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위해 초연히 홀로 걸어가리라”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선시산책]
“진리를 위해 초연히 홀로 걸어가리라”


페이지 정보

벽송제원  /  2018 년 11 월 [통권 제6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177회  /   댓글0건

본문

11월엔 첫 눈이 내린다. 봄 꽃 소식처럼, 해마다 초겨울 연보annual report가 된다. 절기상 소설(小雪, 11/22) 전후 내리는데, 설악산 대청봉이 1보를 띄운다. 이 무렵 마을에선 김장을 하고, 시래기와 곶감 등을 엮어 단다. 눈과 바람속에서 해빙解氷을 반복하면서, 겨우살이 양식이 된다.

 

하늘·바다에 가득한 수선修禪의 기백

 

물이 나투는 천변만화, 즉 이슬-서리-안개-우박-얼음 등의 기본속성은 물[水]이다. 나투는 모습은 기온에 따라 다양하다. 백설을 비롯해 이슬과 서리, 안개와 우박, 그리고 얼음 등 다양하다. 물의 화신 가운데 절정은 역시 함박눈이다. 그리고 싸락눈, 가루눈, 진눈깨비 등이 있는데, 별모양 부터 부채와 육각기둥, 바늘 등 그 종류가 3천종이 넘는다.

 

미천대업홍로설彌天大業紅爐雪
하늘에 가득찬 대업은 붉은 화롯불에 있는 눈송이요
과해웅기혁일로跨海雄基赫日露
대양을 넘는 기틀은 밝은 햇볕에 이슬이네.
수인감사편시몽誰人甘死片時夢
그 누가 잠깐 꿈속을 살다 기꺼이 죽음을 건너리
초연독보만고진超然獨步萬古眞.
만고 진리를 위해 초연히 홀로 걸어가리라
            - 성철(性徹, 1912~1993), 출가시

 

선기禪器가 넉넉하다. 양 극단의 의미를 가진 단어의 전달력이 강렬하다. 먼저 ‘화롯불과 백설’이 공존하고, ‘밝은 햇볕과 새벽이슬’이 의미의 양변을 비춘다. 이어, ‘잠깐 꿈’과 ‘만고 진리’가 ‘시각의 간격’을 만들어, 찰라와 영겁을 통섭한다.  

 

선기禪氣도 번뜩인다. ‘하늘 가득찬 대업彌天大業’과 ‘바다를 넘는 웅장한 기틀跨海雄基’이 분명하다. 이어, ‘생사를 넘은 정진력[誰人甘死 - 超然獨步]’이 오롯이 부각된다. ‘출가시’의 기치가 ‘그 이후 정진’으로 이어져, ‘시의 생명’ 이 살아 있다. 출가시와 오도송와 임종게가 선순환을 이룬다. 실제 스님은 인생을 통해, ‘시와 삶’이 둘이 아님을 증명했다. 나아가, ‘출가시의 언어’에도 머물지 않고, ‘시계열時系列의 견조세堅調勢’를 유지했다. 입체언어立體言語 메시지가 살아있는 선맥禪脈이 아닐 수 없다.

 


중국 감숙성 난주 부근에 있는 병령사 석굴의 조각들. 

 

① 청산경객지靑山敬客至 두대백운관頭戴白雲冠
푸른 산에 찾아온 손님께 인사하려고, 머리에 흰 구름 모자를 쓰고
② 설락천산백雪落千山白 천고일월명天高一月明
천개의 산은 눈 내려 하얗고, 밝은 달은 하늘 높이 환하게 비추네
③ 소산폐대산小山蔽大山 원근지부동遠近地不同
작은 산은 어떻게 큰 산을 가렸을까! 멀고 가까운 거리가 달라서라네.

 

상기 작품은 ‘조선시대 아동 3명의 작품’을 합쳤다. ① 어무적(魚無迹. 조선전기 문인, 출생-사망 미상), 동시童詩 ② 지은이 미상未詳, 조선시대, 동시 ③ 정약용(丁若鏞. 조선후기, 1762∼1836), 7세 동시.

 

천진불의 상징 동시

 

동몽시, 즉 동시童詩를 말한다. 통상 5~13세 어린이들이 지었다. 심지어 김시습은 3세 유아(幼兒 1~6세) 때, 지었다. 동심은 천진불天眞佛의 상징이다.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칠언절구나 오언율시 등 형식을 제대로 갖춘 작품도 있으나, ‘2행의 반절구半絶句’도 다수 전한다. 

 

우선, 어무적의 동시 ‘푸른 산 구름’엔 재치가 있다. 푸른 산이 손님에게 인사하려고 흰 구름 모자를 썼다는 표현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일어난다. 흰 구름은 ‘작자 미상의 2번째 작품’으로 이어진다. 천하의 모든 산엔 눈이 가득하다. 노랑 달빛도 눈빛을 닮아 하얗게 변했다. 그 순간 겨울산의 공제선空際線이 뚜렷해진다. ‘다산의 동시’를 보면, 7세 어린이답지 않은 관찰과 분석이 있지만, 서경敍景은 산뜻하다. 아무리 큰 산이라도 멀리 있으면, 가까운 작은 산에 가리기 마련이다. 시야에 펼친 모습 그대로 썼다. 한마디 꾸밈이 없다.

 

마치 백자 달항아리를 보는 느낌이다. 천지가 데칼코마니 되어, ‘일원상의 원근遠近’을 비춘다. 동심의 세계가 선시의 기취機趣와 다르지 않다. 형식과 격조를 떠나 청정무구한 모습을 보여준다. 시나브로 설상雪上 돌기엔 ‘금모래 빛’으로 초겨울 동심이 참 곱게 익어간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벽송제원
벽송제원
벽송제원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