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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구하려면 질문부터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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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갑  /  2018 년 6 월 [통권 제6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3,23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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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찾아1


연재를 시작하며

 

한 사람이 미치면 그냥 미친 거지만 백만 명이 미치면 종교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광기와 종교 사이는 얼마나 먼 것일까?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것일까? 생각해 보면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광기에 사로잡혔던가.

 

광기의 역사에서 본다면 기독교가 일으킨 십자군 전쟁이나 히틀러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는 다를 게 없다. 이교도를 향한 증오는 신의 이름으로, 이민족을 향한 증오는 문명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수백 만의 희생이 명약관화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광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다.

 

순교나 공양은 어떤가? 독실한 신앙의 증거로 예찬되는 이 자기희생적 제의(祭儀)가, 실상은 자기파괴적 광기가 아닐까? 광기의 역사에서 본다면 타자를 향한 증오보다도 자기를 향한 파괴적 신앙이 훨씬 더 비극적이다.

 

도대체 무엇이 자기 발로 걸어가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고, 온몸을 화염의 불쏘시개로 쓰게 하는가? 이것이야말로 광기의 극한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독실한 신앙심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무엇이 그 혹독한 고통을 쾌락으로 바꾸는지 궁금해서다.

 

이 글은 종교를 심리학적 측면에서 이해해 보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종교라고 부르는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심리학의 용어를 빌려 해명하려는 것이다.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를 만들고, 신앙심을 북돋는가? 왜 인간은 절대자를 상정하고 스스로를 구속할까? 등등의 문제를 제기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다.

 

따라서 초점은 불교에 맞춰지겠지만, 불교에 한정하기보다는 동양의 유교와 도교, 서양의 기독교 등 종교 일반에 걸쳐 필요한 내용을 서술하려고 한다. 이런 비교종교학적 태도가 오히려 불교의 고유한 가치를 더 드러내리라고 믿는다.

 

심리학은 프로이트부터 칼 융과 아들러를 거쳐 라캉에 이르기까지, 기능적인 측면을 지양하고, 철학적, 혹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아울러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나 회화, 문학 작품 등에서 널리 차용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그렇게 본다면 ‘심리학을 중심으로 인문학적 지평에서 바라보는 종교와 종교현상’ 정도가 이 연재를 총괄하는 제목이 될 성싶다. 또한 비록 최대한 논리적 해명을 추구하겠지만, 이 또한 해석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이는 심리학은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겸허히 수용함으로써, 자칫 과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독단을 배제하려는 것이다. 종교적 독단만큼이나 과학적 독단 또한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문제를 제기하며, 원효에게 묻다

 

원효 스님이 당나라 유학길에 하루는 동굴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손을 더듬거리다가 바가지에 담긴 물을 찾았다. 스님은 벌컥벌컥 맛있게 들이켜고 다시 깊은 잠에 들었다. 아침이 밝아 잠에서 깬 스님은 자신이 간밤에 먹은 물이 해골바가지 썩은 물임을 알고 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왜 간밤엔 그토록 달게 마시고 아침엔 토하는가? 물은 같은 물인데, 마음이 달라진 것.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두 마음이 만드는 것임을 깨닫는다. 스님은 가던 길을 돌아섰다. 이미 깨달았는데 다시 도를 찾아 먼 길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이제부턴 당신의 깨달음을 실천하며 살 일이었다. 그런데 스님께 묻고 싶다. 왜 거기서 멈추었는지? 해골바가지를 보는 순간 당신에게 구역질을 일으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볼 만하지 않았냐고 말이다.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수행하고 있는 조과 스님을 찾아가 인사드리고 질문하고 있는 사대부의 모습을 그린 그림. 조과 스님은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선승이며, 예배드리고 있는 사대부는 백거이로 보인다. 

 

10여 년 전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에 갔을 때였다. 우리 일행은 현지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장사의 전통시장을 찾았다. 시장 구경도 하고, 간단한 현지 음식도 맛볼 요량이었다. 그때만 해도 장사 변두리의 전통시장은 전등을 띄엄띄엄 켜놔 칙칙하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였다.

 

가이드는 우리를 한 식당으로 안내하고 그나마 한국인이 먹기에 괜찮을 거라며 민물가재요리를 내놓았다. 민물가재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후에 소스를 뿌린 음식이었다. 홍주(紅酒)에 가재요리. 꽤 어울리는 조합인데, 다들 먹지 못하였다. 향신료 냄새가 너무 강했던 것이다.

 

왜 장사 사람들에겐 맛있는 요리가 한국인의 입맛엔 맞지 않을까? 만약 장사 사람과 서울 사람이 어려서부터 서로 바꿔 살아도 똑같을까? 당연히 아니다. 비록 한국인이라도 어려서부터 장사에 살았다면 민물가재 요리의 강한 향신료 맛을 충분히 즐길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상상해보자. 아마존 원시림 깊숙이 사는 원주민 중엔 사람의 육신은 그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서 육신을 먹는 행위는 그 주인의 영혼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믿는 부족이 있다고 말이다. 실제로 식인풍습은 이러한 믿음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렇다면 그들에게 해골에 고인 물은 영혼의 정수로 여겨지지 않을까?

 

해골 속 물은 썩은 물이 아니라, 어느 전사의 용기, 혹은 어느 현자의 지혜가 담긴 좋은 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런 곳에서 원효 스님이 살았다면, 우연히 해골 썩은 물을 먹은 아침에 스님은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지 않을까?

 

불교는 쉽게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다고 말한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어느 것도 없는데, 오직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한다. 이런 가르침의 초점은 청정무구(淸淨無垢) 본래면목(本來面目)에 맞추어져 있음이 분명하다. 그대의 여래(如來)를 깨닫고 해탈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자칫 현존하는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절실한 삶의 현장을 외면하기 십상이다. 더구나 이렇게 실존적 문제를 제시하며 문제의 원인을 밝히려는 태도를 어리석은 일로 치부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불교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제는 누가 왜 독화살을 쏘는지? 따져볼 일이다.

 

묻고 따져야 한다

 

다시 원효의 마음을 따라가 보자. 간밤에 목이 말랐을 때 바가지 물을 마신 것은 욕구(欲求, need)에 부응한 것이다. 욕구는 자연스런 것이고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본래면목이다. 생명현상은 배고프면 먹고 싶고, 목마르면 마시고 싶은 욕구가 생겨야만 가능하다.

 

이런 욕구는 선천적인 것으로, 본지풍광(本地風光), 어떤 조작도 인위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이고 따뜻한 햇살이다. 반면에 밝은 아침에 해골을 보고 구토를 느끼는 마음은 인위적이고 후천적인 것이다. 환경과 관습, 문화와 전통 등이 일으키는 바람이다. 때론 미풍(微風)이 불다가도 광풍(狂風)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나는 알지. 이 스테이크는 실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것을 내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내 두뇌에 맛있다는 신호를 보내준다는 것을 나는 알지.”

 

영화 <매트릭스>에서 사이퍼가 스미스 요원에게 한 말이다. 사이퍼의 말대로 스테이크는 실재하지 않는다. 본래무일물인데, 무엇이 실재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여기서는 실재성에 대한 복잡한 철학적 논의는 차치하고, 일단 스테이크에는 본래 아무런 맛이 없다는 정도로 사이퍼의 말을 이해하자.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등장인물 사이퍼는 스테이크 맛을 좋아 스스로 거짓된 환상 속에 갇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스테이크에서 느끼는 맛은 후천적이고 인위적인 것이다. 불교로 말하면 유위법(有爲法)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등장인물 사이퍼는 스테이크 맛을 좇아 스스로 거짓된 환상 속에 갇히기를 바란다.

 

“유위가 만들어 내는 모든 존재는 꿈이요 환상이요 거품이요 그림자 같
은 것이다.(주1)”

 

그러고 보면 사이퍼는 불교의 존재론을 몸으로 터득한 사람이다. 그는 매트릭스가 지배하는 세계의 실상을 보았다. 거품과 다를 게 없는 환상, 실상을 감춘 그림자. 진실을 깨달은 대가로 그는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삶을 산다. 하릴없이 시간이나 보낸다는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맛없고 메마른 일상을 보낸다.

 

꿈도 환상도 없는 삶이 그렇지 않겠는가. 이 영화에서 진실을 본 사람들은 허름한 넝마를 걸치고 멀건 죽으로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출가자처럼 머리까지 깎은 모습이고 보면, 어쩌면 깨달음의 세계를 영화는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이퍼는 그런 무미건조가 싫었다. 하여 가난하고 맛없는 진실보다는, 부유하고 화려한 거짓을 택한다. 그는 동지들을 배반하는 대가로 다시 캡슐 속에 넣어져 꿈속에서 살고자 했다. 그 속에서 그는 아리따운 여자들에 둘러싸여 맛있는 스테이크를 자르는 꿈을 꿀 것이다.

 

이런 내용이 그저 SF영화이기에 가능한 걸까? 스테이크가 입 안에 들어오면 두뇌가 반응한다. 두뇌는 신호를 전달받고 전달한다. 만약 두뇌의 신호전달체계에 조작이 가해진다면, 두뇌는 조작된 대로 반응할 것이다.

 

개에게 고기를 줄 때마다 불을 켜는 일을 반복하면, 개는 고기를 주지않고 불만 켜도 침을 흘린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이다. 아무려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두고 개에게 행했던 실험을 운운할까. 인간은 훨씬 더 복잡하고 정밀하다.

 

따라서 이런 비유 자체가 인간에겐 매우 모욕적인 것이다. 하지만 조건과 반응 사이의 기본적인 메카니즘은 크게 다르지 않다. 거칠게 말한다면 연기론(緣起論) 또한 같은 범주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 훗날, 과학기술이 훨씬 더 발달했을 때, 20년의 경험을 응축하여 한 번에 입력시킬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한국인에게 장사 사람들의 20년 경험을 입력한다면, 그러면 향신료 강한 장사의 민물가재 요리도 맛있게 먹을 것이다.

 

원효 스님에게도 아마존 원주민의 경험을 입력한다면, 스님은 아마도 우연한 행복감에 흐뭇한 미소를 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라면 더 묻고 따졌어야만 했다. 그 자리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말 게 아니었다.

 

도대체 누가 나로 하여금 토하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인지, 내게 구토로 반응하게 만든 조건에는 어떤 것들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 묻고 따졌어야 했던 것이다.

 

여행 코드, 상징과 은유

 

영화는 상징(symbol) 체계이다. 영화 속 장면이나 소품은 메시지를 담고있는 은유(隱喩, metaphor)이며 상징이다. 예컨대 <매트릭스>에서 요원들이 네오의 뱃속에 집어넣은 벌레는 인간의 의식 속에 이식된 관념을 은유한. 즉 어떤 관념은 선천적이거나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이식되는 것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식하는가? 영화처럼 특정한 임무를 맡은 요원들이? 아니면 전능한 신이? 아니면 정말로 자연스럽게? 만약 누군가에 의해 특정한 관념이나 생각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심어질 수 있다면, 죽는 그날까지 행복한 꿈을 꾸다가 죽게 해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죽어서도 저 높은 하늘나라에 올라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환상을 심어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종교가 그렇게 해 온 것 아닌가.

 

답을 구하려면 질문부터 해야 한다.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지만, 아는 게 병. 다 필요 없고, 부자에다가 인기인이 되어 늘씬한 미인들에게 둘러싸여 한평생 흥청망청 사는 꿈을 꾸게 해달라는 사이퍼의 말이 훨씬 더 진실 되게 다가오는 저녁이다.

 

하여튼 여행을 떠나보자. 마음속 깊이 가다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사건도 겪을 것이다. 그때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교감하다 보면, 그 속에 무엇이 어떻게 숨어 있는지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어딘가에서 웅크리고 있는 참 나를 발견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주1)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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