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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를 만들어 낸 불교의 바닷길 ]
푸난의 바닷길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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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  2025 년 10 월 [통권 제150호]  /     /  작성일25-10-03 21:22  /   조회19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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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동남아를 거쳐서 중국으로 불교가 이입된 때, 그 중간 거점으로 푸난이 주목된다. 푸난은 일찍이 『한서』에 부남扶南으로 등장하는 나라다. 메콩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넓게 퍼진 푸난의 성립은 1세기 무렵. 크메르어로 브남(Bnam, 현대어 Phnom), 중국어로 음역해 푸난이며, ‘산’을 뜻한다. 캄보디아 전설은 푸난 왕국의 시조를 인도 설화 및 문화와 연결하는데, 이 전설은 그 후 1000년 이상 장기지속적으로 궁중 의례의 중요한 부분이 됐다. 이때의 산은 힌두교에서 신성시하는 신이 사는 메루산[須彌山]이며, 이는 그대로 불교의 수미산과 연결된다.

 

메콩델타의 옥에오문명권

 

메루산은 불교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앙에 솟아 있다는 산이다. 실제로 옥에오 유적지에는 바테산(해발 226m)이 솟아 있다. 드넓은 평야 지대에 위치했기에 낮은 산인데도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요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극동학원이 메콩강 지류 바사크천[川] 서쪽 저습지에 자리한 옥에오를 발굴했다. 옥에오는 고대 국제무역항이었다. 

 

사진 1. 메콩강 유역에서 출토된 좌상(6~7세기, 호치민 역사박물관). 

 

옥에오는 바다로 나아가는 길목의 감시와 방어가 가능한 요충지에 자리했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중국 사서 등을 통해 옥에오가 푸난국에 속한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푸난을 단일 정치체제의 왕국이 아니라 전형적인 만다라 시스템의 네트워크 왕국으로 본다면 푸난과 옥에오의 관계가 쉽게 풀린다. 메콩강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나라가 산재하고, 그중 옥에오가 뚜렷한 입지 조건과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푸난의 영역은 오늘날 태국령의 타이만, 말레이반도에까지 이르렀다. 푸난은 고대의 동남아시아 거점 해상왕국이었다. 푸난은 말레이반도의 해항도시 및 동남아시아, 중국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동서무역의 중간 거점인 해상왕국

 

중국 『한서』에 등장하는 강태康泰는 남해 여러 나라의 견문록인 『오시외국전吳時外國傳』과 『부남토속전扶南土俗傳』을 각기 저술했다. 『부남토속전』은 인도를 왕래하던 중국 상인 가상리가 인도에서 귀환 길에 푸난의 왕 범전을 만나 자신이 보고 들은 풍습을 설명한다. 그런데 강태는 푸난에서 불교가 융성하고 있다고 했다. 불교가 상층뿐 아니라 하층까지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실상을 기록했다. 『오시외국전』에서는 ‘부남국에는 벌목선伐木船이 있어 길이 12장, 넓이 6척’이라 했으며, 『남주이물지』에서도 능히 원해 항해가 가능한 선박을 묘사하고 있다. 푸난과 중국의 무역 거래를 가능케 했던 상선들이다. 상선 루트를 이용하여 무역은 물론이고 사신과 불교 교섭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진 2. 베트남 동즈엉에서 나온 힌두 신상.

 

호치민 역사박물관에는 푸난과 짬파 유물이 모여 있고, 산스크리트어 비문이 전해온다. 발굴 유물에서 힌두 양식이 중심이지만 빼어난 석불과 목불도 남아 있어 불교 역시 문화적 구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채로운 힌두신상이 다수 발굴되었는데 비슈누 신앙과 불교신앙이 동시에 발전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푸난에는 많은 승려와 경전이 있었으며 당시 동남아 대승불교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고학적 물질 증거와 중국 문헌의 괴리감이 엿보인다. 중국 사서에는 분명히 푸난의 불교가 대단한 수준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에서는 불교적 증거물은 힌두신상에 비하여 제한적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잔유물만으로 푸난은 ‘힌두의 나라’였다고 논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헬레니즘 양식의 간다라 미술도 옥에오에 영향을 미쳤다. 호치민 역사박물관의 옥에오 유물에는 불교 신상 및 힌두 신상이 같이 진열되어 있는데, 간다라 미술은 불교 신상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힌두 신상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간다라 양식이 서역에서 바다를 건너 옥에오에 이른 것이다. 세련된 양식의 힌두상은 지금 봐도 지극히 현대적이다. 불교와 힌두 그리고 그리스 양식이 메콩강 유역에서 만나 융합되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냈다. 브라만 문화를 받아들인 푸난의 군주는 신왕의 지위를 고수하고 시바신을 숭배했지만, 불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즉 힌두-불교 공존의 시대였다. 

 


 

푸난은 중국 남조에 영향을 주었다. 푸난 불교의 명성이 높았기에 양나라는 승려를 보내달라고 하였고, 푸난은 사가바르만(Sa ghavarman, 僧伽婆羅)과 만다라(Mandala, 曼陀)를 보냈다.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양나라로 가져갔으며, 그들은 중국에 머물면서 경전을 한역했다. 『남제서南齊書』 만동남이전蠻東南夷傳에 따르면, 중국 남조의 유송劉宋(420∼279년) 말 부남왕 사야발마는 상인과 상품을 광주까지 보내 교역하였다. 천축 승려 나가선那伽仙을 보내 표를 올렸다. 

 

신이 전에 사신을 보내 잡다한 물건을 싣고 광주에 가서 무역을 하였습니다. 천축의 승려 나가선이 광주에서 신들의 선박에 편승하여 부남으로 오려고 하였는데,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입읍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입읍의 국왕이 신의 화물과 나가선의 개인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나가선이 중국에서 이곳에 왔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폐하의 성스러운 위덕과 어진 다스림을 우러르며 나열하였습니다. 상세히 논의하고 교화를 행하시고, 불법이 흥성하며, 많은 승려가 모였고, 불교 행사가 날로 성행하며, 왕의 위엄이 엄정하고 …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중개무역과 불교전파의 매개자들

 

푸난이 남조와 인도의 중간 지점에서 중개무역을 하고 있었고, 천축승도 매개자 역할을 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남제서』는 푸난인은 교활하고 꾀가 많아, 주변의 복속되지 않는 사람들을 공략하여 노비로 삼고, 금은과 비단을 교역한다고 하였다. 선박을 건조하였는데, 길이가 8∼9장이고 폭이 6∼7척이라 하였다. 능히 중국과의 항해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사진 5. 푸난 불교의 상징인 동즈엉 사원 배치도(다낭 짬파 조각 박물관Cham Sculpture Museum). 

 

푸난의 자야와르만(Jayavarman, 재위 478~514) 왕은 양무제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위에서 언급된 나가선, 즉 나가세나를 통해 “부남국은 국교가 브라만교로 주로 쉬비(Śiva) 신을 모시지만 불교도 성행하여 신도 수가 많다.”라고 전한다. 중국과의 교학 교류도 활발하여 만드라네세나(Mandrasena)가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 2권, 상가빨라(Sanghapala)는 『아육왕경阿育王經』 10권을 크메르어로 번역했다.

 

『양서』 제이전諸夷傳에 따르면, 503년 산호로 빚은 불상을 보냈고, 중국은 교진여도사발마憍陳如闍邪跋摩(인도 계통의 카운딘야를 뜻함)를 푸난 왕으로 책봉한다. 책봉이란 단어로 미루어 푸난이 중국의 기미체제에 편입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은 푸난에서 지속적으로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519년 루두르와르만(Rudravarman, 재위 514~550) 시대에는 천축에서 단향목으로 조각한 석가모니상과 보리수 잎[婆羅樹葉]을 보냈으며, 보석 화제주火薺珠와 울금鬱金, 소합蘇合 등을 중국에 봉헌했다. 519년에 사자를 보내어 말하기를, 푸난에 부처의 머리카락이 있는데, 길이가 1장 2척이라 하였다. 이에 양무제가 조를 내려 승려 운보雲寶에게 사자를 따라가서 붓다의 머리카락을 모셔 오게 했다. 

 

6세기 초 무렵 중국에 건너온 푸난 출신의 상가팔라[僧伽婆羅, 460∼524]는 스리랑카 아바야기리 사원의 우파팃사가 지은 『해탈도론解脫道論』과 대승경전인 『문수사리문명文殊師利問經』,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 등을 한역하였다. 535년에는 천축승 구나라타나를 중국에 보냈으며, 546년에는 패엽경으로 제작된 대승경전 240개를 보내면서 붓다의 모발 사리를 다시 회수한다. 중국 요청으로 천축승 파라마르타(Paramartha, 혹은 Gunaratna)와 불교용품 및 경전 240종류를 함께 보낸 것이다.

 

 

546년에 유식론唯識論의 대가 진제眞諦(Paramārtha, 499∼569)가 546년 해로로 푸난에서 광주에 당도하였다. 그가 푸난에서 광주로 간 상세 내막은 알려지지 않지만, 당시 푸난은 대승불교가 흥성하였으므로 양나라의 흥법을 위해 간 것으로 추측된다. 양무제는 푸난에 사신을 보내어 대승불교 논서와 대덕삼장을 요청하였고, 푸난에서 진제를 보낸 것이다.

 

양나라와의 잦은 불교 교섭

 

이처럼 양나라 성립 이후에 푸난은 502년부터 539년 사이에 무려 열세 차례나 사신을 보낸다. 당시 중국은 끊임없이 천축국뿐 아니라 푸난에서도 다양한 불교 자료를 들여오기 위해 애를 썼다. 푸난의 불교계가 양나라보다 우월한 상태였음을 말해 준다. 이처럼 푸난과 중국은 서로 관심이 많았으며 교류에서 불교가 매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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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분과학문의 지적·제도적 장벽에 구애받지 않고 융·연구를 해왔다. 역사학, 민속학, 인류학, 민족학 등에 기반해 바다문명사를 탐구하고 있다. 제주대 석좌교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역사민속학회장,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POCC) 등을 거쳤다. 『마을로 간 미륵』, 『바다를 건넌 붓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등 50여 권의 책을 펴냈으며, 2024 뇌허불교학술상을 수상했다.
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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