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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진리의 태양은 언제나 빛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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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4 년 12 월 [통권 제2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60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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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김선근(보리 ․ 菩提) 명예교수 

 

 


 

 

동국대 앞의 조그만 오피스텔. ‘대승불교연구원’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노(老)교수가 문을 열자 방안에는 책이 가득하다. 지정석에 앉지 못한 책들은 공간이 되는 사이사이 입석(?)에라도 앉아 몸을 의탁하고 있다. 뒷방 신세인 ‘신입’책들에게는 연민의 감정이 느껴질 정도다. 

 

가방을 책상에 올려둔 노교수는 이내 차를 우려내기 시작한다. 정성스럽게 두 잔의 차를 준비한 뒤 연구실 한편에 마련된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의 진영 앞에 올린다. 정식은 아니지만, 삼배(三拜)의 예도 올린다. 그리고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바로 동국대 김선근 명예교수님이다. 

 

교수님의 일과는 이렇게 두선지식(善知識)께 예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차를 올려왔다. 헌향(獻香)도 했지만 “냄새가 난다.”는 이웃들의 항의(?)에 잠정 중단한 상태다. 

 


연구실 한편에 마련된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의 진영 

 

“오늘날의 저를 있게 해준 분들입니다. 아직도 두 스님을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와요. 이렇게라도 예를 올리고 더 열심히 정진하고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김 교수님은 두 스님과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이렇게 극진히 모시고 있는 걸까? 사연을 들어보니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들이 있었다.

 

제2의 부모님, 성철과 청담

 

“고향이 경북 김천입니다. 어릴 때 공부를 좀 잘했습니다. 하하. 부모님의 기대가 컸죠. 그래서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왔습니다. 촌놈이 갑작스럽게 도시에 오다 보니 여러 가지가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룸비니 불교학생회에 가입했습니다. 제가 원래 불자이기도 해서 곧바로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죠. 주로 종로 대각사에서 열리는 법회에 참석했는데 당시 룸비니 총재가 청담 큰스님이셨습니다. 그렇게 청담 큰스님을 뵙게 됐습니다. 청담 큰스님을 보면서 ‘나도 큰스님과 같은 대사(大師)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하하. 고등학생 시절 대각사와 도선사에 다니면서 신심(信心)을 키웠습니다.”

 

교수님은 1965년 청담 스님의 권유로 동국대 불교대학 인도 철학과에 입학했다.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에도 가입해 수행의 맛을 보기 시작했다. 이때 교수님은 청담 스님으로부터 ‘보리(菩提)’라는 법명(法名)도 받았다. 

 


김룡사에서 정진하던 당시 모습.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선근 교수님 

 

교수님은 구도부 선배들과 함께 매주 일요일 도선사 석불전에서 108배를 하고 ‘보현행원품’을 독송했다. 또 박성배 교수의 지도 아래 불교에 대한 토론회를 진행했다. 날이 갈수록 신심이 돈독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대학 첫 학기를 보내고 방학이 되어 부산 범어사에서 열린 수련대회에 참여했다. 

 

“수련대회를 마치고 주변 사찰을 순례하며 선지식들을 친견했습니다. 부산 선암사 설봉 큰스님, 양산 통도사 경봉·벽안·월하 큰스님, 대구 동화사 효봉 큰스님 등을 뵙고 문경 김룡사로 갔어요. 그곳에 성철 큰스님이 계셨기 때문에 마지막 순례지로 정했습니다. 

 

당시 김룡사 선방에는 법전 스님이 계셨고 종무소에서 총무 도성 스님, 재무 현경 스님, 교무 동진 스님 등이 소임을 보고 계셨습니다. 성철 큰스님을 뵈러 왔다니까 삼천배부터 하라고 하십니다. 힘들게 왔는데도 삼천배 예외는 없었습니다. 한여름에 오후 1시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절을 했습니다. 정말 죽다 살아났습니다. 저희들이 절하는 것을 보신 성철 큰스님께서 분발하라고 경책을 해주시니 분심(忿心)이 났습니다. 그렇게 삼천배를 하고 큰스님을 친견할 수 있었습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청춘들이 순례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성철 스님은 구도부 회원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삼천배를 마치자 성철 스님은 시원하게 미숫가루를 탄 큰 양동이를 들고 나타났다. “고생했다.”며 직접 미숫가루 음료를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큰스님을 뵙는데, 아주 눈에서 태양광과 같은 빛이 났습니다. 쥐를 잡는 고양이와 같은 눈빛이었다고나 할까요? 하하. 큰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영원에서 영원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정진도 게을리 하지 말라고 엄청 당부를 하셨습니다.” 

 


김룡사에서 정진하던 때 대중들과 함께 한 모습. 성철 스님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교수님이다 

 

김룡사에서 3박 4일을 보낸 교수님과 구도부 회원들은 다시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다. 성철 스님은 일주문까지 나와 학생들을 배웅했다.  

 

성철 스님을 비롯한 당대의 선지식들을 친견한 구도부 회원들은 그해 9월부터 봉은사에 들어가 대중생활을 했다. 스님들과 똑같은 일정이었다. 낮에는 각자 학교에 가 공부를 하고 저녁 7시면 어김없이 절로 돌아왔다. 학교까지는 배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겨울방학이 되자 구도부 회원들은 다시 김룡사로 향했다.

 

50일간의 안거와 20일간의 법문

 

김선근 교수님을 비롯한 구도부 회원들은 1966년 1월 8일부터 김룡사에서 50일간의 안거에 들어갔다. 김룡사 스님들과 구도부 회원들까지 합하니 30명이 넘었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세면하고 ‘보현행원품’ 독송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새벽예불하고 참선하고 도량 청소하고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또 스님들과 똑같이 각자가 매일 나무 한 짐씩을 했습니다. 일정이 빡빡했지만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시기였어요. 낮에는 정진을 하기도 하고 큰스님 법문을 들었습니다.

 


육사 군법사 시절 생도들과 함께 백련암을 찾아 성철 스님과 함께 한 모습 

 

 큰스님께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을 과학으로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려웠던 교리가 큰스님의 법문을 통해 쉽게 이해됐습니다. 

 

 법문을 들으면서 ‘큰스님은 어떻게 저렇게 논리가 정확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진리를 탐구할 수 있을까? 또 다양한 경전 구절들이 어떻게 청산유수처럼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스님께서는 열변을 토하셨습니다. 공부에 탄력을 받으면서 일주일간 삼천배를 하기도 했어요.”  

 

김 교수님은 “몸이 피곤해서인지 참선을 한다고 자리에 앉으면 ‘졸음 아니면 망상’ 이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김룡사에서 하안거를 맞았다. 교수님은 여기서 성철 스님의 법문을 20여 일 동안 들었다.

 

“큰스님께서는 ‘중도(中道)’ 법문을 하셨습니다. 『반야심경』으로 시작해 『육조단경』, 『금강경』, 『신심명』, 『증도가』등을 중심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큰스님 법문의 핵심적 내용은 ‘불교의 요체는 중도다’였습니다. ‘부처님도 중도를 정등각하셨다. 중도를 정등각했기 때문에 부처다’라고 계속 강조하셨어요. 처음에는 잘 알아듣지 못했는데 조금씩 이해를 하기 시작하면서 법문이 점점 귀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큰스님의 법문이 제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큰스님을 제 인생의 등대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저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의 ‘진리의 태양’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초발심(初發心)에 불타던 대학 시절 성철 스님을 만나 후 김 교수님은 시간이 될 때마다 백련암을 찾아 성철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교수님이 1969년부터 육군사관학교 군법사로 재직할 때는 방학 때마다 불자 생도들을 데리고 백련암을 찾아 성철 스님의 법문을 듣도록 했다. 

 

“저도 그랬지만 대학 시절 방학 때마다 다니는 성지순례가 생도들에게 큰 공부의 장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순수함을 좋아하셨던 큰스님께서는 생도들이 오면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사진도 함께 찍어주시곤 했어요. 

 

큰스님께서는 생도들에게 특히 ‘불공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불공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중생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또 ‘중도로 살면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렇게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인지 제가 데리고 다니던 생도 중에는 육군참모총장이 된 사람도 둘이나 되고 장군이 된 사람은 또 부지기수입니다.” 

 

그렇게 불자로서의 삶을 이어가던 중 청담 스님이 열반했다.

교수님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백련암을 찾은 교수님은 성철 스님에게 새로운 법명을 받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돌아온 성철 스님의 대답은 ‘노(No)’ 였다.

“청담 스님이 나고 내가 청담 스님이다. 청담 스님이 보리(菩提)라고 법명을 주셨으면 그것을 잘 써라.”

교수님은 “살짝 서운했지만” 곧 성철 스님의 말씀을 따르기도 했다. 

 

“두 분은 물도 새지 않는 사이라고 하잖아요. 성철 큰스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금방 이해가 됐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백련암에 가면 큰스님께서 ‘보리가 왔나? 쌀이 왔나? 콩이 왔나?’며 반겨 주셨습니다.

또 큰스님께서는 매일 삼백배 참회의 절을 하고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좀 더 깊게 공부를 하려거든 『육조단경』과 『증도가』를 읽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끝나지 않은 공부와 수행의 길

 

군법사를 마친 김 교수님은 1983년 동국대 교수로 모교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인도철학회를 창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 한국불교학회 회장을 맡아 불교학계에서는 최초로 ‘순례’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후배들이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간의 학회 활동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후학들이 더 좋은 연구 성과를 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인도정통철학과 대승불교』, 『모든 이웃을 부처님처럼』, 『마하뜨마 간디철학 연구』등의 저서와 수많은 논문을 발표한 교수님은 후학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좀 달라야 합니다. 학자들은 당연히 문헌 연구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불교학을 하려면 최소 5개 국어는 해야 합니다. 산스크리트어, 빨리어, 티벳어, 한문, 일본어 등 5개 국어는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불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 언어들을 해야 연구의 폭이 넓어집니다. 또 중요한 것이 현장 연구입니다. 불교를 하려면 인도를 가봐야 합니다. 거기서 그들의 삶을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언어도 현장에서 익히면 더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현지 사람들의 사유체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장을 보지 않고 연구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에요. 마지막으로 수행(修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자기 성격에 맞게 염불이든 주력이든 사경이든 참선이든 매일 일과로 하면 좋습니다.” 

 


법화경을 사경하는 손길이 정성스럽 

 

김선근 교수님은 성철 스님 말씀대로 매일 108배를 하는 것은 물론 2003년부터는 하루 1시간씩 『법화경』 사경(寫經)을 하고 있다. 교수님은 특히 산스크리트어와 영어, 한문 등 3가지 언어로 『법화경』 을 사경하고 있다고 한다.

 

“사경에 힘이 붙었을 때는 하루 16시간씩 한 적도 있어요. 사경을 하면서 좋은 체험도 했습니다. 또 건강도 좋아지고 해서 이제는 안할 수가 없습니다. 하하. 진리를 아는 것도 좋지만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 방편으로 사경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최근 고희를 맞아 발표한 논문에서도 성철 스님의 삶과 사상을 다루기도 했다. 교수님은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극복으로서의 성철의 간화선 사상’ 논문을 통해 “현재 우리는 ‘기능적 가치관’과 ‘시장형 인간관’으로 인간 존엄성 상실, 빈부격차, 환경오염 등으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게 하는 문제들에 봉착했다. 이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성철 스님의 간화선사상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며 “혜능이나 대혜의 선(禪)이 그들 시대에 있었던 문제의식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성철 스님은 인간에 대한 절대적 신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로써 간화선수행을 제시했다. 이런 스님의 노력은 기복중심적인 신앙풍토 속에서 사라져버린 자각(自覺)의 전통을 다시 일깨우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철 스님이 중도(中道)와 불공(佛供) 사상을 강조한 것은 전체 불교사를 재정립한 것이며 시대를 향도한 것이다.”고 밝혔다. 

 

교수님은 성철 스님의 중도(中道)와 불공(佛供) 사상은 지금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라며 “모든 생명을 부처님으로 모시는 것이야말로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들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철 스님의 정신이 가장 잘 표현된 것으로 ‘출가송’ 을 꼽기도 했다.

 

하늘에 넘치는 큰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 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내 홀로 걸어가노라.

彌天大業紅爐雪이요 跨海雄基赫日露라

誰人甘死片時夢가 超然獨步萬古眞이로다.

 

“큰스님의 정신은 출가송에 다 나와 있습니다.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겠다는 다짐이 묻어나잖아요. 큰스님께서는 부처님 진리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승복을 벗고 그쪽으로 가겠다고 하실 정도로 진리 추구를 강조셨습니다. 이러한 큰스님의 정신과 가르침을 되새기며 살면 좋겠습니다.” 

 

끊임없이 수행하고 연구하는 김선근 교수님을 보면서 ‘은퇴’는 거추장스러운 사족(蛇足)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교수님은 그렇게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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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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