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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주인공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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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4 년 5 월 [통권 제1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71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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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에 노란 리본이 물결친다. 우리 동네 학교에도 난간을 따라 노란 리본이 나부낀다. 이때를 당하여,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그 어떤 말도 다 공허하여,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앉아있기가 민망하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규율을 지키고 어른의 말을 믿고 따랐던 쪽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할 말을 잃는다.

 

‘왕좌의 게임’이 자꾸 겹쳐진다. 이 드라마는 헐리우드 영화나 한국 드라마에 익숙한 나의 기대를 저버린다. 아무나, 그냥, 어이없이 죽기 때문이다. 나름 선의를 가진 사람, 성실한 사람, 원칙을 지키는 사람, 이익 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 드라마의 배역 상 중요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예외 없이 당한다. 처음에는 ‘아니, 저 사람까지?’하고 놀랐지만 계속 볼수록 놀라지 않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판타지라는 형식을 빌려 현실을 보여 주면서, 그동안 가치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한 2주 동안 TV를 켜지 않았음에도 세월호 침몰에 관한 이런 저런 소식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뇌를 점령했다. 현실을 이렇게 만든 건 무엇일까. 시스템이 문제라고도 하고 사람이 문제라고도 한다. 맞는 말이다. 주워들은 이야기 중에 재난에 대처하는 미국의 시스템이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우왕좌왕하는 우리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졌을 때 재난관리의 총책을 맡은 사람이 뉴욕 소방서장이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에 총책을 맡겼고 시장도 대통령도 다른 부처의 장관들도 그 일에서 만큼은 소방서장의 말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불난리, 물난리, 테러 등 많은 일을 겪고 난 뒤 수업료를 톡톡히 치르고 만든 시스템이라고 한다. 소를 몇 번이나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못하는 우리와는 다르다.

 

한숨을 쉬면서 남의 나라 시스템을 듣고 부러워하다가, 절집의 도감(都監)이라는 제도가 떠올랐다. 절에 큰일이 생겼을 때나 불사를 할 때 기구를 설치하고 책임자를 뽑는다. 상설기구가 아니고 비상시에 움직이는 체계다. 그 기구를 도감이라 하고 책임자 또한 도감이라 한다. 요즘 개념으로는 ○○본부에, ○○본부장 쯤 된다. 예컨대 조선의 간경도감도 그런 체제에서 경을 간행했을 것이다. 도감은 지위고하에 관계없이 해당 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맡는다. 그렇기에 대중의 신임을 받는다. 그 일에 관해서 만큼은 계획 단계부터 의사를 결정하고 일을 처리하는 과정까지 도감이 중심이 되어 주지나 방장, 모든 대중이 그의 말을 듣고 협조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재난구조 시스템을 현대판 도감제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남의 제도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조상이 물려준 밥그릇도 한번 잘 살펴봄직 하다.

 

좋은 시스템은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것을 만들어 운용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불교가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존속하는 이유는 종(縱)으로 횡(橫)으로 잘 짜인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 속에서 불교가 망할까봐 걱정하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잘 운용해온 불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림보훈』에는 이런 분들의 이야기가 다수 전한다. 대체로 송대 초기에 살았던 분들이다.

 

원통(圓通) 스님의 말을 들어 보자. “안위(安危)는 덕에 달렸으며, 흥망은 운수에 달렸다고들 하지만, 실로 받들 만한 덕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총림이 필요하겠으며, 기댈 만한 운수가 있다면 무엇 때문에 법도를 사용하겠는가?” 제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깐깐하다고 소문이 난 오조(五祖) 스님이 어느 절에 주지로 가게 되었다. 부임하자마자 사람들을 불러 업무파악부터 했다. 이 자리에서 예산 담당자가 머뭇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이렇게 꾸짖었다고 한다. “주제넘게 한 절의 소임을 맡았으면 큰 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마음을 다해야 한다. 한 해의 예산을 짜는 일은 전 대중이 걸린 문제인데도 그러고 있으니 나머지 세세한 일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 상주물이 산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느냐?”

 

황룡(黃龍) 스님은 돈 관리를 맡길 사람을 찾지 못해서 골머리를 앓았던 모양이다. 제자 회당(晦堂) 스님이 스승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 채고 여러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물리쳤다. 또 다른 제자가 “노스님은 감수(監收) 하나 채용하는 데 왜 그렇게 생각이 많을까요?”라고 불평했을 정도다. 이에 대해 회당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노스님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하나? 나라든 가문이든 모두 적임자 선발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옛 성인들도 다 이 일을 조심하셨다네.”

 

백운(白雲) 스님은 총림이 쇠퇴할까 염려했다. 그의 스승인 양기(楊岐) 스님의 걱정 어린 말씀을 제자들에게 늘 들려주었다고 한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자신만의 편안을 도모하는 것이 불교 문중의 가장 큰 근심거리이다.”

 

이상의 이야기들로 미루어 보아, 그때도 총림이 제대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의 안위와 불법의 혜명을 짊어진 자리에서 총림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불법이 침몰하지 않고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한편, 이제 우리의 안위는 누가 지켜줄 것인가. 나라가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회사는 주주에게 더 많은 배당금을 안겨주기 위해 비용을 절감했고, 정부는 돈을 위해 규제를 완화했고, 감독을 맡은 관리는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책무를 소홀히 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나는 호구노릇을 착실히 해왔다. 때문에 많은 생명이 침몰했다. 우리 모두의 공업(共業)이다. 참담한 노릇이다.

 

가족을 바다에 잃고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어떤 기도의 말도 무용해 보인다. 지금은 수술이 필요한 시점이다. 제도를 고치고 사람을 바꾸는 대수술 없이는 세월이 가도 치유가 불가능할 것이다. 답답함 속에 세월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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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불교학을 전공하였고, 봉선사 월운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다. <선림고경총서>편집위원을 역임했고 『승만경』, 『금강경오가해설의』, 『송고백칙』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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