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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손가락 사이]
성철스님 사리탑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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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  /  2018 년 6 월 [통권 제6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36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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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한창 꽃 피던 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5월 1일 노동절 아침, 허망 속에 흔들리는 본밑 마음을 달래고자 딸아이를 데리고서 해인사를 찾았다. 1992년 김국환이 부른 ‘타타타’를 중얼대며, 타박타박 흐린 날의 산길을 밟고 오른다. 타타타(tathātā), ‘있는 그대로’. 진여(眞如), 여여(如如), 진실(眞實)…. 노래를 듣다보면, 눈물도 덤이고, 아픔도 웃음도 기쁨도 근심걱정도 모두 덤이 되는 것 같다.

 

 

가야산 해인사 입구에 있는 성철 스님 사리탑

 

 

어느새 대웅전을 오르는 길목, 일주문 근처의 퇴옹당 성철 스님(1912~1993)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 앞에 선다. 사리탑을 부도탑(浮屠塔)이라고도 한다. 부도(浮屠)라. 뜰 부, 죽일(도살할) 도. 아니, 신성한 탑에 이런 글자를 왜 붙였던가? 한자 뜻으로 보면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래서일까. 부도의 죽일 ‘도’ 자를 그림 ‘도(圖)’ 자로 바꿔 쓰기도 한다. 사실 부도는 붓다(Buddha)의 음역(音譯)이기에, 새길 필요가 없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남무’를 산스크리트어 ‘나마스(namas: 歸命, 歸依)’의 음역인 줄 모르고 ‘남쪽에는…없다’고 번역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부도(浮屠)는 중국어 발음으로는 푸투(fútú)이다. 붓다(Buddha)의 음역이라는 설 외에, 스투파(stupa)의 음역인 솔도파(率屠婆)나 탑파(塔婆)의 전음(轉音)이라는 설도 있다. 어떻든 부도는 불(佛), 탑(塔), 승(僧)을 다 의미하는 것으로 쓰인다.

 

여기서 부도가 붓다(=불)와 탑 공용으로 연결되어 쓰이는 것은 이해된다. 왜 그런가. 불교 내에서 붓다가 입멸한 뒤, 그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 신앙 대상이 된 다음 역사적 몸의 그분(=붓다)이 지금 여기 안계시니, 붓다의 ‘사리탑’이 곧 ‘붓다’ 자신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사리탑으로 대치된 붓다 즉 ‘환유’(換喩)의 방식을 통해 이제 그분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위대한 정신적 존재인 ‘붓다’를 그 물질적 흔적이 ‘사리탑’과 좀 구별할 필요가 있다면, ‘부도’에다 ‘탑’ 자를 일부러 붙여서 부도탑이라 강조하면 될 일이다. 그래서 ‘부도’와 ‘부도탑’이 같이 쓰이는 것이라면 이해된다. 그런데 하필 붓다를 음역할 때, ‘뜰 부, 죽일 도’ 자를 조합하여 부도(浮屠)로 썼을까. 이런저런 의문에서 『조정사원(祖庭事苑)』의 부도(浮屠) 항목을 찾아보니 간명한 해설이 있다.

 

浮圖 : 불(佛), 탑(塔), 승(僧)

 

범어로 불타(佛陀. Buddha)이다. 혹은 부도(浮圖)라 하며, 혹은 부다(部多)라 하며, 혹은 모타(母馱)라 하며, 혹은 몰타(沒陀)라 한다. 모두 오천축(五天竺. 고대 인도의 동·서·남·북·중 다섯 나라)의 말이다.

 

지금은 아울러 각(覺)이라 번역한다. 도사(道士) [장융張融이 지었다고 말해지는]의 『삼파론(三破論)』에는 “불(佛)은 옛 경본(經本)에는 부도(浮屠)라 한다. 나집(羅什)이 불도(佛徒)라고 고쳤다. 그 글자의 본원[源]이 나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서[詔]를 내려서 부도(浮屠)라고 한 이유는 호인(胡人)(=인도인)이 흉악한 때문이다.

 

노자(老子)가 그들을 교화시켰는데, 그들이 처음엔 신체[形]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 머리를 깎았다. 하물며 베어서 죽이기까지야 했겠는가?” 석순법사(釋順法師)가 말했다. “경(經)에 이르기를 부도(浮圖)란 것은 범어(梵語)이다.

 

혹은 ‘장래 성천자(聖天子)가 될 상서로운[聖瑞] 신령스런 도상[靈圖]’이라 할 것이 바다에 떠서 이르렀다하여 부도(浮圖)라고 이른다. 오(吳) 나라 가운데의 석불(石佛)이 바다를 건너 갑자기 오게 된 것이 바로 그 일이다. 지금 자네가 도상(圖像)의 도(圖)를 폄훼하여 형벌의 죽임[屠]의 도(屠)로 한다면, (중략) 비슷하나 아닌 것이거나, 아니면서 비슷한 것이다.

 

외전[外書]에는 중니(仲尼)를 성인으로 삼지만, 내전[內經]에는 ‘(중니의) 니(尼)란 여자[女]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중니(仲尼)가 여자이다’라고 한다면, 자네가 어찌 그것을 믿겠는가. 오히려 도(圖. tú)와 도(屠. tú)라는 글자가 (뜻이 아니라 발음상) 서로 유사하듯이 또한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도(屠. tú)는 도(圖. tú)와 발음이 같으나 어느 쪽이든 음역이니 그 뜻을 새겨서는 안 된다는 취지이다. 마치 ‘중니(仲尼)’의 ‘니’를 여자[비구니]로 새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 부도를 그대로 새기면 사이비 해석을 하는 꼴이 된단다. 음역은 역시 음역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살아서는 ‘나’를 로고스의 공간에서 보여주려 하나, 죽어서는 카오스의 공간에 숨는다. 로고스는 정상 쪽으로 높아지려 하는 방향에서, 카오스는 지하바닥의 굴속으로 묻히는 방향에서 의미를 갖는다. 살아 있는 역사적 공간은 상대적 세계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시간의 파도에 깎이어 결국 흔적을 지워간다. 침묵과 고요라는 영원, 절대의 세계로 간다. 그 세계는 무덤이라는 표식으로 대지 위에 기억된다. 우리는 상대적 세계에서 살다가 죽어서 절대적 세계로 떠난다.

 

적멸보궁. 그런데 그(적멸보궁)의 건축의 기하학적 형식은 구상적 세계가 아니라 추상적 세계를 보여준다. 절대는 구상에서가 아니라 추상 속에서 살아 있다. 붓다나 큰스님들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스투파)은 그 자체로 그분들(붓다, 큰스님)의 법신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붓다가 부도이고, 부도탑이 붓다인 것이다.

 

사리탑은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며, 속되지 않고 성스러운 공간이다. 산자들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 오직 죽어서야만 다가설 수 있는, 거룩한-아득히-먼 곳이다.

따라서 그곳은 ‘묘(墓)’인 동시에 절대적 무언과 침묵이라는 형식을 통해 가르침을 전해주는 이른바 경건한 ‘교・학(敎・學)의 공간’이다. ‘묘’와 ‘교・학’은 이렇게 밀접하게 붙어 있다.

 

유교에서는 성현을 모신 사당[=廟]과 강학당[=學]의 배치를, 고저 혹은 평면 형태로, ‘묘→학’ 또는 ‘학→묘’ 식으로 배치되나, 그 기준점은 역시 ‘묘’이다. 묘(廟)이든 묘(墓)이든, 죽은 자가 산 자를 호출해내고, 줄 세우고,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 형식이다. 그곳에는 그 누군가 ‘죽었지만 살아서’, 오히려 그래서 더 확대된 ‘큰 바위 얼굴’처럼 성스러운-위대한-모범성을 자랑한다.

 

묘(廟, 墓)는 죽은 자들이 자리한, 그래서 성스러워진, 엄숙한, 고요한, 신성불가침의 절대공간으로 빛을 발한다. ‘종교’의 ‘종’이 그 자체로서 ‘교’의 의미를 갖듯이. ‘안 계시지만’ 무언과 침묵으로서 ‘계신’ 그 의미. 성철 스님도, 안 계시지만 사리탑이라는 무언, 침묵의 형식으로 늘 계시며 가르치신다.

 

성철 스님의 사리탑은 조형면에서 다른 것과 좀 다르다. 이 사리탑은 열반 5년 뒤, 1998년에 새로 조성한 것이라는데, 내용이 궁금해서 ‘해인사성철스님문도회’의 건립설명문을 잠시 읽어본다. 「퇴옹당 성철 대종사 사리탑」이란 글 밑에 「나를 찾아가는 禪의 공간」이란 제목이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

 

바로 이 대목에 눈길이 딱 멎는다. ‘사리탑’은 역시 ‘선의 공간’ 즉 큰 배움터임이 부각돼 있다. 성철 스님은 사리탑으로 살아서 계시며 여전히 “자기를 바로 보라! 자기를 바로 보라!” 하신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죽음을 으슥한 곳, 깊은 곳, 보이지 않는 곳, 산속으로 자꾸 내몰고 있는가? 그런 축출과 배제의 역사는 어디서 온 것일까? 우리 삶이 팍팍해서? 아니 우리들의 삶이 죽음보다 더 위대해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삶과 죽음을 각박하게 구별하기 시작했다.

 

다시 그것을 친근한 것과 차갑고 무서운 것, 아름다운 것과 추악한 것으로 차별하고, 그런 다음 다시 후자를 삶의 세계로부터 축출하기 시작했다. 이 ‘못된’ 인식론적 프레임은 어딘가 꼬일 대로 꼬여 있다. 죽음은 삶의 저쪽에 있지 않다. 이쪽, 여기, 이 속에 있다. 삶의 속살에 동거해 있다. 그런데 자꾸 우리는, 저쪽이라고 눈길을 돌리며 우겨댄다.

 

무덤은 ‘덤’이다. ‘무(無)의 덤’이다. 맨 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 챙겼듯이, 죽어서 흩어지지 않고 여기 살았었다는 ‘표식’과 그런 ‘기억’ 하나를 얻었다. ‘무(無)’에서 ‘덤’으로 얻은 것. 삶의 산자락에, 달빛을 닮은, 꽃 한 송이 피운 것이다. 그만하면 됐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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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
영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영남대 철학과 졸업, 일본 츠쿠바(筑波)대학에서 문학석사・문학박사 학위 취득. 전공은 양명학・동아시아철학사상・문화비교. 동경대, 하버드대,북경대, 라이덴대(네덜란드) 객원연구원 및 방문학자. 한국양명학회장 · 한국일본사상 사학회장 역임했다. 저서로 『노자』,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일본판, 대만판, 중국판, 한국판),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상상의 불교학』 등 30여 권이 있고, 논문으로 「원효와 왕양명」, 「릴케와 붓다」 등 200여 편이 있다.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6권의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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