]
역경譯經, 동아시아 불교의 모태母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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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조병활)  /  2018 년 9 월 [통권 제6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13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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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 시대(304∼439)의 한 시기를 장악했던 전진前秦(350∼394)의 황제 부견(符堅. 338∼357∼385)(주1)이 376년 감숙성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전량前涼(314∼376)을 멸망시켰다. 세력이 점차 서역 일대(지금의 신강성)까지 미쳤다. 서역에서 장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과 서역 너머로 구법행求法行에 나서려는 사람들의 왕래가 한층 자유로워 졌다. 장안에 오는 역경승들의 발걸음도 덩달아 많아졌다. 이러한 때인 379년 양양에서 장안으로 오게 된 도안은 382년부터 본격적으로 번역에 나섰다. 385년 도안의 입적으로 사업은 그쳤다. 짧은 3∼4년 사이 중요한 아비달마 계열의 경논經論들이 관중關中지방(주2) 일대에 상재上梓됐다. 안세고 이래 초기 역경승들의 노력으로 적지 않은 경전과 논서論書들이 이미 중국에 소개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마라집(344∼413)이 장안에 들어와 경전들을 번역하기 전까지 중국불교인들은 대·소승을 변별辨別하려는 의식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대승의 성격과 주요 내용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주3)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전들이 이들에게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었고, 수준 높은 식견識見을 가져다주었다.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 번역과 읽기 편한 문장에 모두들 매료됐다. 질質과 양量이라는 두 측면에서 그 누구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업적을 구마라집이 남겼다. 남조 양나라 스님 승우(僧祐. 445∼518)도 이를 극찬했다. 그가 510∼518년 편찬한 『출삼장기집 권1』 「호한역경문자음의동이기胡漢譯經文字音義同異記 제4」에 찬문讚文이 실려 있다.

 

“(역경이)법사 구마라집에 이르러 준수하고 신묘해져 마치 황금처럼 빛났다. 후진의 스님 도융 · 승조의 지혜는 물로 만든 거울처럼 맑았다. 능히 문장으로 내용을 드러냈고, 경전의 깊은 뜻을 자세하게 밝힐 수 있었다. 여기서, 대승의 신묘한 말이 밝은 빛처럼 환히 드러났다.”(주4)

 

찬사讚辭가 지나쳐 보일지 모르나 구마라집의 업적을 받쳐주기엔 오히려 부족하다. 구마라집의 번역이 있었기에 중국인들은 붓다의 교설을 제대로 연구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구마라집은 도대체 어떤 태도로 역경譯經에 임했을까?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 실력이 뛰어나 번역을 잘한 것인가? 교의敎義에 정통했기에 역경의 정상頂上에 오를 수 있었을까? 아니면 우수한 한인漢人 제자들이 중국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지었을까? 그가 어떤 자세로 경전 번역에 임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없지는 않다. 남조 양나라 스님 혜교慧皎(495∼554)가 편찬한 『고승전 권2』 「불타야사전」에 자취가 있다.

 

“구마라집은 스승 불타야사가 고장(감숙성 무위武威)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 후진 왕 요흥에게 그를 장안으로 모실 것을 요청했다. 요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한 어느 때 요흥이 구마라집에게 경장經藏을 번역하라고 말했다. 구마라집이 아뢰었다. ‘무릇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펴려면 마땅히 글의 뜻이 부족함 없이 통해야 합니다. 저는 경문을 외울 수는 있지만 이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오직 불타야사께서 깊고 그윽한 의미를 통달했습니다. 그 분이 지금 고장에 계십니다. 그 분이 장안에 올 수 있도록 조칙을 내려 주십시오. 불타야사가 (경전의) 한 마디 말에 세 번 생각한 뒤 붓을 들어 써야만 붓다의 미묘한 말이 어그러지지 않습니다. 그래야만 (경전을 보는 이들이) 천 년을 지나도 그 내용을 믿을 것입니다.’ 요흥은 구마라집이 말한 대로 사신을 파견해 그를 맞이하게 했다. 많은 예물을 주었으나 불타야사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 … 그 때 구마라집은 『십주경』(『화엄경 · 십지품』)을 번역하고 있었다. 의심스럽고 어려운 부분에 걸려 한 달여 정도 (번역의 내용을) 결정하지 못해 붓을 들지 못했다. 불타야사가 이미 장안에 도착했기에 함께 논의해 뜻을 찾고 문장을 결정했다. 비로소 글에 조리가 서고 뜻에 모습이 갖춰졌다. 출가자 · 재가자 3천 여 명이 의미와 글이 가르침의 요지에 딱 들어맞는 것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괄호 · 보충은 필자)(주5)

 


사진1. 도서출판 푸른역사가 펴낸 <번역으로서의 동아시아>

 

번역에 임하는 구마라집의 신중하고 진실한 태도가 인용문에 잘 드러난다. 천하에 둘도 없는 교학敎學 이론가이자 번역가인 구마라집도 본인이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묻고 공부한 다음 신중하게 번역했다. 여산 혜원의 제자 지법령支法領이 서역에서 구해온 『십주경』의 내용을 구마라집은 잘 몰랐다. 스승에게 물어 ‘숲’과 ‘나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헤아린 다음 중국어로 옮겼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眞正 아는 것임”을 구마라집은 이미 체득體得 · 체회體會하고 있었다. 그의 번역이 지금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원인의 하나가 이것이리라.

 

앞 사람이 이미 번역한 경전을 다시 옮길 경우 옛 번역의 장 · 단점을 살핀 다음 의미와 단어를 선택했다. 승예가 쓴 「대품경서大品經序」와 「소품경서小品經序」(주6)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출삼장기집 권8』에 실려 있다.

 

“홍시 5년(403) 계묘년 4월23일 장안성의 북쪽 소요원에서 『마하반야바라밀경』(『반야경』)을 번역했다. 구마라집 법사께서 손에 산스크리트어본을 들고 입으로 중국어로 말하며, 서로 다른 언어를 모두 풀이해 문장의 의미를 밝혔다. 후진 왕 요흥이 몸소 옛 번역을 보며 옳고 그름을 따졌다. 의미가 통하는지 물으며 (경전) 가르침의 궁극적인 이치를 밝혔다. 경전의 뜻을 밝히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스님들 즉 혜공 · 승략 · 승천 · 보도 · 혜정 · 법흠 · 도류 · 승예 · 도회 · 도표 · 도항 · 도종 등 5백여 명과 함께 의미와 종지를 상세하게 논하며 문장의 핵심을 살핀 뒤에야 글로 옮겼다. 그 해 12월15일 초벌 번역은 완성 됐으나 문장을 교정하고 의미를 살피느라 다음 해 4월23일에야 끝났다. 문장의 의미는 정해졌어도 『대지도론』과 비교 · 조사해 보면 여전히 미진함이 발견됐다. 그래서 『대지도론』의 번역에 따라 『대품경』도 바로 잡았다. 『대지도론』 번역이 마무리되는 대로 『대품경』의 문장을 교정했다. 교정이 끝나기도 전에 필사본을 밖으로 유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의미를 마음대로 더하고 빼 『반야바라밀』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자도 생겼다. (해적판의) 말과 글이 서로 어긋나고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는 후학들이 자기 생각을 비우지 못하고, 사사로운 감정을 두터이 믿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주7)

 

“구마라집 법사가 그 글을 전수해 주고 마침 (『소품반야바라밀경』의) 진본眞本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홍시10년(408) 2월6일 법사에게 번역하도록 요청했다. 4월30일 교정까지 모두 마쳤다. 옛 번역을 조사해 보니 진실로 잡초가 무성한 밭에 곡식을 기르는 것 같아, (잡초의) 반 정도를 호미로 뽑아낸들 어찌 많이 고쳤다 하겠는가!”(주8) (괄호는 필자)

 

“옛 번역을 보며 옳고 그름을 따져, 의미가 통하는지 물으며 가르침의 궁극적인 이치를 밝혔다.” “옛 번역을 조사해 보니 진실로 잡초가 무성한 밭에 곡식을 기르는 것 같다.” 두 문장은 구마라집이 옛 번역을 대하는 태도를 잘 보여 준다. 다른 사람이 이전에 번역한 것을 무턱대고 파기하는 것이 아니고, 대조해 연구한 다음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방식을 취했다. 인도어와 중국어에 모두 능통하고 게다가 신중한 태도로 번역에 임했기에 양나라 승우가 “(역경이) 법사 구마라집에 이르러 준수하고 신묘해져 마치 황금처럼 빛났다.”고 찬탄해 마지않았던 것이리라.

 


사진2. 도서출판 운주사가 출간한 <역경학 개론>

 

「대품경서大品經序」는 당시 구마라집의 번역장飜譯場 출입에 큰 제한이 없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확정되지도 않은 번역문을 필사해 마음대로 유포한 사람도 있다는 기록에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역장譯場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해적판海賊版을 만들어 유통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적판盜賊版을 만든 그들을 승예僧叡는 점잖게 꾸짖고 있지만 비非정상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선전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예전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의미를 마음대로 더하고 뺀, 말과 글이 서로 어긋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을 담은 『대품경』 판본版本을 유출했으리라.

 

“교정에 교정을 해도 미진함이 발견됐다.”는 「대품경서大品經序」의 기록에서 번역은 역시 어려운 작업임을 알 수 있다. 아니, 탁월한 역경가 구마라집은 이미 번역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사실 번역은 아무리 잘해도 번역에 지나지 않는다. ‘원문原文을 만들어 낸 문화’와 ‘원문에 배인 독특한 맛과 정취情趣’를 제대로 번역문에 담아내기는 상당히 힘들다. 운문이 특히 그렇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詩를 중국어로 옮기는 것을 구마라집은 마음 내켜 하지 않았다. 희대稀代의 번역가가 얼마나 싫었으면 “번역문은 (음식 먹는) 사람을 토하게 만든다”고 말했을까! 다행히 그 상황을 귀띔해주는 기록이 『고승전 권2』 「구마라집전」에 남아 있다.

 

“사문 승예는 재주가 많고 식견이 뛰어났다. 항상 구마라집을 따라 다니며 전사傳寫(받아쓰는 것)를 맡았다. 구마라집은 매번 승예에게 서방(서역과 인도)의 문체[辭體]를 이야기 하고, 그것과 중국 문체의 같고 다름에 대해 설명했다. 구마라집이 말했다. ‘인도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문장의 음절과 운율이 음악과 자연스레 어울리는 것을 최고로 친다. 대저 국왕을 만나면 반드시 그 덕을 찬양하고, 노래로 공덕을 찬탄하는 의식儀式을 거행하며 붓다를 친견하는 것을 귀중하게 생각한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그런 양식들이다. 그런데 범어를 중국어로 바꾸면 원문의 그런 아름다운 맛이 사라져 버린다. 문장의 뜻은 얻어도, 문체文體는 완전히 어긋나고 만다. 마치 밥을 씹어 남에게 주는 것처럼 맛도 없고, 먹는 사람을 토하게 만든다.’ 구마라집은 예전에 사문 법화에게 게송을 지어준 적이 있었다. ‘밝은 덕德을 기른 마음 산의 그윽한 운치 사방 1만 리里에 가득하고, 외로운 오동나무에 깃들어 사는 슬픈 난새[鸞鳥]의 청아한 울음소리 구천까지 울려 퍼진다!’ 게송 열 수를 지었는데 문체와 비유가 대개 이와 같았다.”(주9) (강조는 필자)

 

구마라집이 특히 고심한 번역이 운문임을 알 수 있다. 범어의 운문 형태는 다양한 데 대표적인 것이 슈로카śloka다. 수로가首盧迦로 음역한다. 1구 8음절을 4구 연결하면 32음절이 된다. 이것을 ‘1슈로카’라 한다. 슈로카의 모든 음절들은 장음長音 혹은 단음短音이라는 길이를 지닌다. 음절의 장음과 단음의 조합으로 운율이 정해진다.(주10)

 

중국 시는 크게 [1]근체시近體詩와 [2]고체시古體詩로 나눌 수 있다. 자수字數 · 구수句數 ·평측平仄 · 용운用韻 등을 비교적 엄격하게 적용한 시를 근체시, 규정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쓴 시를 고체시라 부른다. [1]근체시(금체시今體詩라고도 한다)는 당나라 때 과거시험이 시행되면서 틀이 잡혔다. 여기에는 ①율시律詩 ②배율排律 ③절구絶句 등 세 종류가 있다. ①일정한 격률格律에 의거해 쓴 시가 율시인데, 8구로 되어 있는 한시체漢詩體를 율시律詩라 한다. 한 구가 다섯 자로 되어 있는 것은 오언 율시, 일곱 자로 되어 있는 것은 칠언 율시다. ②배율은 10구 이상으로 구성된 율시다. ③절구絶句는 기 · 승 · 전 · 결의 4구로 이뤄지는데, 한 구가 다섯 자로 된 것이 오언절구(글자 수는 20자), 일곱 자로 된 것이 칠언절구(글자 수는 28자)다. [2]고체시는 고풍古風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때 근체시가 탄생된 후에도 시인들은 고대의 형식을 버리지 않고, 근체시의 평즉平仄 · 대장對仗(주11) · 어법을 따르는 대신 상대적으로 구속이 적은 ‘고인古人의 시’(이를 고시古詩라 한다)를 모방해 시를 지었다.(주12) 이를 고체시라 한다.

 


사진3. 불광출판사가 출판한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번역이 어려운 것은 절구와 율시에 넣는 압운押韻 때문이다. 시가詩歌에서 시행詩行의 일정한 자리에 같은 운韻을 규칙적으로 다는 것을 압운이라 한다. 음조音調가 비슷한 글자를 운韻이라 하는데, 한자의 ‘중국식 발음’에서 성모聲母를 제외한 부분이다. 중국어 글자의 음[字音]은 성모聲母+운모韻母+성조聲調로 구성된다. 聲[성. shēng]이라는 글자의 발음은 sh+eng+−(알파벳 e위의 표시로 제1성을 나타낸다)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sh]는 성모, [eng]는 운모, [−]은 성조(제1성)다. 대부분의 글자로 성모로 시작되지만 모음으로 시작되는 글자도 있다. 이런 자를 영성모零聲母라 한다. 愛[애. ài]의 경우 성모가 없는 영성모 글자다.

 


사진4. 창비에서 나온 <중국 불경의 탄생>

 

운모는 다시 운두韻頭+운복韻腹+운미韻尾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娘[낭. niáng]에서 성모 [n]을 뺀 [iáng]이 운모다. 이 가운데 [i]는 운두, [á]는 운복, [ng]는 운미다. 운두나 운미는 없을 수 있지만 운복은 반드시 필요한 ‘근본음’이기에 ‘주요원음主要元音’이라 한다. “운韻이 같다”는 말은 운모의 운두 · 운복 · 운미의 세 부분 가운데 운복과 운미가 같다는 의미다. 같은 운자韻字에 속한 글자를 동운자同韻字라 한다. 압운했다는 것은 같은 운자를 사용했다는 뜻이다. 보통 시의 1행 · 2행 · 4행의 끝 글자의 운을 맞춘다. 당나라 때는 206운이 있었지만 실제로 사용된 운자는 112운이었다. 원나라 이래 통폐합되어 106운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106운이 통상적으로 일컫는 시운詩韻으로 지금까지 연용延用되고 있다.(주13)

 

성조聲調는 평平 · 상上 · 거去 · 입入의 사성四聲으로 나누고, 이를 유사성에 따라 분류한 것이 운이다. 고전 한자의 경우 평성平聲 · 상성上聲 · 거성去聲 · 입성入聲으로 성조를 나눴고, 상성上聲 · 거성去聲 · 입성入聲을 측성仄聲이라 불렀다. 근체시 규칙에 의하면 두 글자씩을 하나의 절주단위로 삼아 평성과 측성을 번갈아 쓴다. 시의 한 구절 속에서 첫 번째 · 두 번째 글자가 모두 평성이면 세 번째 · 네 번째 글자는 측성이어야 하고, 첫 번째 · 두 번째 글자가 측성이면 세 번째 · 네 번째 글자는 평성을 쓴다.(주14) 측성仄聲으로 시작되는 오언율시의 경우 「측측평평측, 평평측측평. 평평평측측, 측측측평평. 측측평평측, 평평측측평, 평평평측측, 측측측평평(만약 제1구에 운을 달면 ‘측측측평평’으로 변한다).」이 된다.(주15) 한편, 현대 중국어는 제1성[음평陰平] · 제2성[양평陽平] · 제3성[상성上聲] · 제4성[거성去聲]으로 성조를 나눈다.

 


사진5. 불교시대사가 선보인 <불교경전 성립의 연구>

 

그런데 불경 번역은 당나라 이전 시기 이뤄진 것이 많기에, 슈로카를 한역漢譯할 때 운자를 대부분 사용하지 않았다. 무시하고 의미만 통하게 했다. 장음長音과 단음短音으로 표현되는 인도식 운율을 소리의 높낮이와 4성으로 맞추는 중국식 운율로 번역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자의 압운을 맞추기도 상당히 힘들다. 엄격하게 말하면, 한역 경전에 있는 많은 게송偈頌들은 인도의 시가詩歌도 중국의 시도 아니다. 그냥 글자 수를 다섯 자 혹은 일곱 자 등으로 맞춰놓았을 뿐이다. 당나라 중기 이후 시승詩僧들이 출현해서야 게송은 비로소 글자 숫자만 배열한 수준에서 벗어나 운율을 갖춘 중국적인 시로 변하기 시작했다.

 

인도와 중국의 작시作詩 규칙이 완전히 달라 구마라집도 번역할 때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장의 뜻은 얻어도, 문체文體는 완전히 어긋나고 만다. 마치 밥을 씹어 남에게 주는 것처럼 맛도 없고, 먹는 사람을 토하게 만든다.”고 비분강개 해(?) 말했는지도 모른다. 남송의 요면(姚勉. 1216∼1262)이 「증준상인시서贈俊上人詩序」에서 “한나라 스님들은 경전을 번역했고, 서진 · 동진의 스님들은 강의를 했으며, 양나라와 북위부터 당나라 초기까지의 스님들은 선禪을 수행했으나 시詩는 없었다. 만당晩唐 때 선禪이 번성하고 시詩도 크게 흥성했다. 송나라에 들어와서도 시는 크게 유행하고 있다.”(주16)고 말했는데, 각 시대의 불교적 특징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그의 말은 큰 틀에서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지 않는다.

 

아무튼, 번역은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다. 적확한 단어와 의미 하나를 찾기 위해 역경승들은 머리를 싸매며 고민했다. 지금 우리가 읽는 한역 경전들은 그들의 고뇌의 산물이다. 역경자의 고뇌와 역경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경전 한역漢譯은 어쩌면 인류의 지적知的인 행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역경을 아주 깊이 파고든 책이 출간돼 주목된다. 도서출판 푸른역사(대표 · 박혜숙)가 최근 펴낸 『번역으로서의 동아시아』(후나야마 도루 지음 · 이향철 옮김. 사진 1)가 그 책이다. 학문적 연구가 돋보이는 역작이다. 번역이 매끄러워 쉽게 읽힌다. 역경을 위해 살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 없이 사라진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잘 엮어 놓았다.

 


사진6. 중국학자 차오링이 쓴 <중국불교의 위경종록>

 

운주사(대표 · 김시열)가 펴낸 『역경학 개론』(최종남 등 지음. 2011년. 사진 2) 역시 탄탄한 내용을 갖추고 있다. 불광출판사(발행인 · 지홍 스님)가 발간한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석길암 지음. 2010년. 사진 3), 창비에서 선보인 『중국 불경의 탄생 - 인도 불경의 번역과 두 문화의 만남』(이종철 지음. 2008년. 사진 4) 등도 역경의 의의 · 역사 등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책들이다. 불교시 사(대표 · 이규만)에서 출간된 『불교경전 성립의 연구』(모치즈키 신코 지음 · 김진렬 옮김. 1995년. 사진 5), 중국학자 차오링曹凌이 쓴 『중국불교의위경종록中國佛敎疑僞經綜錄』(上海古籍出版社. 2011. 사진 6), 일본학자 우이 하쿠쥬宇井伯壽가 지은 『역경사연구譯經史硏究』(岩波文庫. 1971년) 등도 경전성립 · 위경문제 · 역경의 역사에 대해 잘 정리해 놓았다.

 

주)

1) 맨 앞의 숫자는 태어난 해, 가운데 숫자는 황제에 즉위한 해, 마지막 숫자는 타계한 연도를 각각 나타낸다. 이하 동일하다.
2) 당나라까지 중국 문화의 중심이었던 장안(현재의 섬서성 서안) 일대 즉 위수분지 지역을 가리킨다. 동쪽의 함곡관函谷關, 서쪽의 대산관大散關, 남쪽의 무관武關, 북쪽의 소관蕭關 등 4개 관문이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중심이라는 의미다.
3) 呂澄著, 『中國佛學源流略講』, 北京:中華書局, 1979, p.86.
4) “逮乎羅什法師, 俊神金照, 秦僧融肇, 慧機水鏡, 故能表發揮翰, 克明經奧, 大乘微言, 於斯炳煥.” [南朝梁]釋僧祐撰·蘇普仁/蕭鍊子點校, 『出三藏記集』, 北京:中華書局, 1995, p.14
5) “什聞其至姑臧, 勸姚興迎之, 興未納. 頃之, 興命什譯出經藏, 什曰: ‘夫弘宣法教, 宜令文義圓通, 貧道雖誦其文, 未善其理, 唯佛陀耶舍深達幽致, 今在姑臧, 願下詔徵之, 一言三詳, 然後著筆, 使微言不墜, 取信千載也.’ 興從之, 即遣使招迎, 厚加贈遺, 悉不受. … … 于時羅什出十住經, 一月餘日, 疑難猶豫, 尚未操筆. 耶舍既至, 共相徵決, 辭理方定, 道俗三千餘人, 皆歎其當要.” [南朝梁]釋慧皎撰·湯用彤校注, 『高僧傳』, 北京:中華書局, 1992, pp.66∼67.
6) 『대품경』은 『마하반야바라밀경』(27권본)의 약칭이며 『대품반야경』이라고도 한다. 『소품경』은 『소품반야바라밀경』(10권본)의 약칭이며 『소품반야경』이라고도 한다.
7) “以弘始五年, 歲在癸卯, 四月二十三日, 於京城之北逍遙園中出此經. 法師手執胡本, 口宣秦言, 兩釋異音, 交辯文旨. 秦王躬攬舊經, 驗其得失, 諮其通途, 坦其宗致. 與諸宿舊義業沙門, 釋慧恭、僧䂮、僧遷、寶度、慧精、法欽、道流、僧叡、道恢、道㯹、道恒、道悰等, 五百餘人, 詳其義旨, 審其文中, 然後書之. 以其年十二月十五日出盡, 校正檢括, 明年四月二十三日乃訖. 文雖粗定, 以『釋論』撿之, 猶多不盡. 是以隨出其論, 隨而正之. 『釋論』既訖, 爾乃文定. 定之未已, 已有寫而傳者; 又有以意增損, 私以般若波羅蜜為題者. 致使文言舛錯, 前後不同. 良由後生虛己懷薄, 信我情篤故也.” [南朝梁]釋僧祐撰·蘇普仁/蕭鍊子點校, 『出三藏記集』, 北京:中華書局, 1995, pp.292∼293.
8) “會聞鳩摩羅法師神授其文, 真本猶存, 以弘始十年二月六日, 請令出之. 至四月三十日校正都訖. 考之舊譯, 真若荒田之稼, 芸過其半, 未詎多也.” [南朝梁]釋僧祐撰·蘇普仁/蕭鍊子點校, 『出三藏記集』, 北京:中華書局, 1995, p.298.
9) “初沙門僧叡, 才識高明, 常隨什傳寫. 什每為叡論西方辭體, 商略同異, 云: ‘天竺國俗, 甚重文製, 其宮商體韻, 以入絃為善. 凡覲國王, 必有贊德. 見佛之儀, 以歌歎為貴, 經中偈頌皆其式也. 但改梵為秦, 失其藻蔚, 雖得大意, 殊隔文體. 有似嚼飯與人, 非徒失味, 乃令嘔噦也.’ 什嘗作頌贈沙門法和云: ‘心山育明德, 流薰萬由延. 哀鸞孤桐上, 清音徹九天.’ 凡為十偈, 辭喻皆爾.” [南朝梁]釋慧皎撰·湯用彤校注, 『高僧傳』, 北京:中華書局, 1992, p.53.
10) 산스크리트어의 운율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참고하라. 찰스 필립 브라운 지음·박영길 옮김, 『산스끄리뜨 시형론 - 운율 및 숫자적 상징에 대한 해설』, 서울:도서출판 씨아이알, 2014.
11) 시의 대구對句를 대장 · 대우對偶라 한다.
12) 왕력 저 · 송용준 역주, 『중국시율학 2』, 서울:소명출판, 2007, p.17. 중국 시율학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은 『중국시율학 1 · 2 · 3 · 4』를 참조하라.
13) 왕력 저 · 송용준 역주, 『중국시율학 1』, 서울:소명출판, 2007, pp.22∼23.
14) 왕력 저 · 송용준 역주, 『중국시율학 1』, 서울:소명출판, 2007, p.25.
15) 왕력 저 · 송용준 역주, 『중국시율학 1』, 서울:소명출판, 2007, p.161.
16) “漢僧譯, 晉僧講, 梁魏至唐初僧始禪, 猶未詩也. 唐晩禪大盛, 詩亦大盛. 吾宋亦然.” [南宋]姚勉著· 曹詣珍/陳偉文校點, 『姚勉集』, 上海:上海古籍出版社, 2012,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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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조병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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